초콜릿,산책, 수로와 골목
브뤼헤는 브뤼셀에서 9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시다. 책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가져간 여행책에는 브뤼헤가 고작 두 페이지로 간단히 소개되어 있었는데 압도적인 풍경을 감안하면 그보다 길고 자세한 페이지를 나눠 받아야 하지 않나 싶다.
-p.205,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2015년 7월에, 이글루스를 돌아다니다가
세상의 끝에서-만담으로 때우는 벨기에 여행기: http://ladywitch.egloos.com/1506492
이 글을 발견했다. 그때까지 브뤼헤는 책에 나오는 도시였는데 (비슷하게 앤트워프도 그랬다) 글이 재미있는 것도 있지만 읽다 보니 너무 내 취향의 동네인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하러 가는 게 아니면 사는 동네 주변만 걸어 다니는 정도인데 (미국 8년 살면서 ‘휴가’로 어딘가에 가 본건 샌프란시스코 밖에 없음) 브뤼헤에 가 보고 싶어 졌다. 생각해보니 영국-벨기에는 기차로 갈 수 있고, 어라 주말에 그냥 다녀올 수 있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녀온 이후로 브뤼헤는 ‘그냥’ 가는 동네가 되었다. 한 번은 브뤼헤 vs 앤트워프 둘 중에 하나를 고민하다가 결국 앤트워프로 갔지만. 앤트워프도 좋아하지만 멍하게 쉬고 싶을 때 떠오르는 곳은 브뤼헤.
정세랑님 에세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읽다가 브뤼헤가 나와서 반가웠다. <세상의 끝에서-만담으로 때우는 벨기에 여행기>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오지만, 브뤼헤는 나에게도, 손에 쏙 들어오는, 예쁜 것을 모아놓은 작은 상자 같은 곳이라, 누가 근처로 여행 간다고 하면 이메일을 간략하게 보내는 - 꼭 브뤼헤에 가라 - 그런 동네라서.
벨기에 첫인상은 언어 (뭔가 3가지 정도 전광판에 뜨는데 영어가 안 보여...), 사람들. 그때 쓴 메모를 보니
기차를 타러 가는데, IC라고 앞에 적힌 것과 안 적힌 것의 차이를 몰라서, 여기서 타는 게 맞나 싶어서 둘러보다가 중년 여자분이랑 눈이 마주쳤다. 얼른 물어보라는 몸짓을 해서 (여기 사람들이 보통 좀 이렇더라) 브뤼헤로 가는 기차를 탈 건데 이게 맞냐고 물어봤다. 브뤼헤 발음 때문에 좀 버벅거리다가 적어서 보였다. 불행히도 이 분도 이 기차가 브뤼헤까지 가는지는 모른다고 했는데 전광판에 stops가 뜨고 바로 브뤼헤도 뜨자 같이 기뻐해 주었다. - 2015년 7월 메모
그리고 초콜릿.
기차에서 내려서, 보통 유럽은 가게가 일찍 닫으니 뭔가 사가야겠다 싶은데 옆에 바로 레오니다스가... 역시 벨기에인가 하며 들어갔다. 먼저 온 손님들이 뭔가 가득 사서 나가고 난 후 이것저것 물어봤다. 너무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기쁨). 우선 4개 정도를 구입했는데 2유로가 안된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이 동네 초콜릿만은 진짜 싸더라. - 2015년 7월 메모
벨기에 여행 간 사람들은 거의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초콜릿 마구마구 사게 되는. 나도 결국 레오니다스에서 엄청 사고, 곳곳의 다른 초콜릿 가게에서도 조금씩 사 모았더니 (무게로 팔쟎아) 양이 꽤 되었다. 마카롱도 사고 (피에르 마르콜리니). 잘 챙겨 와서 야금야금 꺼내먹었다. 그전까지는 다크, 70% 이상, 만 부르짖다가 2015년 이 여행 이후로 트뤼플 초콜릿의 세계에 빠졌다. 딸기 크림이 든 화이트 초콜릿 트뤼플을 일부러 사서 먹는다던가. 초콜릿 사러 벨기에 가고 싶다.
브뤼헤 갈 때마다 가는 숙소는 Loreto.
기차역에서는 좀 걸어야 하지만 광장과 가깝고 깨끗하고 조용하다. 가격도 적당하고. 아침식사 포함이었는데 아침식사는 깔끔한, 딱 유럽 중저가 호텔 아침식사다. 당연하다는 듯이 에어컨은 없었는데, 보통은 이게 문제가 안되지만 2015년 7월은 또 이상기후라 꽤 더워서 좀 힘들었다.
브뤼헤에서 볼 것이 뭐가 있냐고 물으면 그냥 동네 그 자체,라고 대답한다. 진짜로. 작은 골목, 오래 이곳을 지켜온,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쌓인 건물이, 길이, 동네가, 너무 예쁘다. 곳곳에 성모 마리아 장식이 있는데 Church of Our Lady 앞의 펌프 위에 올려져 있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너무 아름다웠다. 살짝 감은 눈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여 이 동네와 잘 어울린다. 지내는 동안 여러 번 그 성모상을 보러 갔다.
나는 세상이 끝나는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요한묵시록도 좋아(?)하고 거기 등장하는 네 마리 말도 좋아한다. <Good Omens 멋진 징조들>의 War, Famine, Pollution, Death 라던가, 브뤼헤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네 마리 말 이라던가. 예쁘고 아기자기한 동네에서 푸르스름한, 세상에 종말을 선사하는 자들을 보니 새로웠다.
그러다 골목 돌면 바로 예쁜 수로, 백조. 다리 하나하나도 귀여운데. 레이스랑 고블랭이 가득한 가게들 하며. 다녀와서 <Girl in a green gown>을 읽다가 이런 브뤼헤 특산품이 나와서 반가웠다.
The term scarlet did not originally describe a specific colour but a superior type of woven wool, made silky-smooth by the long and complex procedures of filling, teasing, clipping and shearing, only available in Flanders, with Bruges a major centre of production.
- p.89, <Girl in a green gown> Carola Hicks
벨기에니까, 하고 감자튀김 가게도 들어갔다. 소스로 마요네즈에 뭔가 가미한 것을 추가했던 것 같은데. 감자튀김은 양도 엄청 많고 맛있어서 맥주 한 캔이랑 같이 책을 읽으면서 느긋하게 먹었다 (결국 다 못 먹었지만).
브뤼헤에 머물 때는 그냥 늘 그랬다. 계획 같은 거 없이 산책한다. 책을 읽기도 하고. 몰아서 이것저것 생각도 하고. 돌아다니며 길을 잠시 헤매다가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오는 곳을 보고 그쪽으로 가서 스트라치아텔라 - 그때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다시 읽어서. 어쨌든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 가장 맛있었던 스트라치아텔라. - 를 먹고. 길을 헤매도 딱히 위험하다는 감각이 없고 길이 예쁘고 아기자기해서 그냥 기분 좋게 걸어 다녔다.
와플은, 뭐 그냥 길에서 사 먹는데 막 구운 플레인 와플은 그냥 그대로 완벽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브뤼헤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니 그냥 예뻐, 좋아, 멋져, 다시 가고 싶어, 코비드바보 밖에 생각 안 난다.
브뤼헤에서만 한 달을 지내고 싶었다. 매일 수로의 백조들을 보고, 17킬로미터 떨어진 바다에서 날아오는 갈매기들도 보고, 골동품을 구경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물고 싶었다.
- p.218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2015년 7월, 브뤼헤에서 돌아오는 날은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고 추웠다.
정세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위즈덤하우스
<세상의 끝에서-만담으로 때우는 벨기에 여행기>: http://ladywitch.egloos.com/1506492
Terry Pratchett, Neil Gaiman, <Good Omens> Penguin Random House UK
Carola Hicks <Girl in a Green Gown> Vintage
Umberto Eco <The Mysterious Flame of Queen Loana> Mariner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