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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j May 14. 2021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Castle Park, Bristol

그것은 벚꽃나무 숲이었습니다.
이틀이나 사흘 후에는 벚꽃나무가 활짝 필 것으로 보였습니다. 올해야말로 그는 결심한 바가 있었습니다. 활짝 핀 벚꽃나무 숲 한가운데서 꼼짝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어 보겠다고.
- <활짝 핀 벚꽃나무 숲 아래> 사카구치 안고, [일본 호러 걸작선], 책세상


모란, 작약, 벚꽃, 월계수, 자작나무. 꽃이나 나무의 정령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여기저기에 많다. 모란이나 작약, 벚꽃은 사람을 홀려서 정기(?)를 빨아간다는 엉뚱한 비난을 받기도. 정기 같은 거 빨아가서 무슨 소용이 있어. 굳이 꽃/나무가 왜 성애를 나누지... 차라리 죽여서 나무 밑에 묻어 거름으로 쓰겠다면 몰라도.


다프네(월계수)와 아폴론의 경우는 순서가 틀렸지 - 님프가 아폴론을 피해 달아나다가 월계수로 변화하였으니. 그리스 로마 신화를 어릴 때 읽은 것은 세상을 사는데 여러 가지 의미로 도움이 된 것 같다. 인간의 욕망과 다양한 범죄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었으니까.


북쪽 나라로 가면 자작나무. 어릴 때 민화에서 자작나무 정령에 대해 읽었는데 그때는 자작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를 몰랐지만 가냘프고 예쁜 나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묘사가 그러해서. 핀란드에서 본 자작나무는 숲의 여인 lady of the woods 라 불리는 이유를 바로 이해할 만큼 아름다운 나무였다. 하얗고 옅은 녹색에 가냘프지만 곧게 뻗은.

 



지냈던 동네마다 좋아하는 나무가 있었다. 가냘픈 자그마한 산수유. 이른 봄이면 노란, 자그마한 꽃을 몽글몽글하게 피웠다. 커다란, 하얀 목련이 피는 나무. 꽃 한 송이 한송이가 크고 묵직한 목련은 큰 나무에서 무리 지어 피어나면 옛 신전의 사제가 떠오른다. 자줏빛 목련도 좋아하지만. 연못가의 수양벚나무는 저 아래 뭐가 묻혀있어도 수긍할 것 같은 아름다움을 가졌다. 수국이 가득한 정원도. 꽃나무만? 이냐면 메타세쿼이아를 빼놓을 수 없다. 사계절 내도록 좋지만 특히 겨울, 싸라기눈이 내릴 때 그 아래를 걷는 것을 좋아했다.


브리스톨에는 공원이 많고 큰 나무가 있는 집도 꽤 있어서 산책하다가 반해버리고는 한다. 작년 봄부터는 Castle Park의 두 그루의 겹벚나무와 사랑에 빠졌다.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라고 하지만 한 철은 매년 돌아오고 매년 그 시기에 사랑에 빠지는 걸. 볼 때마다 기분이 좋고, 그냥 보고 있으면서 계속 사진을 찍게 되고, 그 시기에는 늘 산책을 나가서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꽃이 지더라도 나무를 보면서 그다음 해 다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

벚꽃이 핀단 말이야.
벚꽃하고 약속을 한 거야?
벚꽃이 피니까 그걸 본 다음에 떠나야 한다고.
어째서?
벚꽃나무 숲 속으로 가봐야 하니까.
그러니까 어째서 가봐야 하는데?
꽃이 피니까.
꽃이 피는데 왜?
꽃나무 밑에는 차가운 바람이 꽉 들어차 있으니까.
꽃나무 밑에?
꽃나무 아래에는 끝이 없으니까.
- <활짝 핀 벚꽃나무 숲 아래> 사카구치 안고, [일본 호러 걸작선], 책세상


나무 아래에 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푸른빛이 조금만 보이는 꽃이 가득한 천장. 차가운 바람이라니 그저 꽃이 가득한데.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걸까.



Castle Park 는 브리스톨 주요 관광지(...)중 하나인 old city 와 시내 중심가 사이에 있다. 원래 옛 건물이 많았던 모양인데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많이 무너지고 공원이 들어왔다. 강가를 돌고 The left handed giant 라는 크고 예쁜 펍과 다리로 연결되어있다. 작은, 정성껏 가꾼 정원과 벚나무길이 있어서 일 년 내내 산책하기 좋다. 공원을 나와서 (강과 반대편으로) 길을 건너면 Waterstones (서점)가 있다.



Castle Park Tree Trail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 Lucia with 에피톤프로젝트

<활짝 핀 벚꽃나무 숲 아래> 사카구치 안고, [일본 호러 걸작선], 책세상

The Left Handed Gi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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