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마킹 좀 해주시겠어요?

AI 대리님이 갓벽하게.

by 하니고

나는 나의 커리어 중 10년 이상 전략일을 했다. 내가 직접 전략컨설팅에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매킨지 BCG 베인 등 글로벌 컨설팅 3대장 출신의 보스들-동료들과 오랫동안 일을 했으니 국내에서 전략좀 한다는 사람들에게 일을 배웠다고 할 수도 있겠다.


돌이켜보면 수많은 날들의 밤을 새워가며, 주말을 반납하며 장표 하나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애썼었고

그 수 많은 장표들에 대해서 날카로운 지적을 받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었다.


단어 하나하나, 그리고 데이터포인트 하나하나에 대해 그 논리와 근거(rationale)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이 되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챌린지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이 '설명'을 위해서는 작게는 수십장 많게는 수백장의 appendix 혹은 back-up 자료가 만들어지고 덧붙여졌다.


전략은 시장과 우리 프로덕에 대한 리서치/분석이 기본이 되어 논리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방향성과 실행계획을 도출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시장분석- 즉 market sizing 및 경쟁사 벤치마킹이다.

'상황파악'이 명확하게 되어있어야, 그걸 기반으로 전략수립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market sizing은 내가 속한 시장 자체가 의미있는 시장인지를 보는 작업이다.

프로덕이 아무리 좋더라도 내 프로덕을 살 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면, 즉 내가 먹을 수 있는 파이 자체의 크기가 크지 않다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성장성을 같이 보는데- 현재는 작은 시장이라고 하더라도 두자리수의 고속 성장을 하는 시장이라면 뛰어들어볼 만 하고, 현재는 의미있는 규모더라도 침체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시장이라면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사 벤치마킹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의 프러덕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경쟁자들이 어떤 플레이를 하느냐에 따라서 프로덕의 운명이 바뀌게되는 경우가 흔히 있기 때문이다. 또, 경쟁사들의 플레이는 언제나 유동적이기 때문에 수시로 움직임을 파악해서 기민하게 대응해야한다.

단, 시장이 독과점 시장이거나, 비즈니스 사이클이 긴 수주사업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긴 하다.




전략의 업무가 '분석'과 '전략수립'이라는 두 파트로 크게 나뉜다고 하면, 보통은 시간배분을 8:2 정도로 하게된다.

그만큼 분석이 상당히 어렵고 중요하며 리소스가 많이 드는 작업이다. 시니어들은 보통 주니어들에게 작은 단위의 리서치를 맡기고 리서치결과를 취합해서 인사이트를 도출한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기 시작하고 있지만, 클로드 등 많은 AI 툴들이 꽤 수준 높은 분석 작업을 해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 했던 적도 있었다. 근거가 없는 거짓된 정보와 데이터를 주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구체적인 근거에 대한 질문과 추궁들을 더하게 되면 꽤 괜찮은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것 까지 문제 없이 가능해보인다.


내가 시니어로서 주니어에게 맡기던 작은 단위의 리서치 작업을 AI에게 시켰던게 작년이라면, 올해는 인사이트와 제언까지 꽤 그럴듯하게 뽑아내는 수준까지 온 것 같다.


주니어들에게 맡겼었다면 그들이 온갖 오픈소스와 유료서비스를 통해서 데이터를 긁어모으고 분석하고 내용정리하여 PPT로 draft를 만들어오는데 -인원수와 퀄리티에 따라 다르겠지만 통상 대기업의 전략팀이라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2-3주 정도 걸렸을테고, 나는 draft를 보면서 잘못된 부분에 대해 수정사항을 지시하고 추가리서치 필요한 부분에 대한 task를 주고나서 또 다른 1-2주를 기다려야했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내 의미를 명확하게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거나, 혹은 내가 내 의도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된 작업물의 결과에 대해서 크게 실망과 좌절을 하면서 다시 해오기를 독촉했을 것이다.


이런 왔다갔다 작업이 수차례 반복된다.


그런데 AI는 이 모든 작업들과 back-and-forth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수정을 한시간도 안되는 시간 내에 다 해버린다.(물론 비싼 유료구독권이 있다면).


게다가 이 한시간마저도 내가 AI의 결과물을 읽어내고 문제점을 발견하고 제안을 하는 그 시간이 대부분이지, AI가 작업을 하는시간은 '딸깍' 마우스 클릭 이후 5분도 안걸린다.


즉 'AI'가 아니라 '내'가 프로세스의 bottleneck이다.




오늘은 나는 다음주에 5명의 주니어에게 벤치마킹을 시키기 위해서 잡았던 directional한 미팅을 캔슬해버렸다.

AI에게 일을 시키고 나서 단 한시간 만의 일이다.


지금 내가 해야할 건 이 AI의 결과물을 보고서 AI가 제안해주는 방향성에 대해 논리의 허점이 없는지 체크하고 이중 어떤 것을 우선순위로 둘지 의사결정하는 것이다.

주니어들에게 작업을 설명 하고, 결과물을 기다리고, 실망하고, 다시 지시하고, 기다리고, 취합하는 일이 아니다.

꽤 일 잘하는 AI 대리님을 데리고 있기에, 주니어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물론, AI에게 일을 '잘' 시키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 대한 업무의 굳은살 혹은 근육이 있어야 한다.


결국 뭘시키고 뭘 질문할 것인가가 핵심인데, 내가 업무에 대해서 근육이 없는 사람이라면 매우 피상적인 질문을 하게되고 거기에 AI는 깊이 없는 분석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AI가 갓벽한 대리 수준에 왔다는게 놀랍고도 현재 주니어레벨의 친구들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 씁쓸하긴하다.


그리고 조금 다른 결로 나는 이런 결과가 조금 무섭기도 한데, 전략수립의 업무는 이제 통상 나의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짧게는 한달 길게는 3개월이상 씩 걸리는, 그리고 때로는 외부 컨설팅을 이용한 비싸고 오래걸리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더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짧게는 하루만에 전략수립이 가능하고, 모든 기업들이 매우 기민하고 빈번하게 시장현황과 경쟁현황을 관찰하면서 수시적으로 플레이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고, 나의 입장에서는 그에 따라

빠르게 플레이 변경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회사들은 -인더스트리를 막론하고- 이렇게 역동적인 시장에서 서바이벌하기가 굉장히 피곤해지지 않을까-



좀 더 장기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회사 내에서의 인간의 역할이 궁금해지는 하루다.












작가의 이전글제가 이 회사에 꼭 있어야하는 존재인지 잘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