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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니고 Mar 02. 2024

나는 ENFP, 20년차 직장인

조직생활에 맞지 않는다는 ENFP-

누가 내 얘기를 궁금해할까? 생각이 문득 들었다.

20년동안 회사를 다녔고, 회사생활의 꽃이라는 대기업 임원 4년차다. 직급은 임원이지만 나만의 룸이 있거나 푹신한 카우치에 앉아 비전만 제시하는 임원이 아니라 직접 자료를 작성하고 데이터를 들여다보고 팀원들을 케어하는 실무형 임원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조금 늦은 20대 후반에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회사에서 인정받고 높이 올라가 돈을 많이 벌고 동시에 누군가에게 inspiration 혹은 motivation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여자 임원들을 보면 그들이 어떤 경로를 걸어온 것일까, 어떤 고민이 있을까, 어떤 꿈을 가지고 있을까 항상 궁금했었다. 그러니 누군가는, 내가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2000년대 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내가 봐왔던 여자 선배들은 모두 소위말하는 '쎈캐'였고 비호감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당시의 사회분위기 때문일수도 있지만 거의 모든 여자 임원들은 담배를 태우고 말술을 마시고, 쌍욕을 입에 달고 다니던 분들이었다. 아마도 마초문화에서 동질감을 형성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했던 노력이지 않았을까한다. 거기다 나는 임원이다-라고 몸으로 말하듯 명품을 감고다니고 좋은 차를 타고 다녔다.

사실 슬프게도 롤모델로 삼고싶다고 생각되는 여자 선배를 단 한명도 보지 못했었다.


본격적인 회사생활을 시작하기 이전 나는 전형적인 ENFP, 필과 감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일이었다.

룰에 얽매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특히나 단체생활에 쥐약인 사람이다.

'단체'라는 얘기만 나오면 오글오글 부글부글 하는 사람이다.

획일화된게 싫고 내 의견과 취향이 묵살되는게 혐오스러운 사람이다.

이미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준비 없이 전공도 아닌 스페인에 어학연수를 가기도 했고, 갑자기 방학때 맥락없이 비행기표를 끊어 멕시코로 날아가기도 했던 조금은 엉뚱한 여자다.

이런 나의 성향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발현되었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초등학생 일간지 기자가 되고싶어 교장실을 찾아가 추천서를 받았고,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보고 심사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주최사인 방송국에 전화를 했던 자아가 강한 아이였다.


그러니 나는 내 커리어 대부분을 전형적인 대기업, 그리고 특히 전략기획과 신사업 영역에서 일하며,

여기에서 요구되는 성향- 정치적인 성향, 조직의 일원으로 튀지 않는 성향, 논리적, 분석적, 전략적, 비판적-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니 내가 길고 시간 동안 얼마나 자신을 꾹꾹 억누르고 가장하며 일해왔는가!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방면에서 잘해내고 싶었고 잘 할 수 있을것만 같았다.


그리고 높이 올라가면- 임원이되고 나면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보상의 달콤한 순간을 생각하며 나는 내 성향을 철저히 죽이고 빡세게 잘 견뎌왔던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바래왔던 임원을 3년 지내고 나서 나는 굉장히 쎈 현타가 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3년 내에 몇번의 현타가 왔지만 1년을 지내고 나면 좀 나아지겠지, 2년 지나 괜찮아지겠지 하며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도 있고 

너무 바쁜 일상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나의 좌표를 확인할 여유가 없었던 것도 있었다.


이게 맞는 방향인가?

막연하고 우매하게도 파랑새가 있다고 믿고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낸 것일까?

내가 주체가되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설정한 아니라 기회가 되는 곳으로, 그리고 돈이 보이는 곳으로 옮겨가다보니 지금 나의 모습은 내가 원하던 나의 모습이 아닌 것을 객관적으로 보게되었다.


그래서 2월말 갑자기 때아닌 휴가를 내어 머리와 마음의 디톡스를 하면서 인생을 다시 설계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당장 나는 이제부터 지금까지 내가 일하면서 얻은 인사이트와 교훈을 기록해, 회사생활에 회의를 느끼거나 방향을 잡지 못하는 많은 여자 직장인들과, 지금 막 초등학교 생활을 시작한 나의 딸에게 내가 겪은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들을 공유해 이를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을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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