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집에 있는걸 좋아한다. 그런 줄 몰랐겠지만.
올 4월에 새로 일을 시작하고 7월 초에 2주간 미국여행을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머릿속을 비울 기회가 없었다. 미국여행도 혼자서 백패킹을 간 것이라 평소보다 더 꼼꼼히 계획해야 해서 휴가보다는 모험에 더 가까웠다.
원래는 3개월만 인턴으로 있다가 미국으로 MBA 하러 가기로 한 것이라, 집도 구해두지 않고 단기로 살고 있었는데 MBA를 가지 않고 풀타임으로 전환을 하게 되어서 집을 새로 구해야 했는데, 고생 끝에 고른 집 준공이 2달이나 미뤄져서 집도 중간에 한 번 이사하며 출근을 했다.
딱히 크게 스트레스받는다고 생각은 안 들었는데 새 직장과 집 덕분에 꽤 스트레스가 쌓였었나 보다. 이번 추석 연휴에 이틀만 휴가를 사용하면 거의 열흘을 쉴 수 있어 다시 한번 자연으로 떠나기로 했다. 친구 한 명과 일본 북알프스 백패킹을 가려고 티켓을 끊어놨었는데 친구도 여행 못 갈 사정이 생겼고, 나도 혼자서는 꼼꼼하게 계획을 세울 심적 에너지가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연휴 이틀 전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제주도에 가만히 있기로 결심했다. 제주도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어딘가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여행을 할 때 숙소는 잠만 자는 곳이라고 생각되어 돈을 크게 들이지 않고 장소 위주로 고른다. 아무 데서나 눕기만 하면 잘 자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이번 여행에서는 최대한 집 밖에 나가지 않고 미뤄둔 7월 초 원더랜드 트레일 영상과 글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엄마가 엄청 재밌게 보던 미스터션샤인도 정주행하고 싶었다. 박효신이 부른 OST도 너무 좋았고, 역사에 무식한 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에어비앤비에서 제주 서쪽에 1인실을 검색하니 레이지템플이 나왔다. 홈페이지를 가보니 아티스트 쉘터라고 적혀있었고, 혼자여서 좋다고 적혀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판포리라는 동네에 있었다. 혼자 있을 때 재충전이 가능한 나에게는 완벽한 장소였다. 부지런히 연락을 해보니 추석 전 주말에는 서울에 잠시 다녀오신다고 하여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토~월요일까지 지낼 숙소는 바로 옆 동네 메종손드메로 예약해두고 월~일요일은 여기에서 지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일부로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다니지도 않으려고 처음으로 렌터카도 안 했다.
버스 정류장 하나 옆 동네인 금등리의 메종손드메는 2층 카페테라스가 아주 근사했지만 바닷가 바로 옆이라 그랬는지 내가 끔찍이 싫어하는 모기가 너무 많아서 힘들었다. 연박을 해도 10–4시는 항상 방을 비워야 해서 매일 밖에 나가야 하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
그래서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성이시돌 센터에 가서 순례자 길을 걸었다. 애초에 일본 북알프스 트레킹을 하려고 계획했던 휴가였으니, 조금 멀리 걸어볼까 하여. 그리고 나의 미약한 신앙생활도 반성하고 고해성사도 보려고.
오랜만에 미사를 드릴 때면 (거의 매번 오랜만인 것이 문제) 마음도 정말 평온해지고 괜히 눈물도 나는 게 참 이상하다.
1인실이 네 개 있는 숙소였는데,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며칠간은 나 혼자 이 좋은 숙소를 독채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7일간은 한량처럼 출력이 좋은 블루투스 스피커에 음악을 연결해서 집이 떠나가도록 크게 노래도 듣고 영화도 보고 영상편집도 하고 글도 쓰고 동네 조깅도 했다. 휴대폰에 이메일 앱도 지우고 카카오톡 알람도 껐다.
집 소개를 조금 더 하자면, 1층과 2층에는 방이 각각 두 개씩 있었고, 화장실도 하나씩 있다. 방 문은 무려 미닫이 책장이었다. 원래 트레바리 모임 책을 읽으려고 한 권을 챙겨왔었는데, 여기 책장에 빼곡히 있는 책들을 읽느라고 정작 내가 가져온 책은 읽지도 못했다.
재밌는 구조와 나무로 가득 찬 집을 보고 바로 동네 가구 공방에 등록을 했다. 내일모레부터 첫 수업.
냉장고 문에 빼곡히 붙어있는 편지에는 한 달간 살고 간 분들도 많은 것 같았다. 창작활동을 하거나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너무 좋아서 나만 알고 싶은 곳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같이 머리 비움을 하면 더 좋을 것 같아서.
일기예보를 보니 태풍도 오고 있고, 다음 며칠간은 흐리다고 적혀있어서 날씨가 맑은 틈을 타 한 번도 안 가봤던 서쪽 동네 구경을 갔다. 모슬포, 산방산, 송악산, 해안도로 이렇게 20km 정도를 또 걸었다. 걷는 걸 좋아해서.
그다음 이틀간은 집순이로 보냈다. 사장님께 부탁드린 요가매트에서 이리저리 요가도 조금 하고, 옆동네 하나로마트로 조깅가서 일주일치 장도 봤다. 채소랑 카레가루를 사서 다섯 끼는 거의 카레만 먹은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랑 고구마 감자도 넉넉히 사고.
그리고 그 다음날은 곶자왈이라는 도립공원에 갔다. 산책로를 조성하면서 나무를 최대한 안 베려고 피해서 데크를 설치한 부분이 참 맘에 들었고,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정글이 돼서 너무 놀라웠다. 귤 같은 제주도.
그날 저녁에는 어김없이 노을을 구경했고. 뚜벅이로 버스를 타고 다니고, 동네에 가로등도 없어서 해가 지기 전에는 항상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