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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란 Aug 30. 2020

밀레니얼 세대가 회사를 8년 다니면

젊은 꼰대가 됩니다.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대예언이 쏟아졌다. 유행을 선도하지는 못해도 '선제적으로 대응'하기를 즐겨하는 임원들은 전통적인 영업방식(aka.라떼가 성공했던 방식)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트렌드를 반영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을 것을 지시했다.


카카오페이, 토스는 커녕 공인인증서 하나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부장들이 회의실에 앉아 눈만 뻐끔뻐끔 하고 있을 때, 마침 <90년대생이 온다>는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임원들과 부장들은 서로 짠 듯 '해답은 밀레니얼 세대에게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지들 맘대로.


부장님들이 무릎을 탁 치자 사내 곳곳에서 밀레니얼 세대의 조직원들을 중심으로 한 TF들이 만들어졌다. 디지털 혁신, 프로세스 개선, 조직문화 개선, 신사업 아이디어 등 회사에서 기안하는 모든 문서에 '밀레니얼 세대가 주도하는' 따위의 말들이 수식어처럼 따라다녔다.


1987년생 토끼띠, 2012년 입사, 8년차 대리


회사는 밀레니얼 세대를 '1985년생 이후 출생, 대리 직급 이하'로 규정했고, 조건에 딱 들어맞는 나는 몇몇 TF의 비상근 멤버가 되어 수시로 불려다녔다. 팀장님 눈치를 봐가며(팀장들은 본인 성과평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TF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강요하는 회의 자리에 앉아있을 때 마다 나는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인가를 고민했다. 사실 숨이 턱턱 막혔다.


직장생활 8년차. 회사와 동료에 피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가급적 오래 머물러 있기로 자신과의 타협을 끝냈다는 뜻이다. 수년 간의 삽질 끝에 삽질은 새로운 우물을 파는 것이 아니라, 부장님이 파라고 하는 곳을 예쁘게 파야 하는 것임을 깨닫고, 얻어낸 것이 '대리'라는 직급이다. (국어사전에도 써있다. 대리(代理) : 남을 대신하여 일을 처리함, 또는 그런 사람)


회사가 원하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사실 불가능했다. 젊은 세대가 모여 희희낙락 이야기하는 신선한 발상들은 그것을 보고서로 쓰지 않을 때만 살아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owner가 누구고, operator가 누구고 하는 것이 정해져 담당부서의 call을 받아 회의실에 모인 순간 끝났다. 괜찮은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것보다 기한에 맞춰 보고를 끝낼 수 있을 정도의 고만고만한 아이디어에서 타협하고, 각자 맡아서 쓸 부분을 할당했다.  


물리적인 출생연도로 밀레니엘 세대를 정의하는 것이 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 1990년대생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진정한 90년대생의 등장으로, 역시나 회사에서 원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역할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90년대생들이 온다>에도 적혀 있다. 유튜브나 웹툰을 보며 자라난 구공이들(90년대생들)은 긴 글을 잘 읽지 못한다. 참고자료 포함 40장이 넘는 PPT를 보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꽤 긴 시간동안 근엄근엄한 표정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했다. '병맛'과 'B급코드'가 보고서에서 난 데 없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난 엄연히 밀레니얼 세대니까 구공이들을 이해해보려 애썼지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체 뭘 얼마나 쉽게 설명하고, 얼마나 더 인수인계를 하니.


입사가 하루만 빨라도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이 튀어나온다더니, 나는 나의 꼰대본성에 꽤 자주 놀랐다.

 

태생적으로는 '밀레니얼'이나, 한국 기업문화에 적응해서 살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라떼'가 되어버린건가. 문유석 판사님이 쓰신 <전국의 모든 부장님들께 고함>이라는 칼럼을 읽고 '판사님 만세'를 외쳤으나, 구공이들의 시도 때도 없는 '병맛'에는 썩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세대. (싹쓰리 멤버는 다 알지만, BTS는 몇 명인지 모르는 세대)


시작부터가 이중적이고, 모순되지만 그런 것이 삶이고. 적어도 스스로 모순됨을 인정하는 것이니, 그래도 나는 싹수가 있는 사람일거라 믿고 살련다. 아,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입사 8년 정도 되었으면 이제 중견사원 아닌가요. 회사의 미래 어쩌고 하면서 자꾸 불러내는 것 좀 삼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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