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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란 Sep 09. 2020

출근 후에는 은퇴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

박수칠 때 떠나자, 제발

2014년, 입사 2년 차 때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었다. IMF 때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인력감축 없이 경영을 유지해서 업계에서 안정적인 것으로 손꼽히는 회사였다. 회사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내막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창사 이래 처음 있는 일' 앞에 모두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사원이었던 나는 사무실을 짓눌렀던 무거운 공기와 호출을 받고 임원실로 한 명씩 불려 가던 선배들의 흔들리는 눈빛을 기억한다. 바로 엊그제만 해도 함께 간식을 먹으며 웃고 떠들었는데, 그 일이 진행되는 한 달 남짓 사무실의 누구도 함부로 웃거나 먼저 말을 걸지 않았었다.


다른 부서에서는 이렇게까지 했다더라는 험악한 소문이 들려올 무렵, A 부장님이 그만두시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A 부장님은 팀의 정신적 지주였다. 임원들의 등쌀에 지친 후배들 대신 싸워주시기도 하고, 어떤 질문에도 거침없이 대답해주시는 선생님 같은 분이었다. 회사에 아무 일도 없었다면, 모두가 차기 팀장은 A 부장님이 되실 거라 생각했다.


A 부장님이 결단을 내리신 건, 입사 15년 차 이상에서 입사 10년 차 이상으로 면담 대상을 확대하는 지침이 내려온 직후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제일 먼저 인사 면담을 한 후, 순차적으로 후배들이 불려 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담한 심정을 느끼셨다고 했다. 저 후배들이 무슨 얘기를 들을지 알고 있으니까 더욱 괴로우셨다고.


A 부장님 다음으로 내가 목격한 은퇴는 친정아버지였다. 1986년부터 2018년까지 3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신 직장에서의 퇴직을 앞둔 아버지의 모습은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전혀 쿨하지 못했다. 보통은 은퇴 후에 우울증을 조심하라고 하는데, 아버지는 은퇴 1년 전부터 신경안정제를 복용하시기 시작했다. 후배들이 예전처럼 자신을 대해주지 않는다는 자괴감과 은퇴 후의 생활에 대한 막막함에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드셨다.


살면서 처음 본 방황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기도 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50대 초반이면 다른 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각박한 현실에서 60세 정년을 꽉꽉 채웠으면 성공한 인생이 아니냐고. 게다가 나와 동생은 둘 다 취직을 하고, 결혼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A 부장님에 비하면 아버지의 은퇴는 오히려 축하할 일이 아니냐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쉽사리 가진 것을 내려놓지 못하셨다.


불과 며칠 전에는 B 부장님이 퇴직하셨다. 정년이 60세로 연장되어 만 55세가 되면 임금피크제를 선택할지, 상시 퇴직을 할지 선택해야 한다. B 부장님은 퇴직을 선택하셨다. 이전의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B 부장님은 경력직으로 입사 후에 보고서 한 장을 직접 작성한 적이 없는 분이다. 대기 발령 중 당시 유행하던 CSR 부서가 신설되면서 운 좋게 'CSR 전문가'로 포지셔닝을 하게 되어서 아주 편하게 직장생활을 하셨다.


B 부장님의 마지막 한 달을 지켜보는 일은 곤욕이었다. 보통 조용히 주변을 정리하며 마무리하는데, 이 분은 그렇게 요란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 통신 요금을 줄이려고 콜센터와 상담하고, 보험계약을 해지하는 따위의 일을 하느라 하루에도 몇 시간씩 자리에서 사적인 통화를 하는 탓에 시끄러워서 업무를 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는데 본인의 명함첩을 준다든지, 마우스패드를 준다든지 이게 성의인지 쓰레기를 버리라는 건지 알 수 없는 행동들도 이어졌다.


A 부장님의 송별회는 일산에 있는 가든 식당에서 있었다. 당시 20명이 넘는 팀원들이 모두 참석했었고 서로가 가진 추억들을 공유하며 웃다가, 아쉬움에 눈물짓기도 하는 시간들이 이어졌었다. 마지막 날에도 몇몇은 엘리베이터 앞까지 쫓아갔다.


반면 B 부장님의 송별회는 조촐했다. 저조한 참석률에 민망했던 팀장님은 코로나 핑계를 대었으나, 코로나 탓은 아니었다. 송별회에서도 B 부장님의 Self 공치사에 의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힘겨웠다. B 부장님은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하셨다. '업계에서 CSR을 진두지휘한 화려한 인생 1막을 뒤로하고, 인생 2막을 향해 쿨하게 떠난다.' 사람은 참, 변하지 않는다.


좀 이르기는 하지만, B 부장님의 퇴직을 계기로 직장생활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후배들이 무엇인가를 물어보고, 대답해 줄 수 있는 선배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B 부장에게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없었다. 치열한 현장에서 조금 물러나 있더라도 잘못된 길로 들어서거나 혹은 새로운 길에 도전하려는 후배들에게 알려 줄 것이 있는,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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