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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란 Nov 02. 2020

야근 안해도 보고서는 완성된다.

젊은 꼰대의 각성

2012년 10월의 어느 날, 아마도 오후 3시쯤

입사 후 3개월간의 수습기간을 마치고 회사 연수원의 한 강의실에서 동기들과 모여 앉아 발령문이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무 중심 채용을 통해 선발된 요즘 신입사원들은 어느 팀으로 갈지 거의 정해져 있어서 감흥이 덜한 것 같지만, 그 때 우리의 심정은 합격자 발표만큼이나 긴장됐다.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자 발령받을 부서의 선배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통화를 마친 동기들이 '나는 어느 부서'라고 얘기할 때마다 부러워하며 '내 전화는 언제 올까' 하고 괜스레 핸드폰을 꼭 쥐어보았다.


그렇게 67명의 동기들 중에 65명이 전화를 받았고, 나와 A만 남았다. 그리고 둘 중에 한명은 악/명/높/은 '마케팅기획팀'으로 가게 될 터였다. 당시 신입사원 교육을 담당하던 교수님도 '마케팅기획팀?'하며 눈썹을 한번 찡긋 올렸던 것을 기억한다. 불과 3개월 전에는 취준생 신분이었던 것을 떠올리며, 어느 부서라도 상관없다는 패기는 있었지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마침내 A가 전화를 받았고, 그 악/명/높/은 부서에 배치된 것은 나였다. A는 왠지 안도하는 것 같았다. (돌고돌아 지금은 그 A가 기획팀에 있다. 인생은 새옹지마)


연수원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 타고 나서야 팀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월요일 8시40분까지 출근하라'는 간단한 메세지였다. 당시 대리님(현 차장님)은 일에 치여 내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오후 6시를 넘기고서야 겨우 전화를 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이 얘기를 차장님께 했더니, '완전 잊지 않고 전화를 한게 다행이지 않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마케팅기획팀이 왜 악명높은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업무량이 숨막히는 수준이었는데, 그 업무가 단순 운영업무가 아닌 최고경영층으로부터 Top-down으로 내려오는 '특명과업'의 성격이라서 실무자들끼리 편의상, 요령껏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뭔 '긴급'과 '기밀'을 요하는 것들이 그렇게 많았던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order가 내려졌으면 또 해내는 것이 회사원의 숙명이지 않나.


한 프로젝트당 PPT가 적게는 40페이지에서 많게는 140페이지나 되었다. '13페이지와 14페이지의 파란색 글씨가 다른 것까지 알아채는' 임원의 진두지휘 아래 있었기 때문에 팀에서 생성해내는 보고서의 퀄리티는 어마어마했다. 야근이 일상이었던 것은 당연지사. 심지어 야근의 기준도 18시가 아니라, 21시였다. 보통 21시쯤 임원이 퇴근하는 것을 기점으로 일을 더 하면 야근이고, 얼른 정리하고 퇴근하면 그게 정시퇴근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19시가 되면 나는 팀을 돌면서 저녁으로 먹을 김밥이나 샌드위치 주문을 받았다.


옳고, 그름을 따질 것도 없이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오히려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도 아침에 멀끔한 모습으로 출근하는 대리님이 멋있다고 생각했고, 방대한 양의 보고서를 그것도 논리적 흐름까지 완벽하게 써내는 부장님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 땐 보고서의 댓가로 포기하는 것들에 대해서 미처 알지 못했다.


야근에 대한 관대함, 보고서에 대한 지나친 집착, 결과물이 좋으면 다들 좋을거라는 착각, 위계적 사고-

신입사원 시절의 혹독한 트레이닝의 부작용으로 하마터면, 이대로 젊은 꼰대가 될 뻔했다.

(아직 정식으로 후배가 없으니, '될 뻔 했다'고 쓰고 싶다.)


얼마 전, 야근을 하는 문제로 팀 선배와 의견 충돌이 있었다. 회장님 보고까지 D-2일 시점에서 보고서의 방향이 완전 틀어졌다.(윗선에서 까였다!) 가출한 정신줄을 부여 잡고, 밤을 새서라도 보고서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남편에게 아이의 하원을 부탁을 해놓고) '야근 해야겠죠?'라고 물었더니, 차장님이 '왜 자꾸 야근을 하려고 생각해?'라고 되물었다.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야근을 안하고도 보고서 퀄리티가 나올거라고 생각하시나?

평소에는 야근을 안하더라도, 이런 때는 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

혼자라도 하게 해주지. 왜 내가 일하고 싶은데 못하게 하지?


내가 뚱해져 있는 사이에 차장님은 보고서의 틀을 재정비했고, 이렇게 하면 될 것 같다고 팀장님과 얘기를 나누었다. 결국 야근을 하지 않고 퇴근한 그 날 저녁 나는 안될 것 같다, 망한 것 같다고 남편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 때 남편이 해준 말, '야근 안해도 넌 그 보고서 완성할 수 있어.'


예상하겠지만, 보고서는 훌륭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이 사건은 내 직장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모멘텀이었다. 열심히, 성실하게, 월급받은만큼 일하자는 말을 달고 사는 젊은 꼰대가 왜 욕을 먹는지 스스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이 일을 겪지 않았다면 내가 후배 혹은 부하사원의 야근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을 때 똑같은 잣대를 들이댈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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