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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dreviews Jul 16. 2019

가고 싶어, 그곳이 어디든.

교회 가기 싫은 신학생 일기 

대구의 한 아파트 단지. 


나는 학교가 끝나면 또래 친구들과 해가 질 때까지 아파트 단지 공터나 놀이터를 헤집고 다니며 놀았다. 놀이터에서 시소를 타고 그네를 타고, 철봉에 매달려 세상을 거꾸로 보다가 그대로 떨어져 온몸에 모래를 뒤집어쓰곤 했다. 그러다 지겨워지면 함께 놀던 친구들 모두 한 데 모여 숨바꼭질을 했다. 술래 몰래 공터나 단지 건물 안에 조용히 숨어 있다가, 해가 지고 아파트 단지에 어둠이 내리면 엄마들은 한 명씩 창문을 열어 “**아~ 밥 먹어라!”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그럼 숨바꼭질을 하다가도 술래에게 말도 없이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 내가 술래가 되고 하필 엄마가 평소보다 늦게 날 부르시던 날에도 어김없이 날 피해 몰래 숨어있던 친구들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홀로 어두워진 아파트 공터를 터벅터벅 걷다 엄마의 밥 먹으란 소리가 메아리로 울리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서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모두 비슷비슷한 또래였던 우리는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었지만 스스로 노는 법을 터득했고, 우리만의 규칙을 만들었으며, 그 규칙을 어긴 자들에게는 우리만의 벌을 주었다. 우리가 악당 놀이를 할 때면 남자아이들은 악당이나 히어로가 되었다. 여자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인질이 되었다. 인질이 된 여자아이들은 열심히 도망 다니다가 악당에게 잡히면 아파트 한쪽 계단으로 끌려가 히어로가 와서 구해줄 때까지 앉아서 기다려야 했다. 어릴 때부터 악당도, 구원자도, 나 또는 다른 여자 아이들의 자리는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여자 아이들은 세상에서 언제나 조연이었으며 그것이 여자로 태어난 우리의 사명이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어리고 총명했던 우리는 어른들의 세상을 복사하여 우리들의 놀이에 붙여 넣었고, 어른들과 비슷한 세상을 지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알아야 할 것은 알았으며, 언어는 부족했지만 눈치는 충분했다. 


우리는 이렇게 성장했다. 


빠르게 성장하여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반에서 일등 아니면 이등이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사이에서 공부를 조금 잘한다는 이유로 가끔 반장/부반장 투표 시에 누군가 나를 추천하곤 했지만 나는 한사코 사양했다. '임원을 맡으면 골치 아프기만 하다'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요즘 말로 하면 쿨해서 내가 일등을 하던 이등을 하던 시큰둥, 시큰둥, 그래 수고했다, 이게 다 였다. 좋게 말하면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부모님이셨고 나쁘게 말하면 겸손한 나머지 칭찬에 인색한 부모님이셨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앞에 나서는 것도 추천하지 않으셨다. 엄마는 바빴다. 식당에서, 남의 가정집에서, 어딘 가에서 늘 일을 해야 했으니까. 자식이 임원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먹을 것이라도 들고 찾아가 선생님 앞에서 미소를 띠며 우리 애 좀 잘 봐주싶사 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3학년이 되자 욕심이란 게 생겨버렸다. 누군가 내 이름을 추천했고 나는 부반장 후보에 출마를 했다. 부반장. 반장이 아니라 부반장이었다. 나는 힘껏 욕심을 내고 용기를 내었으나 부반장이 어울릴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고 친구들도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나는 반 친구들 앞에 나와 짧고 수줍은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거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저를 뽑아주신 다면 반장을 도와 우리 반 친구들을 돕겠습니다.”그리고 내가 부반장으로 당선이 되었다. 반장은 나와 성적이 비슷한 다른 남학생 차지였고 나는 부반장이었다. 남자 반장과 여자 부반장. 남녀 공학 학교에서 자연스러운 그림이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엄마께 부반장으로 뽑혔다고 말을 했다. 

“머리 아프게 왜 그런 걸..” 

반장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여겼다. 우리 엄마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상황, 어떠한 환경에서든 내 자리는 도움의 자리, 조연의 자리였다. 

나는 어른들의 세계가 무서웠고 나를 지키려면 나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칭찬은 낯간지럽고 자부심을 가지는 건 거만한 태도였다. 그것이 자연스러웠고 그 자연스러움이 나를 쪼그라들게 했다. 아직 성장 중이었던 한 학생의 가능성이 어느 정도 크기 인지 아무도 몰랐지만, 희한하게도 그것을 쪼그라뜨리는 방법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넌 안 돼, 넌 겉 멋 들었어,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만 자기 꿈을 이룰 수 있는 거야, 너는 그런 재능이 없어, 사춘기라 헛바람 들었어, 넌 소질이 없어, 넌 안 돼. 


넌 안 된다는 말이 시간이 지나면 내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질 줄 알았다. 그렇지만 어떤 말들은 누군가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기도 하나보다. 십 년이 지나고, 십삼 년이 지나고, 또 한 해가 가도, 극복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여자이고 어린 나에게 조연인 자리가 가장 자연스럽고 그 이외의 욕망은 욕심이라고 말했다. 그런 욕심을 부리기에는 재능이 부족했다 말했다. 남이 잘 되도록 보조하고 돕는 게 행복일 것이라고 말했다. 


성인이 되자, 내가 나를 부정하는 게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었고, 어느새 이런 나의 자연스러움이 내 목을 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던지 간에, 남을 탓하고 남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것보다 나 자신을 탓하는 게 한결 쉽고 편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대화로 해결해야 하는 머리 아픈 과정을 겪어야 하는 대신 나 혼자만 아프면 되니까. 괴로운 밤이면 나만 날 죽이면 되었다. 

- 어디서부터 나는 잘못되었던 것일까. 내 인생은 허상이다. 내 엄마를 괴롭게 만들러 태어난 인생, 헛바람 든 인생, 결국엔 안 될 인생, 조연의 자리, 나 없는 내 인생. 엄마를 힘들게 만들 거면 차라리 왜 태어났어. 죽어버리자. 죽는 게 나을 거야.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이나 친구와 떨어져 홀로 계절을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달려가고 있을 적에, 멍하니 어두운 방안에 누워있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냥 이대로 있다가 죽기는 싫어.' 


어린 시절부터 뒷좌석이 편했던 나지만, 그냥 나란 인간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날 밤 침대에 누워 갑작스럽게 결심을 했다. 대학원에 지원해보자고. 그리고 그다음 해 초, 쉽지 않았던 여러 과정을 거쳐 대학원 합격 소식을 받았고, 몇 주 후 재정 지원 결과까지 통보받았다. 그렇다고 마냥 기쁜 것은 아니었다. 장학금을 제외하고도 남아있는 약간의 등록금과 boarding fee 마련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이런저런 돈 문제를 해결하고 과연 내가 갈 수 있을까, 가더라도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내가 공부할 수 있는 실력이나 될까, 공부란 글도 잘 쓰고 에너지 많은 사람이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왜 늘 불안한 건지. 언제나 그랬듯, 한 단계를 해결하면 그 일이 잘 해결되어 속이 시원한 게 아니라, 그다음에 해결해야 할 일 때문에 곧바로 조바심이 들었다. 


재정 지원 결과까지 나왔으니 친언니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상의를 해보았다. 언니가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런 어려움을 겪더라도 너는 지원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 지원한 거지?, ' '학비와 생활비를 전액 다 지원받을 수 없어도 갈 수 있을 거란 거지?' 두 번째 질문에는 '그러길 바란다'라고 대답했고 첫 번째 질문에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어디까지 갈 진 모르겠지만, 허락되는 만큼 가고 싶어. 그곳이 어디든."


언니에게 처음으로 내 욕망을 정확히 말한 순간이었다. 언니는 "그래, 뭐 남은 학비나 생활비 문제는 어떻게 되겠지, 지금 당장 고민해야 할 문제부터 고민해보자."라고 말했다. 비록 나는 여전히 불안하지만, 함께 고민해주겠다는 언니 말에 조금 힘이 났다. 


이후 나의 욕망과 꿈에 언제나 가장 어렵고 가장 컸던 첫 번째 벽이었던 부모님께 그간의 상황과 결과를 알려드렸다. 예상한 대로 별말씀을 안 하시거나, '그거 공부해서 뭐 한다고, '라는 반응이 첫 번째였다. 애초에 내 부모님을 아니까 애초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홀로 떨어져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기에, 다른 걱정보다 일단 먼저 수고했다고 말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역시나 헛된 기대는 안 품는 게 실망을 줄이는 길이라 생각하며, 전화를 끊기 위해 대화를 빨리 마무리하려던 찰나, 순간 엄마가 '잘했다. 장하고 자랑스럽다'라고 말씀해주셨다. 기대감 따윈 없었다고 했지만, 조금은 기뻤다. 


넌 안 돼, 그 말을 내게 끊임없이 하시던 분 앞에서 아니, 나 할 수 있다고, 갈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을까, 겁이 나고 두려웠다. 


다시 짐을 싸서 지금의 학교가 있는 곳으로 온 지 이제 거의 일 년, 나는 그 두려움을 얼마나 극복했을까?

지금도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는 종종 그 목소리들이 메아리친다. 넌 안 돼, 넌 특별한 재능이 없어. 

그 목소리를 뚫고 내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나,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 <교회가기 싫은 신학생 일기>는 내가 지난 일 년 동안 나를 감당하느라 어떤 길을 헤맸는지, 현재는 얼마나 헤매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만큼 더 헤맬 것인지에 관한 기록이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하고 있는 공부 외에도 많은 일들을 꿈꾼다. 그중에 다수는 육체적, 시간적, 금전적 제한 때문에 시도조차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이런저런 거 하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평생 조연에게는 '내가 사는 내 인생'을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부터가 큰 진보가 된다. 여자라도, 막내라도, 히어로든 악당이든 반장이든 원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그 사실을 이제는 믿으니까. 처음의 결심 그대로 끝까지 가보고 싶다. 그곳이 어디든.


여러 상황들이 나의 욕망을 좀 허락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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