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에 떠난 칠레 워킹홀리데이 22. 치안
어느 화창한 주말, 산티아고 중심부에 있는 스타벅스에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늘 그렇듯 가방을 내 의자 옆 잘 보이는 곳에 놔두고 정신없이 잡담을 하고 있었는데, 옆 테이블의 중년 아저씨가 아무렇지 않게 내 가방 위에 자기 재킷을 살포시 올려두는 게 아닌가? 바로 옆에 내 가방이 위치하고 있었고 옆 테이블의 간격이 좁긴 했지만 누가 봐도 내 가방이어서 어이가 없도록 당황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무얼 하나 지켜보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행색을 보니 정말 평범한 샐러리맨의 복장(깔끔한 면바지와 체크무늬 남방)을 한 아저씨였다.
이윽고 그 아저씨가 슬금슬금 자기 재킷 아래로 손을 대기 시작했고 그야말로 놀랄만한 노룩(no look) 스킬을 뽐내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아저씨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아무 말하지 않고 있었더니, 그제야 머리를 긁적이며 '자기 가방인 줄 알았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인사까지 하며 유유히 사라졌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당당한 그 뻔뻔함이 당황스럽다 못해 웃기기까지 했다. 아, 내가 정말 남미에 와 있구나.
오늘은 남미의 치안에 관련된 에피소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지구 반대편 남미를 오기 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가장 걱정했던 건 바로 '치안'이었다.
이미 사전 조사 때 남미 여행자들, 혹은 현지 교민들이 당했던 소매치기, 좀도둑, 사기, 절도, 새똥 테러 등 모든 사례들을 수집했고, 여행이 아닌 1년의 삶을 위해 준비하다 보니 모든 게 걱정인 날들도 있었다.
치안이 악명 높기로 유명한 곳은 정말 위험하다. 멕시코 갱단이 있는 북부 지역이나 브라질 빈민가는 여행객들이 꿈도 못 꿀 그런 곳이다. 하지만 그나마 칠레가 남미에서 가장 잘 살고 경제적 기반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늘 사람 많은 곳과 밤은 어디든 조심해야 했다. 그리고 일단 한국에서 하던 습관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그래서 늘 사람 많은 장소에 가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와는 분명히 달라서 소지품을 잠시라도 놔두거나 실수로 잊어버렸다면 그냥 미련 없이 잊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하물며 지나다가 옆에 들고 있던 에코백을 칼로 찢어서 내용물을 빼내가거나(그 찰나의 순간에) 혹은 코트에 넣어둔 핸드폰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경우도 흔했다.
다행히 나는 물건을 도둑 맞거나 잃어버린 적은 딱히 없었지만, 늘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항상 앞뒤를 둘러보고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늘 그 사람의 눈을 정확히 쳐다보려고 했다. 그러면 이내 발길을 돌리곤 한다.
우린 생김새부터 무척이나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머나먼 아시안인이 이 곳에 산다는 건 대부분 부유층으로 착각하기 쉽고, 더군다나 칠레 산티아고의 사람 많은 중심부에서 출몰하는 소매치기 일당들은 대부분 가난한 나라의 이민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치안 문제를 위해, 사전에 여러 케이스들을 알아 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막상 당황하면 그야말로 '알면서 당한다.'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하지 말라는 짓, 가령 밤늦게 혼자 돌아다니거나 으슥한 곳을 찾아다니거나, 길에서 폰을 보거나 쥐고 있는 건 사전에 안 하는 편이 가장 좋다.
그날 역시도 햇살이 밝았던 어느 산티아고의 평일 오후였다. 은행 볼 일을 보기 위해 센트로로 향했는데 그때 당시에 다양한 은행 중 한국 계좌에서 인출 시 BANCO INTERNACIONAL에선 칠레 수수료가 따로 붙지 않는다.(물론 한국에서는 은행에 따라 수수료가 부과됨)
그래서 주로 센트로에 있는 지점만 이용했는데, 이게 화근이 된 것이다.
<산타 루시 아역 근처 모네다 지점>
https://www.google.com/maps/place/Moneda+801,+Santiago,+Regi%C3%B3n+Metropolitana,+%EC%B9%A0%EB%A0%88/@-33.44188,-70.6484,19z/data=!4m5!3m4!1s0x9662c5a1a2370221:0x3982b174cbf2b431!8m2!3d-33.4415479!4d-70.6479955
"어, 가보 은행 맞은편에 영화관 있네? 영화나 볼까?"
은행 인출기에서 돈을 뽑고 나오자마자 바로 맞은 편에 보이는 지하 영화관이 눈에 들어왔다. 함께 간 현지인 친구와 영화관에 내려가기 위해 계단을 밟는 순간 목덜미로 무언가가 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 순간 건물에서 샌 물이라 생각하곤 가던 길 가려는데, 희한하게 마침 옆에 있던 청바지 차림의 아저씨가 손에 있던 휴지를 내밀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옆에 있는 현지인 가보를 쳐다보니 자기도 묻은 것 같단다. 그러더니 아저씨 말대로 '팔로마 까까' (비둘기 똥)라며 울쌍을 짓는다. 그때까지만 해도 에이, 설마..라고 했는데 아저씨가 어찌나 친절한지 곁을 떠나지 않고 휴지를 마저 건네며 옷을 벗고 닦으라고 했다.
올 것이 왔구나. 이게 말로만 듣던 새똥 테러구나. 하지만 목덜미의 이물질은 점점 냄새가 심해졌고 빨리 닦고 싶은 마음에 가방을 주는 척하면서 휴지를 다 받아냈다. 그리곤 가방을 휙 가보한테 줘버렸다. 그때까지도 어리둥절하던 20살 가보는 친절한 아저씨의 스페인어를 받아주고 있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나도 안 들리는 스페인어를 무시하고 영화관 밑으로 가버렸다.
가만 보니 새똥이 아니고 머스터드에 흙을 섞은 듯한.. 여하튼 역했다. 하도 들었으니 망정이지 처음이었더라면 순식간에 당했겠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chuca puta weon concha t.... 아는 욕이란 욕은 다 뱉으며 가보랑 가방을 막~~ 닦고 있었는데, 이번엔 엉뚱하게도 멀쩡하게 생긴 젊은이가 손에 물과 휴지를 가지고 우릴 향해 내려온다. 이 사람들 참, 귀엽네.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에서 왔으니 가방은 멀찍이 두고 내미는 휴지와 물을 받아 공손히 인사했다. muchas gracias, muy amable.(아이고, 감사해라. 어쩜 이리 친절하실까요) 입은 웃으며 눈은 노려보고 있으니 자기도 멋쩍은지 아저씨가 있는 위를 한 번 보고는 que te va bien 이라며 간다. 분명 위에서 그 아저씨가 얼른 가보라고 부추겼겠지. 나쁜 사람들, 일할 생각은 안 하고 이물질이나 붓고 있다니.
씩씩거리며 일단 그곳을 벗어나 곧장 경찰이 있는 거리로 나갔다. 계속해서 따라올지도 모르기에 가방은 앞으로, 핸드폰과 지갑은 꽁꽁 숨겨놓고서는.
충분히 일어난다. 현지인이랑 있었음에도, 수많은 사례들을 들었음에도 막상 그 역한 이물질을 내 옷에, 몸에 묻히면 아무리 강한 정신력이더라도 흔들리기 마련일 것. 특히나 사람들이 많은 센트로에서는, 방심하면 당한다. 거리에 있던 경찰 무리에게 가 있었던 일을 말하니 대뜸 '잃어버린 게 있니?' 물어봤고, 다행히 없다고 하니 자기들이 그쪽으로 가볼 테니 걱정하지 말라한다. 일단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가보는 '분명 저 경찰들 안 갈 거야. 그리고 아까 걔네, 칠 레인들 아냐.'라고 말했다.
분명 그들은 은행 atm기에서 나오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을 테고, 타기팅이 되어 지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위에서 이물질을 부었을 것이다. 절대 그냥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고로 항상 돈은 인출한 뒤에는, 가방 안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가방을 앞으로 메라. 그리고는 항상 쫓아오는 이가 없는지 한 번씩 뒤를 돌아봐주는 게 좋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때 만약 친절한 아저씨의 손에 내 가방을 쥐어줬더라면, 눈 깜짝할 새에 가방은 사라졌을 테고, 가방 안에 막 인출한 따끈따끈한 현금과 함께 신용카드, 체크카드, ID.. 읽고 있는 월든, 한국어 과외 책, 스페인어 공부자료... 산티아고에 온 뒤로 매번 좋은 일들만 겪었던 나로서는 충분히 각성될 만한 사건이었다. 부디 이 멋진 햇살을 가진 산티아고에서, 나쁜 기억으로 말미암아 슬퍼지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