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청년이 일론 머스크가 만든 인공지능 회사 @grok 의 리더가 되었다. 입사한 지 8개월 만의 일이었다. @meta 에서는 알렉산더 왕이 스무 살을 갓 넘겨 인공지능 인프라의 핵심을 맡았고, 비탈릭 부테린은 스무 살이 되기 전, 이더리움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세웠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다. 나이를 초월한 사고의 깊이와, 그 깊이를 증명할 실행의 속도였다. 지능은 더 이상 연차의 함수가 아니다.
고등학생이던 시절, 비트코인을 주제로 과제 발표를 준비했다. 발표 중 친구들에게 “50만 원만 사보라”고 말했다. 투기의 권유가 아니라, 기술이 만들어낼 구조적 전환에 대한 예감이었다. 그러나 발표는 교사의 제지로 중단되었다.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내용은 내 생활기록부에도 남았다. “비트코인을 주제로 사행성 조장을 하던 학생.” 그때는 부끄럽고 억울했지만, 지금은 그 문장을 상처가 아니라 영광으로 본다. 사회가 이해하지 못한 사유의 흔적, 시대보다 앞선 직감의 증거였다.
열여섯 살에 컴퓨터를 조립해 팔았고, 열일곱 살에는 오픈소스 도면을 참고해 3D 프린터를 만들었다. 학교가 아닌 인터넷에서 배웠다. 유튜브의 영상과 논문, 개발자 포럼이 나의 교과서였다. 그때 배운 것은 기술보다 배움의 구조였다. 지식은 더 이상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탐구되는 것이었다. 인간의 학습은 교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검증하고, 스스로 조립하면서 배움은 제도 밖에서 진화하고 있었다.
스물두 살에 대웅제약에서 팀장을 맡고, 스물네 살에 상장된 헬스케어 기업에서 임원으로 일하던 시절, 나는 단지 세상이 리더를 위임하는 구조 자체가 국내 역시 바뀌고 있음을 체감했다. 나의 이야기는 예외가 아니라 징후였다. 그 이후의 세대는 더 빠르게 자라고 있다. 유튜브 스토리를 운영하는 매우 젊은 친구는 며칠 만에 백만 구독자로 증명했고, 프라이머의 투자 파트너 설은서는 스무 살이다. 꼬끼오 알람 앱을 만든 최형빈군은 토스의 최연소 PO로 일했으며, 미성년 크리에이터들은 이미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나 때는 그 속도와 주변이 외로웠지만, 지금은 세상이 그 속도로 가고 있으며 어린 후배들의 성장이 눈에 띄게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세대의 중심이 바뀌었다. 전문가라는 이름의 신분은 더 이상 권위가 아니다. 이 세대는 어떻게 알았느냐보다 어떻게 만들었느냐로 증명한다. 경험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제 경험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부산물이다. 완벽을 위해 늦게 출발한 사람보다, 불완전해도 먼저 실행한 사람이 시장을 만든다. 실행이 곧 전략이고 시도 그 자체가 경쟁력이다.
점점 직장의 개념도 사라지고 있다. 조직의 부속이던 개인은 이제 하나의 기업으로 존재한다. 모두가 인공지능을 직원처럼 두고 일하는 시대가 왔다. 하나의 아이디어로 기업이 세워지고, 하나의 기획이 전 세계에 닿는다. 기획, 마케팅, 디자인, 운영까지 인공지능이 함께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역할은 단 하나다.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의지. 그 의지를 갖지 못한 사람은 도태될 것이다. 생존은 가능하겠지만, 생존만으로는 존재의 의미를 증명할 수 없다.
산업의 구조도 달라지고 있다. 대기업의 시대는 끝나가고, 구조 대신 연결이 권력이 된다. 자본보다 속도가, 조직보다 감도가 중요해진다. 거대한 브랜드의 뒤를 이어, 개인의 이름이 브랜드가 되고, 그 브랜드가 문화가 된다. 한 사람의 목소리와 인공지능의 실행력이 결합된 기업들이 시장을 흔든다. 그들이 만드는 제품은 완벽하지 않지만, 살아 있다. 불완전한 움직임이 완벽한 정체보다 강하다.
나는 후배 세대를 존경한다. 그들은 기다리지 않는다. 생각하기 전에 만든다. 실패하기 전에 시도한다. 그들의 실패는 두렵지 않다. 실패의 총량이 곧 학습의 총량이 되기 때문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전문가들의 회의실보다, 불완전한 실험의 작업실에서 더 많은 혁신이 태어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거대한 흐름을 바라보며 또 다른 실험을 시작했다. Soar Capital 를 세웠다. ‘날아오른다’는 뜻처럼, 이곳은 단기적인 수익보다 장기적인 방향을 본다. 어웨이크코퍼레이션이 고객 앞에서 제품과 조직으로 승부를 본다면, Soar Capital은 미래 산업의 흐름을 가설로 세우는데 투자한다. 기술의 진화를 단기 성과가 아닌 문명적 전환으로 보고, 사람과 산업의 방향을 함께 읽는다. 나는 그것을 지속 가능한 가설이라 부르고자 한다.
투자는 결국 믿음의 형태다. 그리고 지금의 믿음은 과거처럼 숫자나 실적이 아니라, 미래를 감지하는 감도의 수준에 달려 있다. 나는 기술이 인간을 바꾸는 과정을 지켜보며, 또 한 번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자본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가 아니라, 통찰이 자본을 이끄는 시대다.
나는 믿는다. 미래는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먼저 깨어 있는 사람이 만든다. 성숙은 시간의 결과가 아니라, 감도의 결실이다. 세상을 얼마나 세밀하게 감지하고, 그 감각을 얼마나 정확하게 사유로 전환하느냐가 그 사람의 깊이를 결정한다. 그리고 나는 그 감도를 잃지 않기 위해 매일 나를 다시 배운다. 깨어 있는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