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 리서치를 하다보면 그들의 삶과 작업이 서로 바운싱하며 균형을 맞춰가는 형상을 보기도 하고 그와 반대로 삶이 작업을 또는 작업이 삶을 압도해버리는 형상을 보기도 한다. 전자는 아폴론적 접근 후자는 디오니소스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균형감있는 단단한 영원. 잘 짜여진 도형들. 이들은 빛과 영원을 약속한다.
압도적인 긴장감 넘치는 mortal. 깨어져 개체로 반짝이는 다이아입자들. 이들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약속한다.
이 둘은 그들의 각각 고유한 특성대로 아름답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이 두 가지를 잘 균형적으로 가져가는 것이겠지.)
(*요즘 학교에서 히스테리와 연관선상에서 다다, 초현실주의 아티스트 작업들을 공부하고 있는데 그것에 감정적으로 지친 반동으로 이 글을 써본다.)
내가 오늘 소개할 작가들은 전자에 속하는 작가들이다. 나는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이 작가들 작업들을 보고 안정을 얻는다. 캔버스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던 혹은 어쩌면 그래서 그녀들은 더 적극적으로 자를 들고 캔버스를 완전히 통제하는데 성공했다. 단순히 그것을 유저로서 기록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언어로 그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뛰어넘어 작가 그 자신이 모든 판을 다시 짜는 느낌이랄까. 자신의 상처들을 전시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no matter what 내가 책임지고 내 길을 간다' 이런 태도가 느껴져서 미니멀한 작업들이지만 그 힘이 캔버스를 찢고 나온다.
먼저, 나의 원앤온리,,,Agnes Martin. (1912 – 2004)
돌아가시기 얼마 전의 그녀의 모습. 저 연세에도 총명한 눈빛과 자를 쥔 손을 봐라.
그녀는 콜롬비아대에서 불교과목을 들을 정도로 불교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의 작업들은 스님이 수행을 하는 것처럼 선 사상, 'practice'의 느낌이 강하게 난다. 실제로도 스님들처럼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오랫동안 하기도 했다. 뉴 멕시코에 집을 짓고 혼자 살았는데 신문은 절대 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작업은 그녀가 돌아가시기 4년 전에 그린 페인팅인데 제목이 아주 말랑하다. Loving Love. 그녀의 작업들은 untitled인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귀여운 제목들도 있다. 'I Love the Whole World', 'Happy Holiday', 'On a Clear Day'.
두 번째 작가는 Jo Baer. (1929 – )
92세의 나이에도 엄청 큰 작업을 하신다. 중요한 일과로는 운동을 꼽으시는데 큰 작업을 신체적으로 무리없이하기위해서라고. (진짜 너무 너무 너무 멋있음.) 더 궁금한 분은 아래 인터뷰 링크를 달아두었으니 직접 읽어보시길.
https://news.artnet.com/art-world/studio-visit-jo-baer-1922458
세 번째 작가는 Emma Kunz. (1892-1963)
그녀는 사후에 작업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생전에는 그녀 스스로를 'Healer'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의 작업들을 담은 책에서 (Hans Ulrich Obrist, Yana Peel 가 쓴) 마지막 작업으로 이 드로잉을 담으면서 썼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관심 있으신 분은 책을 한번 읽어보시길. 명상트립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포스팅하려고 그녀들의 작업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나도 머리가 맑아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내 세계에서 자를 들고 규칙을 만들고 정리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을테다.
(*사실 그녀들의 공통점은 장수(?)했/한다는 점인데. 나는 이 점이 전혀 놀랍지 않다. )
박완서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 '나목'에 대해 그녀가 말한 대목이 떠오른다.
"예술가가, 모든 예술가들이 대구, 부산, 제주 등지에서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독한 술로라도 정신을 흐려놓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1.4후퇴 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은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