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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즈 Dec 17. 2021

느릿한 향과 시간

며칠만인지 오늘은 오전 시간이 여유롭다. 약속없고 급한 일도 없어 한가하다.

조금 더 시간을 눙쳐보려고 찬장에서 커피 핸드드립 도구를 주섬주섬 꺼낸다.


열흘만인가 보름만인가 오랜만에 커피를 내려마신다. 원두봉지를 뜯으니 초콜릿봉투를 뜯은 것처럼 달콤쌉쌀한 향이 코끝에 걸린다. 마음속에서는 기대감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20g 조금 넘는 커피원두를 덜어 그라인더에 갈았다. 전기포트에는 물을 넉넉히 넣어 끓인다.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는 언제들어도 요란스럽다.

커피액이 담길 서버위에 드리퍼를 올리고 그위에 필터를 끼운다. 그 사이 포트소리가 잦아들었다. 뜨거운물을 드립주전자에 옮겨 담는다.

먼저 드리퍼위 필터에 뜨거운 물을 한바퀴 돌리며 붓는다. 이 과정을 ‘린싱’이라고 하는데 필터를 헹궈내는 과정이다.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종이향(?)을 뺄 수 있고 주전자 주둥이와 서버를 데울 수도 있다.


핸드드립 초보답게 서버를 저울 위에 두고 무게와 시간을 재며 시작한다.


고르게 갈아진 원두를 그라인더에서 꺼내 드리퍼에 담는다. 드리퍼를 살짝 흔들어서 원두가루가 평평하게 담기도록 한다. 주전자를 들어올리니 긴장감이 함께 올라간다. 오른손으로 주전자 손잡이를 잡고 왼손으로는 작은 핸드타월을 대며 주전자밑을 받힌다. 되도록 일정한 속도와 굵기로 물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 골고루 원두의 맛과 향이 우러나온다고 배웠다.

처음엔 빈 볼을 두고 물따르는 연습을 여러 차례 하기도 했다. 물따르는 게 뭐 별거랴? 근데 이게 생각보다 어렵다.

컨디션에 따라 흔들리는 손을 보며 스스로 수전증을 의심하기도, 기력이 딸리나, 긴장했나 등 여러 잡념들이 생겨 물조절이 여전히 어렵다.


둥그런 드리퍼의 가운데, 중심부터 물줄기를 붓는다. 재빠르게 그러나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원두를 고르게 적셔야 해야 한다. 물줄기를 무용수처럼 다루며 나선형을 그리며 따라낸다. 무대를 둥글게 쓸며 가장자리를 향하다가 끝에 닿지 않고서 다시 중앙으로 둥글게 돌아온다. 이것을 하나의 사이클이라고 하자.

물따르는 방향은 시계방향이든 반시계방향이든 정해진 것은 없지만 중간에 바꿔서는 안된다.

물이 30g 정도 따라지고 서버에는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면 첫단계는 성공이다.


이제 커피원두가 물을 안고 불어나는 ‘불림단계’로 넘어간다.

원두가루는 수분을 머금고 탄산가스를 내뿜게 되는데, 이때 젖은 가루가 부풀어오르며 공기방울을 터뜨리기도 하는 모습이 제법 볼만하게 귀엽다. 오븐속에서 빵이 구워지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잠시 멍하니 응시하다가 다시 집중. 딴 생각하지 않고 딱 30초를 기다렸다가 물을 부어야 한다.

시간을 엄수해야 쓰지도 떫지도 않은 적당하게 향긋한 맛을 추출해낼 수 있다.


중앙에서 부터 다시 물을 붓는다. 역시 나선형을 그리며. 주전자 물줄기는 좀더 굵어져도 좋다. 이제부터는 서버에 커피액이 떨어진다. 드리퍼 추출구멍을 통해 커피액이 흘러나온다. ‘1차 추출’단계에서는 50-60g 의 물을 붓는다.

나선형 모양을 몇 번 그리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과감하고 굵은 물줄기를 그렸다면 한두번 사이클에, 가늘게 떨어지는 물줄기라면 서너번의 사이클로 원을 그리며 원두를 뒤덮어야 한다.


커피향이 물씬 올라오기 시작한다. 물을 부으며 보글거리다 사그라드는 거품을 응시한다.

연갈색 거품과 그 아래 푹 젖은 짙은색 원두가루, 그 사이를 통과하며 방울방울 떨어지는 커피물이 조화롭다. 오르골의 움직임을 구경하는 것처럼 즐겁다. 여기선 단순히 보는 즐거움만 있지 않다. 나에게도 역활이 주어진다. 거품이 다 꺼지기 전에 전에 큐사인을 들은 듯 다시 주전자를 든다. 2차 추출을 위해 물을 붓는다. 양은 7~80g 정도.


그리고 이 과정을 다시한번. 3차 추출이 마지막 단계이다. 양을 채우기 위함이라 그저 편하게 80~100g 정도 붓는다.

이렇게 핸드드립 커피가 완성되었다.

(커피가 추출되는 시간은 2분 남짓 걸리는데, 과정에 빠져들다 보면 더 느리게 느껴진다.)


연하게 먹고 싶다면 뜨거운 물을 좀 섞기도 한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남편에게는 연하게 내주고, 내 취향은 투샷이라 이대로 마셔도 아쉬울 때가 있다. 한번 휘저어 커피잔에 따라 마신다. 방금 내려서 일까, 에디오피아 원두의 특징인가? 향미가 생생하게 올라오며 부드러운 신맛이 느껴진다. 커피믹스나 캔커피같은 가공된 커피만 20년을 마시던 내가 뒤늦게 알게된 즐거움이다.

향긋한 냄새는 후각을, 모락모락 김은 촉각을, 진한 커피색은 시각을 만족시킨다. 다른 것이 없어도 누구보다 사치스런 오전시간을 보낼 수 있다.


굳이 시간을 들여서 커피를 내려마시는 이런 날은 잠시동안 내가 ‘유한계급’ 이라도 된 듯하다. 낭비가 미덕처럼 여겨지는, '과시적 소비', '과시적 여가' 를 특징으로 삼고 있는 '유한계급'.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1899)이라는 책에 따르면 부르조아 또는 부자라고 불리 계급은 시간과 돈을 비생산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고 한다.

물론 금력이 없는 나는 이를 흉내내기에 불과하고, 혼자 즐기는 것이니 과시하기 위함도 아닌 것 같다.

그저 가끔 오전시간을 낭비해도 좋은 처지가 되었음에 만족을 느낀다.


삶에는 이런 한가함도 필요하지 않을까.

더 자주 핸드드립을 즐기는 느릿한 날들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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