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 장애인의 고백

by 전민교

어릴 때부터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싫었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자막이 없었기 때문이다.


TV 볼륨을 아무리 키워도, 영화관 음향이 아무리 빵빵해도, 내 귀엔 대사가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외국 드라마나 영화를 봤다.


자막이 있으니 안 들리더라도 내용을 100% 이해할 수 있으니까.


매일 그렇게 할리우드 영화만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어에 관심이 생겼고,

그 작은 관심이 미국 유학으로까지 이어졌다.


‘한국말도 잘 안 들리는데, 영어 공부가 될까?’라는 생각은 아주 잠깐 들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의 청각장애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늘 긴 머리로 귀를 가렸고, 보청기의 존재를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철저히 숨겼다.


한쪽 귀가 일시적으로 막혀 거의 아무것도 안 들리는 날에도 불편한 티 한 번을 안내며 태연한 척 일상을 버텼다.


초등학교 때부터 보청기를 사용해 왔지만, 사람들의 대화를 전부 따라가기는 여전히 힘들다.


특히 넓은 공간에서 여러 명이 동시에 말하는 자리는 아예 낄 수가 없다.


그래서 폐쇄된 공간에서 1:1로 일할 수 있는 심리 상담사라는 직업을 택했다.


그렇게 심리 상담사가 되기 위해 대학원을 다니던 도중, 코로나가 터졌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고, 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엔 상대의 입 모양을 보며 대화를 겨우 이어가는데, 이제는 입을 볼 수 없으니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비대면 수업은 자막 기능 덕분에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었지만, 졸업 필수 과정인 실습에선 상황이 달랐다.


내담자들이 모두 마스크를 썼으니 실상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30퍼센트도 안 됐다.


심지어 상담 중간에 한쪽 보청기 배터리가 갑자기 나가서 남은 한쪽 귀로만 상담을 이어가야 했던 날도 있었다.


지금이야 충전식 보청기를 쓰지만, 그땐 배터리를 갈아 끼우는 방식이라 또 언제 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즈음, 어느 책에서 시각장애인이자 스키 국가대표인 양재림 선수의 어머니가 하신 말을 보게 되었다.


“눈이 안 보이는 건 장애가 아니라 하나의 특징이야. 누군가는 귀가 안 들리고, 누군가는 키가 작지. 그게 뭘 못 하게 만드는 건 아니야.”


“하고 싶으면 해. 할 수 있어. 근데 할 거면, 너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해.”


“장애가 있다고? 그래서 못 한다고? 그건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야.”


우리 엄마, 아빠 또한 나를 청각장애인으로 등록하지 않으셨다.


장애가 내 인생의 걸림돌이 되지 않길 바라셨고, 막내딸이 ‘장애인’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셨다.


그래서 나와 같은 중증 청각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배우는 수화도 안 가르치셨고, 특수 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 나를 보내셨다.


심지어 “너는 못 할 게 없다” 하시며 유학까지 보내주셨다. 영어는커녕 한국말도 잘 안 들려서 발음이 어눌했는데도 말이다.


“보청기 배터리만 잘 챙겨가면 돼.”


부모님의 그 한마디로 시작된 내 유학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더 험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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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각 장애를 가진 심리 상담사' 프롤로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