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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무지개 Mar 03. 2023

나의 오랜 친구, 라디오

나의 사물들 -2

알람 소리에 눈이 떠지면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워 거실로 나와 제일 먼저 라디오를 켠다. 몇 년째 같은 주파수로 맞춰져 있는 라디오에서 잔잔한 음악소리와 함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래 오늘도 시작해 보자!'라고 마음속으로 구호를 외치며 아이들의 하루를 준비시키는 바쁜 아침을 맞이한다. 프로그램 하나가 끝날쯤에야 모든 준비가 완료된다. 아이들이 사라진 평온하고도 허전한 집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들로 틈이 메워지고 그 음악에 지친 몸과 마음이 치유된다.


텔레비전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라디오가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라디오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나 또한 학창 시절부터 지금껏 라디오를 곁에 두고 살아오고 있다. 라디오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이 있다. 땅꺼미가 지던 어느 날 나는 작은 라디오를 앞에 뒤고 엎드려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추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다양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순간 너무도 매력적인 음색의 여자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흘러나왔고 나는 금세 그 노래에 마음을 빼앗겼다. 처음 듣는 팝송이었다. 당시 ABC 밖에 모르던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는 없었고  오직 '캐리~, 캐리~'라는 후렴구만 따라 할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프로그램 진행자가 '머라이어 캐리'라는 가수의 노래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아, 가사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불렸구나.'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팝송을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그 노래가 머라이어 캐리의 'without you'라는 노래고 내가 '캐리'라고 부르고 다녔던 부분이 'can't live~'였다는 것을 알고 박장대소를 했었다.


어린아이에게 라디오는 매일매일 새로운 노래와 재밌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또 다른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나는 나의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수많은 음악을 만났고 보이지 않지만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외롭지 않았다. 모든 감각 중 오직 청각으로만 만나는 라디오는 시각을 필요로 하는 다른 매체들보다 오히려 나에게 풍부한 상상력으로 세상을 보게 해 주었다. 라디오와 함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하루의 모든 시간에 라디오와 함께 한 추억들이 있다. 방황하던 늦은 밤에, 잠 못 이루는 새벽에, 응원이 필요한 아침에, 나른한 오후에, 나는 라디오로 나를 위로하고 깨웠었다. 그렇게 라디오는 친구처럼 오랜 시간 내 곁에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라디오는 내 삶의 빈틈을 꾹꾹 메워주고 있으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나이가 들어 집안에만 있게 될 미래에 나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친구는 아마 라디오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라디오가 더없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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