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움켜쥐고 살 것인가
손을 통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형성하며,
세계와 자아의 경계를 구별한다.
| 마르틴 하이데거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1년에 두어 번 옷을 갈아입고 희끗한 머리카락을 대충 묶은 채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양손에는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비닐봉지를 꼭 쥐고 다니는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하루 종일 정처 없이 온 동네를 돌아다니는데 어떤 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여자와 마주치기도 했다. 그 여자는 나와 마주칠 때마다 화가 난 건지, 두려운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의 시선을 피해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여자를 만날 때마다 비닐봉지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유심히 쳐다보곤 했지만 좀처럼 비닐봉지에서 무언가를 꺼낸다거나 열어두는 법이 없어 비닐봉지 안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나의 비닐봉지에 대한 쓸데없는 호기심은 날로 커져만 갔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어느 날 오후, 나는 언제나 그 시간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밖에서 악다구니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이라기보다는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나는 놀라서 베란다 창문을 열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저 멀리 익숙한 그 여자의 얼굴이 보였고 여자는 두 명의 경찰과 실랑이 중이었다. 경찰들은 여자를 경찰차에 태우려 하고 있었고 여자는 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분명히 여자는 자신의 의지에 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저 여자를 경찰차에 태우려고 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알 길은 없었다. 길다면 긴 시간 여자를 보아왔기에 나는 베란다 창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그 여자에게 벌어지는 일을 끝까지 지켜봐야 될 것 같은 알 수 없는 책임감이 들었다. 그들의 계속되는 실랑이를 지켜보다 나는 언제나 여자와 한 몸처럼 붙어있던 비닐봉지가 여자의 손에 없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비닐봉지가 없는 여자의 모습은 낯설고 애처로웠다. 심지어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 보였다. 여자의 울부짖음은 존재의 이유가 제거된 여자의 절규 같았다. 실랑이는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경찰은 여자를 경찰차에 태워 동네를 빠져나갔다. 경찰차가 떠난 뒤 다시 동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의 소음으로 메워졌다. 나는 이것이 여자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창문을 천천히 닫았다. 그러고는 터덜터덜 거실로 들어와 소파가 꺼지도록 푹 주저앉았다.
여자의 빈손이 계속 떠올랐다. 여자의 비닐봉지를 찾아서 손에 쥐여주고 싶었다. 비닐봉지 안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비닐봉지만으로도 여자는 살아가는 이유를 찾을 것 같았다. 나는 여자에 대한 불편한 책임감이 푹신한 소파가 주는 편안함으로 희석되는 것을 느끼며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다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나는 그 여자처럼 무엇을 움켜쥐고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손으로 '만져진다'라는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손으로 '만진다'라는 것은 그것과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는 손으로 세상의 존재를 인식하고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손의 역할을 중요시하였다. 하이데거의 현존재(인간을 가리키는 존재론적 용어)는 손으로 사물을 경험하고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만든다고 하였다. 손은 사물이 가진 표상을 넘어 사물이 가진 근원적인 기능을 경험하게 한다. 컵은 손으로 컵을 잡고 무언가를 마실 때, 망치는 손으로 망치를 잡고 못을 박을 때, 연필은 손으로 연필을 잡고 글자를 쓸 때 그 도구의 알맞은 기능을 수행하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한 도구의 존재 유형을 하이데거는 '손안에 있음'이라 불렀다.1) 손안에 있는 세계는 온전히 실재하는 세계이다.
실재하는 세계 속 사물들은 단지 사물로만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사물을 통해 사물이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판매되는 과정에서 탄생한 수많은 사람들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게 되면 책이 만들어지는 인쇄소의 세계, 책을 쓴 작가의 세계, 책을 파는 서점 주인의 세계 등 내가 아닌 타인들의 세계가 모두 책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서로가 타인이 되어 세계 안에 함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손안에 있음'으로 구체적 경험을 하면서 관계를 맺게 되고 세계를 형성한다. 하이데거의 손은 인간이 실존적 질문을 품을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디지털 사회가 되고 디지털 기기가 발전하면서 하이데거의 손에는 이제 스마트폰이 쥐어졌다. 사물과 사람들은 스마트폰 속 접촉이 사라진 세계로 들어갔다.
스마트폰 속 세상은 손으로 하는 활동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하는 활동이다. 디지털이라는 단어는 본래 손가락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digitus에서 나왔다.2) 더 이상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세계에 우리는 너무도 길들여졌으며, 손가락이 손을 대신하게 되었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는 마사지다』에서 사회는 항상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 내용보다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미디어의 성격에 따라 형성되어 왔다고 하였다. 우리가 하는 말의 형태와 내용은 우리가 사용하는 의사소통 도구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3) 현재의 디지털 시대에서 우리의 의사소통의 형식과 내용은 손가락을 움직여서 사용하는 스마트폰에 강력한 영향을 받고 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사물의 소멸』에서 스마트폰에서의 디지털 소통은 탈 신체화 되어있다고 말한다. 스마트폰 속 세계에서 타자는 얼굴이 없고 시선이 없고 몸짓이 없다. 육체성의 부재는 커뮤니케이션에서 본질적인 비언어적 신호를 읽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며 이는 온전한 소통을 불가능하게 한다. 더욱이 얼굴 없는 타자는 머뭇거림 없이 손가락으로 집어서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으며 타인을 없애버린 자리에는 자신의 얼굴이 대신 비치게 되었다.4) 한병철은 디지털 세상 속 사회관계망 서비스에서 우리는 타자와 소통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은 나르시시즘적 자아와 소통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건드리면서 세계를 나의 욕구에 종속시킨다.5) 나에게 저항하는 것들을 쉽게 제거해 버리고 내가 원하는 가상의 공간에서 원하는 사람들하고만 소통한다. 타자는 나와의 다름이 존재해야 하는데 스마트폰 속 타자는 다름이 강탈6)되어 진정한 타자와의 소통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또한 디지털 매체에서의 소통은 빠른 속도와 효율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간편하고 짧은 기계 언어에 익숙해져 버렸다.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들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화가 빈약하고 무신경해졌으며 이성이 아닌 감정 위주의 대화로 후퇴되었다.7)
우리가 소통에 힘들어하는 것은 실재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진짜 타자와의 접촉이 감소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우리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움켜쥐어 있다. 마치 신체의 일부인 것처럼, 그것이 내 몸에서 떨어지거나 멀어지는 것을 부자연스러운 일로 느낀다. 그러나 신체처럼 우리에게 붙어있는 스마트폰은 오히려 우리의 신체 감각을 둔화시킨다.
내가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잠든 아이들의 숨소리를 듣는 시간이다. 아이들의 숨소리를 들으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다는 안도감과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자는 아이들의 손을 잡는다. 아이들의 손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나는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존재의 충만함을 느낀다. 내가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사람의 손이다. 그 손은 나에게 살아가게 하는 힘을 준다. 하지만 나 역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엄지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일 때가 많다.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물건과 음식을 사고 스케줄을 점검하고 예약하는 등 수많은 일상생활의 일들을 처리한다. 이제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스마트폰을 잡을 수밖에 없는 현상이 일어난다. 내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나를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비닐봉지를 든 여자의 손에서부터 시작된 여러 생각들은 결국 나에게 무엇을 움켜쥐고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며칠 뒤, 나는 동네를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쏘다니는 여자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여자의 손에 눈이 갔다. 다행히 그 여자의 양손에는 비닐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여자는 며칠 전 사건으로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달라진 것은 그 여자와 비닐봉지를 바라보는 나였다. 비닐봉지를 든 여자와 스마트폰을 든 여자. 우리는 닮아있었다. 나는 여전히 어디를 가든지 스마트폰을 챙겨 다니지만 이전과 다르게 내가 스마트폰을 사용한다는 것을 인식하며 스마트폰이 내 손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여자의 비닐봉지 속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 대신 여자의 손에 눈길이 갔다. 여자가 비닐봉지가 아닌 누군가의 손을 잡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내가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시간보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있는 시간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참고문헌
1)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살림, 2008, p.69
2) 한병철, 『투명사회』, 문학과 지성사, 2014, p.164
3) <뉴필로소퍼 vol.1>, 바다출판사, 2018, p.19
4) 한병철, 『투명사회』, 문학과 지성사, 2014, p.150
5) 한병철, 『사물의 소멸』, 김영사, 2022, p35
6) 같은 책, p.36
7) <뉴필로소퍼 vol.1>, 바다출판사, 2018, p.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