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삶과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죽음을 인식하며 사는 것은
자신의 현재를
맹렬히 느끼는 것이다.
| 아니 에르노
햇살은 따사롭고 사람들은 분주히 각자의 일을 해나가고 있는 오후였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걸어가는 아이들의 말소리들이 조화롭게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어제와 다름없었고 나는 안정감을 느끼며 매일 지나다니는 길을 그날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모든 평화로운 순간을 깨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호등이 없는 작은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나는 힘없이 흔들리고 있는 검은 눈동자를 발견했다. 그 눈동자는 천천히 나와의 거리를 좁혀왔다. 나는 그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흰색 바탕에 검은 점인지 검은 바탕에 흰 점인지 흰색과 검은색이 반반 섞인 고양이가 세상의 부조리를 모두 짊어진 듯이 아주 힘겹게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고양이의 얼굴과 귀는 피부병에 걸려 털이 듬성듬성했고 털색은 바래고 윤기가 없었다. 고양이는 점점 나와 가까워졌고 마침내 횡단보도 한가운데서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나는 현실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무덤을 찾아다니는 듯한 눈동자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와 나는 짧은 눈 맞춤을 뒤로하고 서로를 스쳐 갔다. 잠시 뒤 찢어지는 듯한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혹시,라는 마음에 재빨리 뒤를 돌아보니 소형 트럭 안의 운전자가 횡단보도를 느릿느릿 건너는 고양이에게 클랙슨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어떤 소리도 못 들은 것처럼 자신의 속도로 계속 걸어갔다. 마치 가혹한 삶이 가차 없이 클랙슨을 울리며 그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모든 것에 처연한 듯한 고양이의 발걸음에서 나는 죽음과 삶이 동시에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에서 경이로운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나방의 죽음』이라는 에세이를 다시 읽고 싶어 책을 펼쳤다. 9월 중순의 어느 아침, 울프는 유리창에 갇힌 한 마리 나방이 유리창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나방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창밖의 활기찬 세상과는 달리 창에 갇힌 나방의 가혹한 운명과 그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최대한 즐기고자 하는 나방의 열의에서 생명의 진정한 본질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세계가 지닌 거대한 에너지의 아주 가늘지만 순수한 한 가닥이 그 작고 연약한 몸속에 밀어 넣어진 듯했다. 그가 유리창을 이리저리 가로지를 때마다, 내게는 활기찬 빛 가닥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거의 생명 그 자체였다. 1)
결국 나방은 창틀에서 미끄러져 나가떨어지며 다리를 버둥거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나방은 죽음에 맞서 거대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울프는 그의 항거를 바라보며 다시금 순수한 생명력을 느끼게 되고 나방을 연필로 일으켜 세워 주고자 하다가 연필을 도로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죽음에 맞설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죽은 나방을 바라보노라니, 그토록 하찮은 적수에 맞선 그토록 큰 힘의 대수롭잖은 승리가 나를 경이감으로 휩쌌다. 조금 전에는 삶이 기이했듯이, 이제 죽음이 기이해 보였다. 2)
나는 『나방의 죽음』을 읽을 때마다 유리창에 갇혀 뜻하지 않게 죽음의 덫에 걸린 나방의 운명에서 삶의 부조리함을 느끼는 동시에 죽음을 피하고자 발버둥 치는 과정에서 숭고한 생명력을 발견하게 된다. 오직 살고자 하며, 살아있는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죽음에서 떨어지고자 퍼덕이는 나방의 날갯짓을 상상하면 내 심장도 빠르게 고동친다. 나방은 평생 그 순간만큼 온 힘을 다해 삶에 집중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죽음을 인식할 때 자신이 살아있음을, 존재하고 있음을 극렬하게 느끼는 순간은 없다.
여기 나방처럼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레프 똘스또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 일리치 역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자신의 존재를 진실로 자각한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먼 미래로 생각하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성공한 판사이며 성실한 가장이었다. 그런데 사소하게 생각했던 낙상사고로 인해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그의 삶을 침범하게 된다. 처음에는 불편감을 느낄 정도의 통증이었지만 점차 그 강도가 심해졌다. 치료를 위해 여러 의사를 찾아다니고 약을 복용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신장의 문제인지, 맹장이 문제인지 자신의 신체에 대해 상세히 고찰하며 이리저리 회복 방법을 찾았지만 증상은 더욱 악화되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그렇게 그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공포를 버텨오다 어느 날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보게 된다. 바로 삶과 죽음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이건 맹장 문제도 아니고 신장 문제도 아니야. 이건 삶, 그리고 죽음의 문제야. 그래, 삶이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자꾸만 도망가고 있어. 나는 그걸 붙잡아 둘 수가 없어. 3)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자 절망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그동안의 삶이 거짓과 기만으로 무의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고통이었다. 석 달 만에 그는 병색이 짙어져 병상에 눕게 되었고 언제나 죽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시간은 가혹하게 진실된 시간이었다.
그는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아무리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쳐봐도,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을 향해 매 순간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마저도 익숙해져 버린 이반 일리치는 마침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며 기쁨을 맞이한다. 그러고는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죽는다.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죽음은 없어. 4)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음으로 죽음도 없다.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말처럼 숨이 멎는 순간 죽음도 끝이 나는 것이다. 죽음은 삶과 함께 있다. 생명이 탄생한 순간, 죽음도 탄생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죽음에 저항하는 나방을 보며 살아있는 존재와 죽어가는 존재의 기이하고도 경이로운 결합 속에서 생명의 에너지를 인식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반 일리치처럼 죽음을 삶 너머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삶에서 죽음을 느끼게 되면 발버둥 치며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한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생명과 죽음은 함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만약 사람들이 죽음이 항상 곁에 있음을 인식하고 살아간다면 삶은 더욱 빛나는 생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다시 고양이가 떠오른다. 나와 고양이가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종을 뛰어넘어 동일한 필멸의 생명체로써 서로를 응시했다. 그 짧은 순간에 고양이가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우리는 모두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거야. 죽음은 삶을 빛내주고 제대로 나아가게 하지. 죽음과 속도를 맞춰 걸어야 해. 너무 빨리 걸어도, 너무 늦게 걸어도 안돼. 그럼 죽음이 방향을 잃고 너에게 달려들지 몰라.
그날 본 고양이의 뒷모습은 삶과 죽음에 달관한 철학자 같았다. 고양이가 옮기는 걸음마다 비장미가 흘렀다. 아마도 고양이에게 죽음이 아주 가까이 와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1)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 산문선4 『존재의 순간들』, 열린책들, 2022, p.161
2) 같은 책, p163
3) 레프 똘스또이, 『이반일리치의 죽음』,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판, 2021, p.69
4) 같은 책, p.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