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바라본 내가 한낱 점에 불과하다면,
나라는 인간은 몇 배율의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비로소 보이게 될까.
어느 날은 모든 것들이 모두 다 부질없이 느껴지고,
앞다퉈 목소리를 내는 것도 무의미한 일로 여겨지고,
하루하루 시간을 태우는 존재로서만 숨 쉰다고 생각될 때,
뜻 모를 허망함만이 감싸돌며 삶을 다했다는 느낌표에 내던져질 때,
나는 그날을 떠올린다.
그날은 대청소가 있는 날이었다.
모두 책상 위에 의자를 뒤집어 얹고 뒤쪽으로 한껏 밀어붙인다.
눈에 보이는 쓰레기와 먼지들을 재빨리 쓸어 담고서는,
고무튜브를 화장실 수도꼭지와 연결해 교실 바닥에 물을 채운다.
촉촉하던 콘크리트 바닥은
이내 물결이 일렁일 정도로 찰랑거리기 시작하고,
바닥을 메운 물들이 갈 곳이 없을 때
소싯적 하키선수였던 담임선생님이 등장해
체육교사다운 포스를 풍기며
하키채를 휘두르듯 빗자루질을 한다.
그렇게 한쪽에선 교실로 물을 들이고,
한쪽에선 교실 밖으로 빗자루질을 한다.
물바다가 된 그라운드에서 우리 모두는 하키 선수가 된다.
교실문을 골대삼아 호흡 맞춰 물을 패스하고
여러 번 골인을 시키길 반복한다.
켜켜이 쌓인 모든 먼지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나에게도 하키선수 출전자격이 주어졌다.
들이치는 물들을 순발력 있게 밀어내며 열띤 수비를 했다.
그렇게 쉴 새 없이 앞뒤로 스텝을 밟으며
풀스윙 빗자루질을 하던 어느 순간,
몸이 붕-하고 비행기처럼 공중부양을 했다.
별안간 두 눈도 스르륵 저절로 감겼다.
찰나에 허공으로 몸뚱이가 솟아올랐다가
중력의 힘에 다시금 확 끌어당겨져 떨어진다.
쿵!
머리를 크게 부딪혔다.
콘크리트 바닥이 진동할 정도로.
느껴진다.
등을 파고들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차가운 물들이.
큰 대(大) 자로 뻗은 교복치마의 수치심이.
황급히 몰려든 친구들의 정신없는 메아리들이.
얼얼한 뒤통수의 희미함을 삼킬 정도의 강력한 몸의 경직이.
황급히 달려온 선생님이 이유를 물었지만 아는 이가 없었다.
근처에서 둥둥 떠다니던 검은색 비닐봉지만이 답을 알고 있을 뿐.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선생님 등 뒤였다.
치마를 입은 데다 키가 큰 나를 제대로 업지 못하고
등 뒤에 길게 얹혀진 상태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뚝뚝-
2층에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올 때마다
맥없는 두 다리가 뚝뚝 떨어지고
1층 양호실까지 질질 끌려 따라 들어갔다.
이윽고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양호실은 온 데 간데없고,
온통 새하얀 공간에 홀로 누워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얗고 텅 빈 끝없는 공간.
너무나 눈이 부신 탓에 눈을 뜨기조차 어려웠다.
나 자신 외엔 모든 것이 하얗고, 하얗고, 또 하얄 뿐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백색빛의 공간에 압도되어
발도 떼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서있었다.
아,
내가 죽었구나.
여긴 천국이구나-
하는 순간
새하얀 공간이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바꼈다.
꿈뻑거리는 두 눈동자만 별처럼 빛나는 공간으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건가-
하는 순간
마치 영화관 스크린처럼
얼굴들이 하나씩 상영되었다.
아는 얼굴들.
가족과 친구들 얼굴이 보인다.
내가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내 눈에 담겨졌던 얼굴 그대로,
수많은 얼굴들이 빠르게, 빠르게 지나친다.
그 와중에
오늘 아침 등굣길에 만났던
전혀 모르는 얼굴들도,
그동안 수많은 길에서 마주쳤었던
이름 모르는 얼굴들도
빠르게, 빠르게 지나쳐 갔다.
인연이라는 것이
스쳐가는 것이라 했던 것을 증명하듯,
살면서 마주쳐온 모든 얼굴들이
인생영화의 엔딩크레딧에 올려졌다.
생의 모든 순간에 담겼던 얼굴들을 모두 감상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양호실 침대 위였다.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고, 생생한데..
반가운 얼굴들에 감정이 사무쳤는지 눈가도 촉촉해져 있었다.
그사이 119를 부르러 갔던 담임선생님은 내 상태를 살피며
여러 가지를 물어본 뒤 좀 더 진정했다가 집에 가라고 했다.
이 이상한 경험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이상한 느낌을 가지고 집에 오니 아무도 없었다.
웬일로 삼겹살 집에서 외식을 한다기에 가보았더니
가족들과 친척들이 환히 웃으며 반겼다.
꿈같은 현실에서 만났던 반갑고 소중한 얼굴들.
단편영화처럼 흘러갔던 얼굴들의 시간들이 목구멍 속으로 차오른다.
천국이라고 여겨졌던 새하얀 기분 좋은 공간도,
얼굴 상영관의 칠흑 같은 어둠의 향기도 생생하게 피어오른다.
감개가 무량하다.
삼겹살에서 피어오르는 고기 불향보다
더 진하디 진하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연들을 마주해 오며 필요와 불요를 구분한다.
어느 날은 어쩌다 이런 인연이 있었지 싶은 사람을 만나 행복에 겨워하고,
어느 날은 어쩌다 이런 인간을 만났지 싶은 사람을 만나 치를 떨기도 한다.
어차피 될 인연은 어떻게 해도 이어지며
어차피 안 될 인연은 어떻게 해도 버려진다.
진심을 다하고 사력을 다해 인연을 대해도
그 인연이 진심을 내팽개쳐 버리면
결국엔 스쳐가는 인연이 될 뿐이다.
때론 인연을 맺어가다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기쁨으로 덧댄 반창고는 열린 상처를 아물게 하는 능력이 있다.
... 인연.
그 부질없는 것에 대하여,
그 부질없음에 대하여,
오늘도 잊지 못할 영화 한 편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