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앞에 무릎꿇은 준영에게 마음이 다 비워진 것은 꼭 H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H와의 재회를 기다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와 다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궁전 현관에서 맞닥뜨렸을 때 깨달았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넘어진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던 그의 손. 나를 다시 보고도 별로 흔들림없던 눈동자. 선술집에 마주앉아놓고도 그림의 행방만 중얼거리던 그의 입술까지. 우리는 그저 그렇게 지나간 인연이었다. 어설펐던 마침표를 다시 찍었을 뿐. 그래서 그날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도 묻지 않았다.
나는 준영에게 찬찬히 다가갔다. 준영은 가만히 있어 줬다. 재빠르게 준영의 손에서 그림을 낚아챘다. 다행히도 순순히 내게 그림을 빼앗겨주었다. 후. 안도의 한숨이 절로 쉬어졌다. 그림을 손에 쥔 나는 얼른 말려 있던 종이를 풀어 보았다. 빈 종이였다. 준영이 낄낄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화난 나를 보고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나는 그를 힘주어 노려보았다.
재밌니?
이렇게라도 안하면 나랑 얘기 안 할 거잖아.
그의 시선이 바닥을 떨구었다. 그리고 금세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준영과 어떤 말도 섞고 싶지가 않아졌다.
진짜 화났어? 장난 친 건데. 오죽하면 이랬겠어. 내 마음 좀 알아주라. 너 이대로 나가면 이한수한테 갈 거잖아.
준영은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숨을 내쉴 때마다 과방 안이 취기로 차오르고 있었다. 조퇴하고 나가서 여태 술마시다가 다시 학교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새삼 아까 내게 뱉었던 욕설이 다시금 떠올랐다. 입에 담기 힘든 음담패설은 더욱 치욕스러웠다.
오해할 상황을 만든 건 미안해. 근데 정말, 우연히 마주쳤어. 앞으론 다시 볼 일도 없고.
우연히? 네가 그 새끼 복학하기만 기다렸다고 소문이 파다해. 그 새끼도 복학하자마자 너부터 찾은 거라며! 그렇게 절절해?내가 둘 사이에 훼방꾼이라는 둥 아침부터 이딴 소리나 들어야겠어?
누가 그런 소릴 해? 난 걔 복학한 줄도 몰랐어.
와, 끝까지 오리발이네! 열받게 진짜!
준영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나 그 날 정말로 우연히 만났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고. 너한테 이렇게 욕먹을 만한 행동도 한 적 없어. 물론 넌 기분나쁠 수 있겠지. 근데 화내기 전에 내 얘기부터 들었어야 하는거 아냐?
웬일로 준영은 잠자코 있었다.
이제 그만 하자. 우리 헤어져.
뭐? 이게 진짜! 어디서 헤어지자는 말을 입에 올려?
갑자기 준영이 내게 손찌검을 할 것처럼 팔을 높이 쳐들었다.
아무래도 이 방에서 빨리 빠져나가는게 좋겠다 싶었다. 눈앞의 준영은 너무도 낯설고 무서웠다. 애써 나는 태연한 척을 하며 짐을 챙겼다. 그를 자극해서 좋을건 없어보였다. 과방 한구석에는 내 그림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에이씨, 너 그 새끼랑 허리 두르고 나갔다며. 그날 밤에 둘이 뭐했는데?어?
준영의 입에서 튀어나온 진심이었다.
목격자도 있어!
확신에 찬 어조였다.
순간 다시금 강수찬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그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나는 아마 파렴치한 여자라고 소문이 나겠지.
그런 거 아니라니깐!
내 마지막 외침이었다.
나는 H와 허리를 감싼 일도, 함께 뭘 한 일도 없다. 그저 잠시 H가 술에 취해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을 뿐. 딱 그뿐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고, 그 뒤로 단 한 번도 연락하거나 만난 일이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박 의원이 위작스캔들에 연루돼 울부짖던 바로 그 '모함'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모함.
내가 그대로 과방을 나가자, 준영은 벌떡 일어나 내게 소리를 질러댔다.
야! 솔직히 말이 되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너 걔랑 사귈 때도 죽고못살았잖아! 내가 봤고 인철이 형도 다 봤는데?
나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자 준영은 더욱 목청을 드높였다.
내 결국 이럴 줄 알았다니까! 천박해!
그리고 이것은 준영과 영원히 종지부를 찍는 발언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