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
준영은 사람이 바글거리는 강의실에서 나를 모욕했다.
양다리 최악이야. 재수없어!
무슨 말이야?
무슨 말?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준영은 씩씩댔다.
이틀 전 내가 선술집에서 H와 함께 있던 일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너 혹시,
나는 구차한 변명이라도 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꽤 많은 학생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들의 시선은 몹시 따가웠다. 여기서 굳이 입만 열어봐야 더 큰 오해가 재생산될 게 뻔했다. 물론 내가 H와 함께 있던 일이 준영에게 오해를 살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학과 학생들까지 이렇게 빼곡한 강의실인데.
이한수랑 뒤로 다시 만날 거면서 왜 헤어지는 척 했대?
우리를 지켜보던 옆자리 여학생이 콧방귀를 뀌었다. 5년전 체육학과의 미팅을 주선했으며 H와 헤어지라고 노발대발했던 그 여학생. 김연희. 하필 그녀는 나와 같은 시기에 휴학을 했다가 복학까지 함께 해버린 악연이었다. 곧 연희 주변의 친구들마저 나를 보고 수군댔다.
호박씨 까는 거지 뭐.
딱하다, 우리 착한 준영이.
그녀들은 진정으로 준영을 가엾게 여기고 있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때마침 교수가 교실 앞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도로 자리에 앉아버렸다. 이에 준영은 나를 한 번 흘겨본 후, 교수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몸이 너무 아파 그러는데, 조퇴하고 싶습니다.
잔뜩 화가 난 탓인지 준영의 얼굴은 벌겋게 변해 있었고, 정말로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교수는 준영을 유심히 보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요새 환절기라 건강에 유의해야 합니다. 학생 이름이 뭔가요?
김준영입니다. 감사합니다.
준영은 교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며 내 팔을 세게 툭 쳤다.
뭐 같은 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함께. 뒤에 음담패설을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듣지 않았다. 어차피 나만 들리도록 내뱉는 것 같았기에 나만 귀를 닫으면 될 일이었다.
준영이 가방을 챙기는 동안 나는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준영 옆에 앉아있던 다른 동기 녀석이 나를 흘끔 보더니 고개를 파묻고 엎드렸다.
강수찬.
순간 그날 선술집에서 녀석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구나.
그런데 너도 그다지 떳떳하진 못할 텐데?
서로가 그날에 대해 입을 놀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과방으로 갔다.
일전에 공모전 준비하던 작품이 있었다. 할머니와 최 화백을 모티브로 한 말년의 사랑. 그것이 주제였지만 할머니를 찾지 않은 한달동안 내 그림도 진전이 없었다. 그래도 틈틈이 밑그림은 끝내놓았기에 중단하긴 아까웠다. 그동안 나는 궁전에 가지 않는 대신 과방에 도구를 갖다 놓고 비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그림을 그려 왔다.
그런데 오늘 도착한 과방에는 준영이 먼저 와 있었다. 조퇴한 그가 여기로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과방에 둘밖에 없다니 나는 굳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아졌다.
얘기 좀 하자.
발길을 돌리는데, 순식간에 준영이 내 팔을 잡았다.
이제 다 끝난 얘기잖아. 그 정도 모욕에 욕설이면 된 거 아냐?
나도 제법 기분이 나빴다.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그렇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다니. 이제 준영과의 신뢰는 모두 깨져버렸다. 그러나 준영은 내 팔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주어 나를 과방 안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놔!
잠깐이면 돼.
놓으라고. 난 더 할 말 없어.
준영은 거세게 나를 잡아당겨 과방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과방 문을 잠갔다. 무서웠다. 준영과 단둘 뿐인 고요한 이 공간. 내가 이곳에서 어떤 험한 꼴을 당할지라도 지금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랑 이렇게 끝낼 순 없어.
뭐?
나는 얼른 형광등 스위치를 켰다. 과방 안이 환해졌다. 그제야 좀 안심이 되었다.
나 마음이 많이 아팠어. 아까 너한테 심한 말 한 건 미안해. 네가 이한수랑 같이 있었다는데 내가 눈이 돌더라구.
준영은 다시 순한 양의 눈망울을 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가 무서워졌다. 내 그림을 찾아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재빨리 눈동자로 과방 안을 훑었다.
말이 안 통하네. 내가 너 한 번 봐주려고 이야기하는데 지금 그림 찾아?
어?
이딴 그림이 나보다 더 중요해?
준영은 어느새 내 그림을 돌돌 만 채 손에 쥐고 있었다.
이리 줘.
딱 10분만 나랑 얘기 해. 그럼 줄게.
준영은 내 눈치를 살피며 그림을 찢어버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간의 공들인 시간이 전부 찢길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일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화 풀어. 부탁이야. 내가 너 용서한대두?
대체 뭘 용서한다는지 어리둥절해하는 내 앞에 준영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아마도 내가 H와 선술집에서 마주한 일을 적당히 덮고 넘어가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준영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