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25. 다시 사랑하는 남자.

by 랑애

밤 11시경.

보통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면 이 시간엔 뭘하게 될까.

나는 그게 참 궁금했던 시절이 있었다.

늘 꿈꿔왔던 H와의 재회.

그래서인지 H 이후로 다른 남자를 사귀면서도 영 마음을 주지 못했다. 덕분에 항상 석 달 안에 차이거나, 양심상 헤어지거나. 나도 이런 내가 참 지독했다. 그를 떨쳐버리지 못한다는 것이.


후.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선술집에 앉아 있었다.

벌써 남자 혼자서 비운 술병이 두 병.


그림 꼭 찾아와야 하는데. 도통 어디다 감춘 건지를 모르겠어. 너도 진짜 몰라? 나 우리 엄마 그림 갖다줘야 하거든. 후.


그는 계속해서 그림의 행방만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을 할머니에게서 찾아와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재미없다. 지루했다. 실망스러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손을 포갠 그의 손길이 따뜻하여 다시금 그에게 취해버린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H는 술에 완전히 취해 있다. 그래서 나는 늦었다는 핑계로 먼저 자리를 박차고 가게를 나와버렸다.


서운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한편으로는 화도 나고. 차라리 미련이 낫지 다시 마주한 게 후회스럽기도 하고. 이런저런 감정이 뒤엉켜 머리가 지끈거렸다. 얼른 집에 가서 두통약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급하게 선술집 입구를 나서는데, 뒤따라오던 어떤 여자와 어깨가 툭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들어 여자를 보았으나, 여자는 술에 잔뜩 취해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탓에 여자가 휘청거릴 때마다 블라우스 안쪽으로 머리칼이 자꾸만 말려 들어갔다. 옆의 남자는 여자의 허리를 팔로 감은 채, 연신 손으로 머리칼을 빗어가며 꺼내주고 있었다. 그리고 곁눈질로 나를 한번 보더니 내 앞으로 지나쳐갔다.


강수찬.


나는 스쳐가는 남자를 단번에 알아봤다.

얼굴과 이름 정도만 알고 지내는 내 대학 동기였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따로 인사할 친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준영과 친해서, 모임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수찬의 여자친구는 지난주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고 했었는데. 게다가 유학가기 전날 두 사람은 학교 앞 주점에서 친구들을 모아놓고 언약식까지 했다고 들었다. 나도 몇 번 본적이 있는데 수찬의 여자친구는 단발머리에 꽤나 귀염성 있는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방금 지나간 여자처럼 늘씬하고 청순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차라리 내가 잘못 본 것이기를 바라며, 남녀의 뒷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허리를 아까보다 세게 감싸 쥐었다. 잘록한 여자의 허리가 남자의 팔에 감겨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취한 줄 알았던 여자의 손이 남자의 바지 뒷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골목길을 꺾기 직전, 남자는 나를 의식한 듯 다시 힐끔 돌아다봤다. 분명 수찬이었다. 그리고 내게 무언의 압박같은 눈빛을 발설했다.


엄마야!


수찬이 골목길을 돌아서 가자마자, 누군가 뒤에서 나를 확 끌어안았다.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다.

범인은 H. 선술집에서 언제 나왔는지 H는 어느새 나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킁킁. 술냄새가 났다.


콩닥콩닥.

술 취한 남자의 스킨십을 제일 싫어하면서도 이토록 뛰는 가슴이라니. 정말이지 내 마음은 가끔 앞뒤가 안 맞을 때가 있다.


많이 취했어.


내가 H를 살짝 밀어내자, H는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했어.


술 취한 사람치곤 제법 발음이 또박또박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넌 변명을 제일 싫어하니까.


H의 슬픈 목소리였다.

그래. 나는 H의 말처럼 변명을 가장 싫어한다.


그땐 그게 최선인 줄 알았어. 되돌리고 싶어졌을 땐 이미 너무 늦었지만.


......


그래도 그렇게 헤어지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미안해.


나는 아무런 응수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 이별을 후회했다는 그 말. 그 역시 우리의 석연찮은 이별에 변명이 필요했던 것 같다.


후두둑 후두둑.

쏴아아아.

갑자기 예고 없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이 시간.

나는 H와 함께 봄비를 맞고 있다.

그가 뒤에서 나를 꽈악 끌어안은 채.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