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24. 다시 만난 H.

by 랑애
오랜만이다.


낮고 굵은 음성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할머니의 궁전에서 오십 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멀뚱히 서 있었다.


기다렸어.


조금 전과는 다르게 밝은 얼굴로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H와 다시 마주친 이후 처음 건네는 말이었다.

나는 지금 할머니와 H가 혈연관계였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그림 때문에 벌어진 싸움에 두 번 놀랐으며, 나를 기다렸다는 그의 언행에 세 번 놀랐다.

열쭝이처럼 서 있는 내 팔목을 H는 말없이 잡아당겼다. 그렇게 그에게 이끌려 어느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저녁 일곱시 반.

5년 만에 재회한 남녀가 다시 사랑을 시작할 확률 80%인 시간이다.




선술집에서는 구슬픈 이별 가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아르바이트생이 황급히 일어났다. 카운터 근처에 놓인 텔레비전은 손님이 없을 때 시간을 떼우기 좋아보였다. 텔레비전에서 막 뉴스를 시작한다는 오프닝 음악이 흘렀다. H는 텔레비전이 잘 보이는 테이블을 골라 자리를 잡았다. 나도 말없이 따라 앉았다.


그러길 20분 째.

H는 말없이 술잔만 비워댔다. 마치 술독에 빠지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단순히 술친구가, 아니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줄 누군가가 필요했나 싶어 뾰로통해졌다. 이럴 거면 차라리 인형을 앉혀 놓을 것이지.


나는 적잖이 부아가 치밀었다. 저절로 텔레비전으로 시선이 갔다. 그러고 보니 낮에 인터넷에서 보았던 최 진구 화백의 뉴스가 다시 궁금해졌다. 오늘 하루 종일 실시간 검색어를 차지했으면, 아마 뉴스에도 분명히 나올 텐데. 뉴스에서는 마침 위작스캔들에 연루된 박 의원 사무실이 나오고 있었다.


기껏 모작이었다니. 이건 우리 국회의원들에 대한 모욕이에요!

박 의원과 친했다던 다른 의원이 탄식 어린 분노를 했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요? 이러니 국민들께서 자꾸 우리에게 실망하는 거지요!


다른 의원이 기자의 카메라를 의식했는지, 의원을 제지하고 나섰다.


아니 내 말은!


앞서 말했던 의원이 그제야 카메라를 의식한 듯 수습하려 들었다.

기자는 얼른 취재를 마무리했으며, 기자 뒤로 의원들이 계속해서 공방을 펼치는 듯 보였다. 금세 몸싸움이라도 날 것 같아 아슬아슬했다. 화면은 다시 스튜디오에 있는 앵커에게로 넘어갔다.


잘 지냈나 보네. 다행이다.


어느새 H가 입을 열었다.

그의 귀가 빨개졌다. 그는 술을 마시면 꼭 저렇게 귀가 빨개지곤 했다.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힘주어 쳐다봤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러자 남자가 픽 웃었다.


여전히 미술하나 봐.


여전히. 그래. 여전히 나는 미술을 한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온전히 기억하듯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눈동자. 사랑할 때 그의 손길. 헤어질 때 애써 덤덤했던 표정들. 그의 얼굴 앞으로 영상들이 펼쳐 지나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생경한 감정은 무엇일까.


정말 여전하네. 귀 빨개졌어. 당황했나 보다.


나의 귀가 꿈틀거렸다. H는 술마시면 귀가 빨개지지만, 나는 당황하면 귀가 빨개졌다. 그걸 두고 둘이서 어찌나 깔깔거리며 천생연분이라고 꿰맞췄었는지. 다시금 예전 생각이 났다. 아련함을 들킬까봐 애써 고개를 숙였다.


우리 고모랑은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렇다고 언제부터 할머니가 너의 고모였냐고 물으면 이상하겠지.


5년 전 쯤?


5년 전이면 나랑 사귀고 있을 때?


H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나와의 과거를 입에 올렸다.


아니. 헤어지던 겨울.


아아. 그랬구나.


정적이 흘렀다.

하필 내가 '헤어지던'이라는 수식어를 꺼내서인지 다시 사이는 어색해졌다. 어쩌면 H는 헤어진 계절이 '겨울'이었다는 것조차 까먹었을 지도 모르는데.


고모가 아버지 그림을 갖고 계셔. 난 그걸 찾으러 왔고.


H가 정적을 깨뜨렸다.


나, 엄마를 찾았거든.


H는 씨익 웃었다.


아, 내가 엄마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나?


H는 내 반응이 신통치 않았는지 내게 되물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는 나와 사귀는 동안에도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꺼려했었다. 어릴 적 가난했었고, 어느 기업의 후원을 받아 스무 살까지는 근근이 살았는데, 서울로 대학을 온 이후 어머니와 연락이 끊겼다는 말을 술김에 했던 적이 딱 한 번 있다.


잘됐네. 축하해.


축하씩이나. 그냥 어머니니까.


말과 다르게 그의 표정에는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아버지가 혹시 이 태석 화백이야?


응? 응.


아아. 왜 한번도 말해주지 않았어?


그랬나? 떠돌이 화가를 아버지로 둔 게 뭐 좋은 일이라고.


더는 묻지 않았다.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어떻게, 지냈어?


나도 모르게 나온 용기였다.

예전 이야기를 시작하자,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다. 헤어진 이후의 시시콜콜한 그의 감정따위조차도.


보고 싶었어. 아주 많이.


그는 내 감정을 읽어 버렸다. 그리고 내 손등 위로 살포시 H의 큰 손을 포개었다.

덕분에 내 귀가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귀가 다시 빨개졌네. 재밌다.


예전에 우리가 사랑했을 때처럼.

그와 나의 시간은 정지해 버렸다.


화요일 연재
이전 23화소설_23. 할머니 VS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