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모처럼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 H를 다시 마주친 후유증인지 그날 이후 약간의 몸살 기운이 있었다. 잠자고 있는 휴대폰을 열어 늘 그랬듯이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 검색창 하단에는 실시간 검색어가 빠르게 깜빡이고 있었다.
최 진구.
실시간 검색어 1위가 현재 최 진구였다. 설마 내가 아는 최 진구? 나는 지난번 최 화백과의 통화에서 그가 검찰에 조사받으러 다닌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단순히 이 태석과 친구 사이라 그저 참고인 조사인 정도로만 알았는데. 검찰 조사라니. 뭘까.
나는 화면에 보이는 최 화백의 이름을 손끝으로 클릭했다. 그러자 그에 관련된 기사가 줄줄이 쏟아졌다.
<친구의 작품을 연습용으로 따라 그려 현재 조사 중인...>
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할머니에게 가야한다. 할머니를 만나러. 만나면 반드시 따져 묻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생겼다. 아니 궁전에 가야 할 핑계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다시 찾은 궁전에는 적막함이 흘렀다. 나는 짧은 심호흡과 함께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할머니와 젊은 남자의 뒷모습이 함께 들어왔다.
H다!
H가 또다시 이곳에 찾아왔다!
할머니와 대체 무슨 사이길래!
설마, 그 역시 나를 또 마주치려고 여길 다시 온 걸까.
지금 내가 그렇듯이.
쿵쾅쿵쾅.
내 의지와는 다르게 H를 보자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구두를 벗는 동안에 현관 앞 <귀> 그림이 나를 쏘아봤다. 귓바퀴가 내 심장을 쭉 빨아들였다.
정말 어딨는지 몰라요?
왜. 영선이가 가져 오라디?
그러지 말고 주세요. 어딨어요?
나한테 없어!
원래 어머니 그림이에요!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선물로 준,
누가 그래? 딴놈한테 도망갈 준비 다 해놓고!
할머니의말에 H는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 보였다.
정신 차려! 너 버리고 도망갔던 에미야. 이제 와서 에미랍시고 나타났나 본데,
고모!
소리 낮춰. 여기 내 집이야.
한 치의 양보 없는 말다툼이었다.
언중에는 '에미'와 '고모'라는 혈연관계를 일컫는 단어들이 쏟아졌다.
가만.
그러니까 H가 할머니를 고모라고 부른다니.
그러면 이태석 화백이 H의 아버지?
접때 가져온 그림도 도로 가져 가. 필요 없어.
그건 여기에 보관해 주세요. 아버지 유작이에요.
내가 왜? 것도 위작이야? 그럼 영선이나 갖다 줘!
진짜 이러실 거예요?
H는 잔뜩 성질이 난 듯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할머니는 화가 나 부르르 떨고 있었다.
두 사람은 팽팽했다.
그럼 하는 수 없죠.
H가 항복기를 들었는지, 몸을 돌렸다.
발자국 소리를 쿵쿵대며 내쪽으로 걸어왔다.
그때까지 서 있던 나는 서둘러 도로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흠.
나는 괜한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려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나 H는 나를 보고도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잠시 나를 휙 쳐다봤을 뿐, 곧장 <귀> 그림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거칠게 액자를 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림 안의 귀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가져가려면 가져가. 도둑맞았다고 신고할 테니.
뒤따라 나온 할머니의 어조는 단호했다.
덕분에 H는 그림을 떼다 멈추었다.
고모, 진짜 끝까지...
H는 크게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는 할머니를 원망하듯 쳐다봤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집안으로 들어갔다. H의 눈빛이 더욱 슬퍼졌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다 나를 의식했는지 얼른 안면을 바꾸었다.
가볼게요. 쉬세요.
H의 등 뒤로 할머니의 절규가 이어졌다.
그림은 네 거지, 네 에미 것이 아니란 말이야!
또다시 '에미'란 단어가 할머니의 입에 올랐다.
H는 몸을 돌려 할머니를 보았다.
그럼 진품이 있긴 있는 거죠? 다음에 또 올게요.
없어!
할머니는 끝까지 완강했다.
H는 잠시 할머니를 아프게 보다가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할머니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얼른 거실로 들어가 할머니를 부축해 방으로 모셨다.
오늘은 혼자 쉬고 싶어. 미안하구나.
할머니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눈을 감았다.
하려던 질문이 참 많았으나, 오늘은 일단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