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전공 수업시간. 데생을 하던 내 연필심이 부러졌다. 손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탓이었다. 아니, 사실은 궁전에 갔던 그날이 다시 떠올랐던 까닭이었다. 헤어진 H를 궁전 앞에서 다시 마주쳤던 그날. 어색한 얼굴로 서 있던 나. 그에 반해 너무도 담담했던 H. 나를 반긴 게 아니라 H를 반겨준 할머니까지. 모든게 의아스럽고 충격이었다. 할머니와 H가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다니. 급하게 뒤돌아 나오던 나는 바닥에 있던 풍선까지 발로 밟았었다. 뻥. 그 소리는 마치 그 상황을 모두 '뻥'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나를 붙잡지도 않았으니.
끼이익.
이번에는 의자까지 말썽이었다. 자세를 고쳐잡으려던 나는 내가 앉은 의자 다리 하나가 불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의자를 끄는 소리가 컸던지 몇몇 학우들이 나를 돌아봤다.
문제 있나요.
교수가 다가와 내게 물었다.
아닙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양 새 연필을 꺼내고 자세를 고쳐 앉아 데생을 계속했다. 그러나 곧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만 그리고 싶어졌다. 고유의 리듬이 깨져버린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준영과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왜 그래?
뭐가?
꼭 화난 사람 같아. 밥을 우물우물 씹고 있잖아.
준영은 가끔 이상하게 섬세할 때가 있다.
그럼 밥을 우물우물 씹지 우적우적 씹을까?
내가 소야?
소? 푸하하. 갑자기 웬 소? 근데 소도 우물우물 씹지 않나?
준영이 눈치도 없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그렇지. 이래야 너답지.
나는 준영이 웃어대자 이상하게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래서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그러니까, 넌 처음부터 나를 소에 비유한 거네?
뭐? 왜 이렇게 예민해. 무슨 일 있어?
네가 먼저 말꼬리를 잡았잖아!
나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순간 준영의 웃음기가 대번에 사라졌다.
내가 왜 준영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 거지?
그것도 억지스런 말꼬리를 잡아가면서?
진짜 너 무슨 일 있구나? 혹시 또 거기 갔었어? 그 할머니한테?
준영은 나를 정확하게 분석했다.
그러게 거길 왜 또 갔어. 이젠 가지 말라니까. 아니면 나랑 같이 가든지.
눈치 빠른 녀석.
네가 뭔데 거길 같이 가쟤.
준영아.
왜?
너 원래 눈치없는 캐릭터 아니었어?
뭐?
너 눈치는 없지만 착하고 해맑아서 그게 매력이었어. 근데 아주 도사나셨다?
야!
그래! 나 할머니한테 갔어. 한달만에 용기내서 간건데 나 본척도 안하시더라. 됐니?
나는 씩씩대며 밥을 국에 턱 말았다. 나는 대체 왜 준영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걸까. 할머니에 대한 서운함일까 H에 대한 허무함일까. 실은 나를 아는 체 하지 않았던 두 사람 모두에게 화내고 싶었는데.
그러게 내가 그랬잖아. 그 할머니 너 안중에도 없다고. 생각났음 벌써 연락하셨겠지. 안 그래?
준영의 위로 같지 않은 위로였다.
나는 다 먹은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맞다. 넌 눈치가 없으니까 나한테 이러지.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 지도 모르면서. 눈치 없는 애가 맞네 맞아.
나는 퇴식구로 가 정수기에서 찬물까지 벌컥 마신 뒤 나가버렸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준영은 그때까지도 기가 차다는 듯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오늘 최악이었다. 이제 준영에게 차인다고 해도 할 말 없을 거다. 궁전에서 뺨 맞고 준영에게 화풀이하는 꼴이라니. 내가 H와 마주친 걸 안다면 되레 준영이 내 뺨을 날려버릴 지도 모르는데. 모든 게 엉망이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