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곧장 할머니의 궁전으로 갔다. 무려 한 달 만에 찾는 이 곳. 할머니는 과연 어떤 얼굴로 지내셨을까. 갑자기 연락도 없이 나타난 나를 보고 뭐라고 말씀하실까. 혹시 화를 내시진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삐그덕.
초록색 대문이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바람에 살짝 열렸다. 나는 조심스레 그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고요했다. 마당에는 전시회에 썼던 페이퍼가랜드와 꽃볼들이 한쪽에 마구 쌓여 있었다. 예전에 내가 전시회마다 담당했던 것들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없어도 페이퍼가랜드를 걸고 꽃볼들을 붙여 전시회를 잘 열었으려나. 내 빈자리는 티내지 않으려는 듯이. 나는 그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집어들고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도 잠겨 있지가 않았다. 혹시 급하게 외출이라도 하셨는지.
계세요?
나는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 태석 화백의 <귀>가 아직도 현관 입구에 떡하니 걸려 있었다.
엄마야!
대낮에 보는 그림인데도 섬뜩한 느낌이 또 한번 들었다. 할머니는 대체 왜 아직도 이 그림을 치우지 않았는지. 꼭 이 화백의 그림을 걸어야겠다면 전에 보았던 <사랑하는 여인아>가 훨씬 나았는데. 할머니의 취향은 가끔 참으로 난해하다.
그러고 보니 그림 위 구석에 떼다 만 풍선 두개가 붙어 있었다. 할머니와 최 화백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며 다투던 그 밤. 허둥지둥 자리를 피해주느라 그냥 나갔는데, 그게 여직 붙어있다니. 나는 가방과 페이퍼가랜드, 꽃볼을 한쪽에 내려놓고 신발장에서 간이의자를 꺼냈다. 그리고 의자 위에 올라가 매달아둔 풍선 두개를 떼기로 했다. 준영과 데이트 한다고 원피스를 챙겨 입었기에 잠시 망설였지만, 이 시간에 누가 현관으로 들어올 것도 아니고 와봤자 할머니일 테니 괘념치 않았다. 하나는 수월하게 뗐지만 하나는 손이 잘 닿지 않았다. 낑낑대며 안간힘을 쓰는데 누군가 현관문을 벌컥 열고 훅 들어왔다. 모자를 쓴 웬 젊은 남자였다.
우당탕탕. 와장창.
나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다가 의자에서 떨어졌다. 치맛자락을 잡는다는 게 헛손질까지 해서 엉뚱한 벽걸이 장식품마저 현관 바닥을 찰지게 때렸다. 덕분에 내 치마는 훌렁 뒤집어져 얼굴을 가려버렸다. 창피한 마음에 얼른 치맛자락을 내리는데, 문 앞에 선 남자가 나를 멈칫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굵고 낮은 음성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익숙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그걸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남자는 가방을 메고 한 손에는 큰 액자를 들고 있었는데, 짐이 없는 손을 내밀며 나를 일으켜 주려고 했다. 액자를 든 것으로 보아 택배기사가 아닐까 잠깐 생각했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올려 보았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 했다.
남자는 다름 아닌 H였다!
나는 너무 놀라 다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식은땀이 났다. 호흡도 가빠졌다. 수없이 연습했던 예행연습들. 정말로 H를 다시 만나면 아무렇지 않게 잘 연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저 지금 머릿속이 깜깜하다.
모자 속 남자의 얼굴도 잠시 당황하는 기색이 있었으나, 곧 단정한 표정이 되었다. 당황하는 내 모양새가 우스웠는지 갑자기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내게 계속해서 손을 내밀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는 그의 손을 무시한 채 벌떡 일어섰다.
여전히 완벽한 H. 큰 키에 다부진 체격. 또렷한 이목구비와 돌돌한 표정까지. 내가 사랑했던 5년 전과 똑같이 모든 게 그대로였다. 아니, 나이를 먹어서인지 거기에 남자다움과 세련미마저 더 추가되었다.
그러면 뭐 해. 날 보고 별로 동요하지도 않는 걸.
조금은 억울했다. 5년 동안 내 시간만 멈춘 기분이었다. 그의 시간은 째깍째깍 잘도 흘렀나 보다. 내가 넘어진 의자를 일으키고 나서야 주방에서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할머니는 나와 H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가 아닌 H의 이름을 부르며 해악하고 있었다.
한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