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20. 최 화백의 호출

by 랑애

할머니와는 한달 간이나 연락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사유는 '섭섭함'이었으나, 사실 속으로는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아마 그동안 궁전 전시회는 한번 쯤 더 치뤘을 것이다. 그날 이후 할머니에게 전화가 몇번 더 걸려왔지만, 나는 귀를 닫았다. 그렇게 할머니와의 인연도 종지부를 찍는 듯 했다.


물론 가끔은 궁궐이 그리웠다. 할머니가 갈아주시는 달콤한 딸기 주스. '놀이'를 시작할 때마다 깔고 앉던 장미 문양 카펫. 궁전 안의 수많은 미술품까지도. 하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버려야 하는 법. 굳이 내가 아니어도 할머니의 옆자리는 최 화백이 충분히 지켜내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렇게 아쉬움을 덜었다.


그 사이 나는 준영과 훨씬 가까워졌다. 녀석은 친구로 지냈던 예전처럼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다정했으며 친절했고 사려깊었다. 전공 수업을 들을 때면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고, 수업이 끝나면 손잡고 교정도 거닐었다. 도서관에서 서로의 자리를 맡아주며, 주말에는 평범한 데이트도 곧잘 했다. 축제 마지막 날 밤에는 진한 키스도 나누었다. 이제 우리 과에서 준영과 내가 연인 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행히 준영도 더는 예전처럼 불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여학생들은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캠퍼스 커플을 두 번이나 해놓고 뻔뻔하게 잘도 얼굴 들고 다닌다면서.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연애를 두 번 하든 열 두번을 하든 그녀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몇년 전 H와의 연애까지 끄집어내어 마음대로 쑥덕쑥덕. 한번 요란한 연애를 했으면 결혼할 때까지 수절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두 남자 말고도 연애를 세 번이나 더 했다는 걸 알면 아마 그녀들은 날 거꾸로 매달아두기라도 하려나. 그러고 보면 사람 사이의 관계는 항상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나는 준영과의 연인 관계를 곧 집어치울 줄 알았는데.




윙 윙.

나는 준영과 학교 앞 새로 생긴 추러스 가게에서 갓 튀겨낸 추러스를 아이스크림에 찍어먹고 있었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기에 가뿐히 수신거부를 눌렀지만, 이내 또 진동벨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그때 직감했다.

할머니와 관련된 어떤이의 전화일 거란 예감.

지금 받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지 모른다는 이상야릇한 육감.


여보세요.


나는 할머니를 떠올리며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


상대방은 쉽게 말을 받지 않았다.


꺄.


준영은 내가 전화를 받는 사이 아이스크림을 추러스에 찍어 내 코끝에 묻혔다. 그러고는 재밌다고 배시시 웃었다. 그의 장난에 나도 웃음이 터졌다.


뭐야. 이 올드한 장난은. 깔깔깔.


누구야? 잘못 걸려 온 전화?


그런거 같아. 말을 안 하네.


내가 끊으려는데, 그제야 휴대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연륜이 느껴지는 남성의 음성이었다.


최진구입니다. 저 기억하시죠?


!


그 날 싸운 이후 이 여사한테 한 번도 가보질 못했습니다. 한 한달 쯤 됐을까요.


네? 한달동안 한 번도 안 가셨다구요?


네. 요즘은 검찰에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네요. 그래서 말인데, 이 여사한테 자주 다니고 계시죠?지금처럼만 해주시면 돼요.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요. 꿈자리도 안 좋고...


!


미안합니다. 다짜고짜 전활 해서 이런 부탁이라니. 그럼 그렇게 알고 끊겠습니다.


뚜 뚜 뚜.

최 화백과의 통화가 끊겨버리자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준영이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졌어.
준영아, 할머니 어떡하지? 할머니가...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내가 없어도 할머니는 최 화백과 깨볶는 연애를 하며 잘 지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내가 궁전에 드나들지 않아도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내 안에서 부정하고 싶던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었다. 게다가 최 화백은 검찰에 조사까지 받는다니. 도대체 왜. 요새 시끌시끌한 위작 스캔들에 그가 관련된 걸까. 아니면 이 태석 화백이 친구라서?


미안한데 준영아, 나 지금 가봐야겠어!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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