윙 윙.
수업이 끝났다.
교실 문을 나서자마자 기막힌 타이밍에 진동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할머니.
나는 전화를 받을까 말까 잠시 망설여졌다.
지난번에 할머니가 했던 고백 때문이었다.
이 태석 화백이 할머니의 죽은 오라버니이며,
동시에 그가 최 진구 화백의 친구였다는 엄청난 사실.
그 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그토록 께름칙하게 생각해 왔던 이 태석의 <귀>. 나는 그 그림이 사위스럽다고 벌써 여러 번 할머니께 말해왔는데. 그것이 오라비의 그림임에도 할머니는 내색하지 않았다. 게다가 최 진구 화백과 이 태석 화백이 친구사이였다는 것 역시 귀띔해준 일이 없다. 마치 초등학교 때 친하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말도 없이 다른 친구랑 먼저 가버렸을 때의 배신감 같은 거랄까. 모든 걸 공유하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지만, 당연히 그럴 줄 알았던 사이. 그건 은근한 상처였다.
손가락을 갖다대고 수신거부를 할까 망설이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준영이었다.
오늘 수업 다 끝난 거 맞지?
어? 어.
그럼 오늘은 나랑 놀자.
하도 살갑게 웃는 탓에 나는 홀린 듯이 데이트를 수락했다.
준영은 내 손을 꼭 잡고 학교 밖으로 이끌었다. 연인 사이에 데이트는 늘 당연한 것을.
해가 쨍쨍하다.
바람도 약간 불었으나, 꽃내음이 살짝 느껴져 향기로웠다. 간밤에 봄비가 내린 탓인지 날씨는 어느새 여름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에 긴 소매 블라우스를 입은 걸 후회하며 팔을 걷어 부쳤다. 준영도 더웠는지 얇은 카디건을 벗어버렸다. 준영은 에메랄드 색깔의 카디건 속에 하얀 반팔티를 받쳐 입었다. 그의 굵은 팔뚝이 드러났다. 의외로 봐줄 만한 근육이었다. 그는 팔뚝을 내밀며 팔짱을 끼라고 눈짓했다.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준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기어코 내 팔을 강제로 잡아끌어 자신의 팔 안쪽에 휘감았다.
빨리 가자. 배고프다.
준영이 나를 채근했다. 걸을 때마다 그의 살결에 내 팔목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가끔 껴보는 팔짱이긴 하지만 어쩐지 어색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헤어지자고 말하려다 못해서겠지. 하지만 오늘 준영은 기분이 꽤 좋아보인다. 우리는 학교를 벗어나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나 사람 많은 곳에서 너랑 걷고 싶었어. 이렇게 딱 팔짱끼고서.
준영은 걸으면서도 나를 자꾸만 힐끔 보고 웃었다. 그 모습이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했다. 이렇게 사랑스런 구석도 있는 남자를 그동안 나는 밀어내기만 했구나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에 대한 일은 잠시 떨쳐버리고.
우리는 밥을 먹고 영화도 보기로 했다. 파스타를 먹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마땅히 할 거리가 없었다. 준영은 파스타를 좋아하지 않지만 나를 만날 때만 가끔 먹는다고 했다. 그걸 꼭 다 먹은 후에야 실토하다니, 미안하게시리.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내 미안함은 바뀌었다. 화려한 액션 영화를 봤는데, 상영 내내 준영은 내게 끈적거렸다. 영화 내용과는 상관없다는 듯 연신 내 손을 주물럭거렸고, 나는 그의 손길을 피하느라 영화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연인 관계지만 그의 스킨십은 어쩐지 자꾸만 꺼려졌다. 그것은 본능이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카페가 모여있는 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준영은 내게 할말이 있는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자꾸만 멈춰 서서 어기적거렸다.
왜.
나를 살포시 잡아끌었다.
왜 그러는데? 어디 불편해?
준영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끈적한 눈빛으로 나를 주시했다. 나는 그 눈빛을 과거에도 본 적이 있다. 중학교 때 학원끝나고 늦은밤 술취한 아저씨에게서 한 번, 고등학교 때 짝사랑하던 옆집 대학생 오빠한테 또 한 번. (대학생 오빠는 그 무렵 군대에 갔지만.) 그리고 가끔 H에게서도. 그래서 나는 그 눈빛은 본능적으로 피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주춤주춤 준영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실은 인철이 형이... 아이씨, 내가 너랑 빨리 결판 못내면 이한수한테 다시 뺏길 거래. 그 새끼 곧 복학한다며!
뭐?
학교에 소문이 파다하던데? 잘생긴 체육학과 이한수 복학한다고. 너도 설레?
정말 몰랐다. 우리가 헤어지고 H는 자취를 감췄다. 군대에 갔다는 둥 유학을 갔다는 둥 별별 소문이 다 돌았지만 확실한 건 없었다. 나 역시 H와 이별 후 휴학을 했었기에 소식을 몰랐다. 시간이 멈춘 그 때, 나는 몇 달이나 제정신으로 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H가 이제와 복학을 한다니.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긴장됐다. 솔직히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형이 옛날에 같은 동아리라서 다 봤대. 네가 그 놈이랑 얼마나 찐했는지. 아마 죽을 때까지 넌 그 자식 못 잊을 거라더라.
내가 반응이 없자, 준영은 할말을 다 퍼부었는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내 눈치를 살폈다.
왜 함부로 그런 소릴,
틀린 말은 아니지! 난 너랑 키스도 못 해봤잖아!
근데 그 새끼가 다시 나타난다니, 내가 안 불안하겠어?
준영은 말을 마치자마자 털썩 쪼그려 앉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이었다. 나는 머리를 무언가로 쾅 얻어맞은 기분에 넋이 나갔다. H가 복학한다는 사실도 몰랐고, 준영이 그걸 그렇게까지 신경쓰고 있는지도 몰랐다. 또 내뒤에서 쑥덕거리는줄도,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무방비로 온몸에 폭탄맞은 기분이었다. 기운이 쭉 빠졌다. 지나가던 몇몇 커플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봤다. 쑥덕거리며 킥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어나. 얼른.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몇번을 재촉하고서야 준영이 어기적어기적 일어섰다. 그제야 구경하던 사람들이 제 갈 길로 사라졌다.
치졸하지만, 일리는 있는 말 같아. 안 그래? 그 자리에 있던 선배들도 다 수긍했어. 다들 내가 너무 순진하대.
선배들? 그러니까 인철 선배가, 아니 그 자식이 사람들 다 있는 자리에서 그런 소릴 했단 거야?
나는 씩씩거리며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당장 인철 선배에게, 아니 그 자식에게 전화를 걸어 욕을 퍼부어줄 작정이었다. 대체 그 작자는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내 연애사에 대해 왈가왈부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찰진 욕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 폰안에는 그 자식의 번호가 없었다. 새로 폰을 바꾸면서 저장해두지 않은 탓이었다.
김인철 번호 불러봐. 어서.
나는 준영을 채근했다. 준영은 이를 눈치챘는지 가만히 머뭇거렸다.
그게 중요한건 아닌데. 남자들은 모이면 남의 연애 얘기 자주 해. 특히 넌 과에서 늘 관심 속의 인물이잖아.
내가? 왜?
예쁘니까. 정말 몰라서 물어?
그건 네 눈에만 그래.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 입을 꾹 다물었다. 준영은 매우 진지했다. 그 작자에게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면 말을 옮긴 준영의 입장도 난감해질 것 같다. 적당한 기회를 다시 봐야지 생각했다.
어쨌든 미안해. 형은 잘못없어. 그냥 내가 다 못나서지. 내가 많이 부족해.
야!
나는 완전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갑자기 준영이 순한 소의 눈망울을 하고 나를 봤다. 준영에게서 마음이 약해지는 포인트였다.
내가 널 너무 좋아하나 봐. 미안해. 나 원래 이런 놈 아닌데. 나 너 많이 사, 사랑해. 그러니까 딴데 가지 마.
내가 애써 화를 누르고 있는데, 순간 준영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준영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진심이 느껴졌따. 순간 그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준영의 등을 가볍게 손으로 톡톡 쳤다.
내가 어딜 간다고. 돌아갈 일 없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준영의 말대로 어쩌면 나는 늘 H가 돌아올 자리를 준비해두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준영이 아무리 둔해도 그걸 못 느낄리는 없었겠지.
내가 처음에 말했듯이 나한테 천천히 와도 돼. 난 너만 있으면 되니까. 우리 이제 커피마시러 갈까?
준영은 그제야 비시시 웃으며 내 얼굴을 다시 해맑게 쳐다보았다. 그래, 남자가 여자를 너무 좋아하면 별 시답잖은 이야기에도 팔랑일 수 있겠지. 귀가 얇은 준영이 잠시 가여워졌다. 그 동정이 훗날 내게 어떤 식으로 되돌아오게 될 지도 모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