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18. H와 헤어지던 날

by 랑애

그날은 비가 세차게 내렸다. 항상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이별할 땐 소나기가 오던데. 우리의 첫키스가 영화를 본 뒤 이루어졌듯이 이별하던 날 역시 영화처럼 비가 왔다.


일전에도 H는 나와의 데이트 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 일로 많은 실망을 했지만 H가 내게 싹싹 빌었고, 그럭저럭 잘 지나갔다. 나 역시 그에게 아직 마음이 남아있었기에.


그리고 그날이 두번 째.


H는 약속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심보로 끝까지 그를 기다렸다. 어차피 시험기간도 아니었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그를 만나러 가기 전 집앞 도서관에서 책 한권을 빌려간 건 그날의 운명이었다. 그날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며 읽었던 책 제목도 하필이면 <운명>.


사정이 있었어. 미안해.


사정? 무슨 사정? 지난번에도 덮어놓고 봐달래서 정확한 이유도 못 들었어.


미안. 미안해. 다 설명할 날이 있을 거야.


설명할 날? 그럼 지금도 입을 다물겠단 거네?


미안.


하. 너는 내가 그냥 우스운 거야.
지난번에 그렇게 쉽게 용서해주지 말았어야 했어.


나야말로 그 말은 그렇게 쉽게 내뱉지 않았어야 했다.

무시당했다는 생각과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뒤엉킨 그 순간. 나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H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지만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사실은 그의 침묵이 나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이러고저러고 설명이라도 해줬으면 모른척 넘어가줬을 수도 있었는데. 아무튼 비참했다. 자존심 상해 죽겠는 스무살 여자로서의 체면이 중요했다.


그렇게 멋대로 할 거였으면 내 인생에는 끼어들지 말았어야지!


이것이 나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H는 고개를 숙인 채 수긍했다. 나는 <운명>책을 신경질적으로 낚아채고 저벅저벅 걸어 카페를 나왔다. 나를 붙잡지 않는 등뒤의 그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되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 그건 너무 자존심상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이별을 했다. 서로에게 숨고르기보다 귀막고 홧김에 내지른 이별. 그건 최악이었다.




정말로 헤어졌어?


선술집에서 준영은 눈을 반짝였다.


정말이지? 정말로 너 이한수랑 헤어진 거 맞지?


그렇다니까.


그럼 이제 나한테도 기회가 오는 거지?


뭐?


준영은 이상한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나는 애써 장난스럽게 넘기려 했지만 준영의 긴장한 표정은 단번에 읽혔다.


그 날 나는 H와 헤어지고 정확히 삼십분 뒤 준영과 마주쳤다. 학교 도서관에 신청해둔 서적이 입고됐다는 알림을 받고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사실 H와 이상한 이별을 하고, 아니 아직은 헤어진 건지 화난 건지도 모를 이별을 하고, 집에 가기엔 길이 너무 멀었다. 오늘 차려입은 샤랄라 원피스도 공들인 화장도 너무 아까웠다. 이대로 집에 간다면 아마 방안에 틀어박혀 펑펑 울기나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마냥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마침 학교 도서관에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그렇게 향한 학교 앞. 준영은 나를 보자마자 몹시 반가워했다. 그의 반가움이 새삼 고마웠다. 이렇게 나를 반겨주는 사람도 있는데. 고맙다, 내 친구 준영이.


그럼 이제부터 나랑 데이트하자.


준영은 선술집을 나서며 나와 나란히 걸었다. 그리고 살갑게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술김인줄 알았는데 점점 진심같았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뭐라는 거야. 오늘 헤어진 사람한테.


나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준영의 팔을 어깨에서 떼어냈다. 학교 앞이라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봐 괜히 조마조마했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서 H의 귀에 들어가면 안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H와 끝이니까. 나는 끝까지 H를 신경썼다. 하지만 준영은 자꾸만 나와 H의 이별을 기정사실화했다. 그 뒤로 준영은 내게 열심히 구애했다. 졸업때까지 좋은 동기로 잘 지내고 싶다는 나의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천천히 와도 돼. 내가 기다릴게.
나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예쁘다고 생각했어.
네 마음 추스릴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어.
나는 다 괜찮아.


H를 치유하기에 달콤한 제안이었다.


화요일 연재
이전 17화소설_17. 할머니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