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17. 할머니의 비밀

by 랑애

할머니는 내게 신선한 딸기주스도 내어주지 않았다.

대신 커튼도 거두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어떠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나는 혹시나 최 화백이 와있지는 않을까 해서 궁전 안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커튼을 거두자 할머니는 그제야 나를 올려다봤다. 햇살에 눈이 부신지 할머니가 얼굴을 찌푸렸다.


볕좋은데 왜 이러고 계세요.


할머니는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아직 화해하지 않은 것 같다.

잠시 뒤 할머니는 액자에 담긴 그림 한 점을 들고 왔다.


이게 뭐예요?


할머니는 말없이 그림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한눈에 보아도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모습이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기대어 앉아 있으면서도 서로를 매만지는 손길에서는 애정이 잘 묻어나 있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와.

어떠니.

살아 숨쉰다는 표현이 딱인 그림이네요. 주인공들이 막 튀어나올 것처럼요.


내 대답이 마음이 들었는지 할머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얼른 그림의 하단을 살폈다.


<이 태석- 사랑하는 여인아>


이 태석?

나는 <이태석>이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그 이름이라면 현관에 걸린 <귀>의 주인공이며, 어제 시끌시끌했던 위작스캔들의 쟁점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이 그림도 살의가 느껴지니? 께름칙해?


아니요. 전혀요. 서로 사랑하는 게 훤히 보일 정도로 표현이 잘됐는걸요. 저는 이런 느낌을 좋아해요. 포근하고 다정하고.

아니지. 오히려 이 그림에서는 살의가 보여야지.


네?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이 그림은 오히려 두 사람의 죽음을 담고 있어.
봐, 남자는 이미 죽었지.
말도 안돼!


나는 그림 속 남자를 다시 살폈다. 남자가 지그시 눈을 감고 있긴 하지만 죽었다고 보기엔 평온해보였다. 사랑하는 여자를 곁이 두어서 보이는 온화함마저 느껴졌다.


현관에 있는 그림은 이 여인의 귀를 그린 거지.
이 여인은 귀가 없거든.


예?


나는 더욱 소스라치게 놀랐다.

할머니는 그림 속 여인의 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림 속 여인은 보자기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귀가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보자기를 싸맨 것이 그림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면서도, 여인의 기품에는 손색이 없어 보였다. 맞지 않는 상황임에도 감상에 거슬리지 않았다는 것이 또 한번 놀라웠다.


그렇다면 이 그림과 현관의 그림은 연작이다!

이 태석 화백의 연작!

혹시 어제 본 위작스캔들의 진품과도 관련이 있는 걸까?

할머니와는 또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리고 할머니는 내게 왜 이런 그림을 보여주는 것일까?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지나갔다. 복잡해졌다. 아니 궁금해졌다. 그런 내 속을 눈치챘는지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쿡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 그거 맞아.


할머니는 아리송한 말만 남겨놓고는 액자를 한쪽에 치워두었다. 우아한 기품의 그림을 계속 감상하고 싶었지만, 재빨리 치우는 것으로 보아 할머니가 꽤 아끼는 그림인 것 같았다.


이 태석 화백의 그림을 좋아하세요?

좋아하지.

최 진구 화백과 친구라면서요.
아, 어제 우연히 들었어요. 우연히.


할머니는 내가 최 화백을 입에 올리자, 표정이 굳어졌다.


아, 이것 좀 보실래요?
원래는 보여드리면 안 되는 논문인데.


나는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지도교수의 논문을 꺼냈다. 할머니는 돋보기를 다시 끼고는 재빠르게 논문을 눈으로 훑었다.


뭐, 사실 보여드리면 안 될 것도 없죠. 앞부분은 이 화백의 신상 정보고, 중간 부분부터는 공란이잖아요. 이걸 왜 금지된 논문이라고 하는지. 아무래도 교수가 절 속인 것 같아요.

나는 신경질적으로 다시 논문을 가방에 구겨넣었다.


금지된 논문?


이 태석 화백에 대해 연구하는 교수님인데, 논문이 자꾸만 금지된대요. 이상하긴 하죠?


그랬구나.


내 대답에 할머니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표정이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알죠? 왜 금지됐는지.

그래서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해버렸다. 지도교수는 함구해 줄 것을 당부했지만 할머니는 어쩐지 해답을 알 것만 같았다. 곧 할머니의 입에서 중대비밀이라도 쏟아질 새라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그 교수가 논문을 제대로 못 쓰나 보지.

풉.

기대의 성과도 없이 할머니는 나를 넉다운시켰다. 대쪽 같은 교수의 학구열을 단번에 짜부라뜨린 할머니. 과연 할머니다운 처사였다. 늘 학생들의 작품을 시쁘게 여기고 오직 개념만 따지던 그 교수. 내게 F를 선고해도 미술계의 절대적 권력자라 맞서지 못하게 하는 교수. 이번에도 금지된 논문으로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교수가 조금은 통쾌했다. 으스대던 녀석을 더 센 녀석이 한 방 먹여줬을 때의 쾌감이랄까.


내가 없는 순간이 와도 네가 내 그림들을 지켜줬으면 좋겠어. 나말고도 누군가는 진품을 알고 있어야 하니까.
그게 무슨..


이 태석 화백은, 죽은 내 오라버니야.
!!!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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