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16. 준영의 서막

by 랑애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택시를 타고 내려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는데, 웬 남자의 검은 실루엣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때까지 우리집앞에서 기다리던 준영이었다.


이제 와? 자알~ 한다.


씩씩거리는 준영을 보니 왠지 또 한번 소란이 날 것만 같다. 안 그래도 지금 머릿속이 복잡한데.


기다렸어? 왜 연락도 없이.


그래서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받았다. 일을 축소시키고자.


내가 전공수업이라고 빼먹지 말랬지?


잔뜩 화가 난 준영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공 수업이니까 되돌아오라고 했던 준영과의 통화가 떠올랐다. 그렇다고 자기 말을 거슬렀다고 화낼 성품은 아닌데. 내 등록금을 내주는 게 아닌 이상 그럴 자격도 그에겐 없다.


오전 수업부터 빼먹고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왜. 그 자식이라도 다시 만났나?

준영은 H를 언급했다. 뭐,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불과 보름 전에도 H를 거론하기에 그의 어깨를 거세게 밀친 일이 있었다. 그뒤로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이렇게 또 내 비위를 긁어대고 있다. 것도 지금 이 새벽에. 헤어진 뒤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그 망할 H 때문에.


대답해 봐!


준영의 눈에서 불이 번쩍 했다.

질투라기보단 차라리 분노에 가까웠다.


제발 나는 조용히 집에 들어가고 싶다.

쉬고 싶다.

단지 그 뿐이다.


내가 별반응을 보이지 않자, 조금 민망해졌는지 준영이 숨고르기를 했다.


준영아.


휴대폰은 왜 꺼놨어?


아뿔싸.

오전에 준영과 통화한 이후 꺼둔 휴대폰이 이제야 생각났다.


미안. 어쨌든 연인 사이에 잠수타는 건 잘못한 거니까.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먼저 연인 사이임을 공표해서인지, 고분고분하게 사과해서인지 준영이 한풀 수그러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준영의 눈빛이 슬펐다.


그것도 미안.


후.


그리고 나 미안한 김에 하나만 더 미안해하자. 있잖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영은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됐어 그럼.


준영아.


네가 이렇게 무사히 왔으니까 됐어. 거기까지만.


준영은 아무래도 내 다음 뒷말을 눈치챈 것 같다. 이 참에 헤어지자고 말해야 하는데. 미안한 김에 화끈하게 몰아서 한 번에 다 미안하면 좋겠는데. 너에 대한 내 감정이 도무지 따라와 주질 않는다고.


호감이 아니라 너의 배려에 대한 감사함이었고,

설렘이 아니라 휴식처가 필요해서 시작했던 연애였다고.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연애하는 가식,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너도, 내가 우스워?


준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런 거 아니야.
너도, 너도 내가 미친놈 같지? 친구들이 나 이한수한테 자격지심이래.
......
너도 그렇게 생각해?


자격지심은 모르겠고.

아무튼 지금 준영이가 제 정신은 아닌 듯 하다.

나를 꽉 껴안은 그의 팔 때문에 숨이 막혀온다.

피곤하다.

집에 빨리 가서 씻고 잠들고 싶다.

하지만 준영은 나를 끌어안은 채 홀로 어떠한 분위기에 휩싸여있다.


사랑해. 정말로.


준영은 나를 더 꼭 끌어안았다.

여기서 내가 사실을 말했다간 오늘 집에 가긴 틀려먹겠지.

그래서 그냥 잠자코 있어줬다.


대체 눈치없고 해맑기만 하던 준영이 왜이리도 집요하고 어려워진 걸까. 연애를 시작하고부터 만난 준영의 모습은 너무도 낯설기만 하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휴대폰 전원을 켰다.


부재중 전화 37통.


35통은 준영의 것이었고, 1통은 엄마, 나머지 1통은 할머니였다. 나는 '할머니'의 이름을 보자마자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발신시각은 불과 30분 전.

준영과 마주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도 할머니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인지라 메시지만 남기기로 하고 메시지 창을 켰다.


콕콕.

<저 집에 잘 들어왔>


미처 문장을 마치기도 전에 진동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할머니였다.


네.

집에 갔니?

네. 좀전에요.

그래.

쉬세요.

저기, 내일 다시 와줄 수 있니?
꼭 해줄 이야기가 있는데.

네. 그럴게요.


꼭 해줄 이야기라. 최 화백에 관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오늘 발표된 위작에 관한 진실?


사실 나는 궁전 뒷정리를 하다가 할머니와 최 화백의 싸움을 보았다. 두 사람은 주방에서 나란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지만, 물소리에 파묻힌 공기는 매우 쌀쌀했다. 어차피 나는 아침에 보았던 옷장 안 두 사람의 실루엣 때문에 일찌감치 갈 계획이었지만. 이번에는 냉랭한 분위기에 휩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위작이 나올 수도 있는 거야.
이 화백 실력이면 더더욱.


나올 수가 있다고요? 나올 수가 있어?


할머니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 위작이 발견됐는데! 같이 화내야 하는 거 아냐? 그래도 한때 친구였는데?

가만. 최 화백이 이 태석 화백과 친구였다?

나는 할머니의 예상못한 발언이 쏟아져 나오자 너무 놀랐는지 발바닥이 땅에 붙어버렸다.

할머니는 최 화백을 원망하듯 쳐다보며 씩씩댔다.


나 엄청 불쾌해!


후. 미안.


할머니의 앙칼진 목소리에 최 화백은 사과를 했다. 그리고 최 화백은 고개를 떨구었다. 정적을 가르는 물소리만 쏴아 들렸다. 물줄기 소리에도 둘의 감정은 감춰지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현관으로 향했다. 구두를 신고 일어서는데, 다시금 현관 앞에 걸린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이 태석 화백의 <귀>

달라지지 않는 께름칙함.

이 그림은 과연 진품일까.


분명 할머니는 알고있는 진실이 많겠지만. 오늘은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마침 최 화백이 얼굴이 벌개진 채 현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울먹거리는 할머니의 눈동자가 얼핏 스쳤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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