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리에, 빠르게, 그러면서도 신중하고 꼼꼼하게.
검찰이 이번 로비스캔들의 수사를 맡은 각오였다.
의원은 당분간 수사에 적극 임하겠으며, 현 의원직도 빠른 시일 내 거취를 정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러면서도 억울한 부분은 반드시 밝혀내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이번 일만 아니었으면 차기 대권 주자로 강력했기에 더욱 원통해하는 것 같았다.
시간은 벌써 밤 아홉 시를 넘기고 있었다.
궁전 안 회원들은 어느새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있었다.
오늘 로비 수사 발표하는 날 아니에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회원들은 여기저기서 술렁였다.
텔레비전 채널이 뉴스로 돌아갔다. 화면 속에서는 M그룹 대표이사와 국회의원이 주고 받았다던 그림을 공개하고 있었다. 하단에는 <속보>라는 문구와 함께 크고 굵은 네 글자가 깜빡였다.
위. 작. 판. 명.
감정의뢰 결과 그들이 주고받은 그림은 위작이라고 판명났다. 화면 속 검찰 관계자는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한껏 긴장된 얼굴이었다.
그림 외에 더 받은 것이 있는지 추궁할 것이며, 이 위작에 관해서도 연관된 자들을 소환할 계획입니다.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님을 밝힙니다.
다음으로는 그림이 베일을 벗은 채 카메라 샤워중이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사진작가가 비웃적거렸다.
나는 텔레비전 앞으로 조금 다가가 그림을 살피기로 했다.
전시회 회원들도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가재미 눈을 하고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 속 그림에서는 어떤 여인이 보자기에서 벼루를 풀고 있었다.
저게 무슨 그림이지?
의외로 평범해 보이는데?
웬일이야. 청탁용으로 위작을 줬다니. 개가 웃을 일이군.
무역일을 하는 사업가가 운을 띄웠다.
그림이 별 것도 없어보이는구만 진품을 못 구했나?
저 회장도 브로커한테 속은 거 아냐?
사진작가도 의문을 제기했다.
그거야 네 안목이고.
작곡가가 되받아쳤다.
뭐에요. 지금 한판 더 해보자는 거예요?
사진작가가 작곡가를 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에 작곡가는 장난스레 주먹을 쥐어 내밀어보였다.
하 참. 아니 다른 그림을 사면 되지.
더 유명하고 좋은 그림도 많잖아요.
그러게. 굳이 위작까지 줄 필욘 없었잖아? 멕이는 것도 아니고.
시인이 사진작가의 말을 거들었다.
다른 회원들도 동조하듯 수군거렸다.
다들 그림에 관한 정보보다 '위작'을 줬다는 사실에 더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림이 더 궁금한데.
의원이 저 화가 작품을 평소 좋아했나 보죠.
다시 작곡가에게 시선이 꽂혔다.
저게 누구 그림이지? 글쎄요.
누구 아는 사람?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들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아니, 저야 그렇다치지만 아무도 모르세요?
그림에 일가견 있으신 분들이?
사진작가는 양 어깨를 으쓱해보이더니 양팔을 꼬아 건방지게 팔짱을 꼈다.
흠흠.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박 선생이 괜한 헛기침을 해보였다.
또 한번 불편한 시선들이 오갔다.
나는 문득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라면 그림의 주인을 알 것만 같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재빨리 주방으로 가버렸다.
저기, 이 태석 작품 같은데요.
잠자코 있던 대학교수가 말문을 열었다.
연작 화가인데, 실력에 비해 유명하진 않아요. 아마 다들 잘 모르실 거예요.
과연 학식있는 교수답게 그림의 주인을 단번에 알아맞혔다.
때마침 텔레비전 화면 속에는
이 태석 화백의 작품을 흉내낸 것으로 밝혀져...
라는 자막이 떠올랐다.
이. 태. 석. ?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에 지도교수가 주었던 석연찮은 논문의 주인공.
그리고 궁궐 현관에 걸려있는 그림 <귀>의 주인. 바로 저기에.
이 태석?
연작 화가?
그게 누구야?
글쎄. 나도 처음 듣는 이름인데?
나도.
회원들이 술렁였다.
모두들 교수와 텔레비전 화면을 번갈아보았다.
교수가 부연설명을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정작 그는 입을 닫고 있었다.
나도 그 정도 밖엔 잘 모릅니다. 흠.
누가 보아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평소 고지식한 성품의 교수는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더구나 화백의 실력까지 운운했으니 무언가 더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몇몇 회원들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검색창에 '이 태석'을 입력했다. 이미 '이 태석'이라는 세 글자는 실시간 검색어였다.
그림 값 좀 뛰겠는데?
누군지 몰라도 진품 갖고 있는 사람은 대박 났네.
그러게.
가만. 혹시 이 안에 있는 거 아냐? 그림이 이렇게 많은데.
과연 날카로운 작곡가다웠다. 작곡가는 잔뜩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하고는 궁전 내부를 훑었다.
그런가?
에이, 설마. 그러면 여사님이 이렇게 조용히 계시겠어? 벌써 난리났지. 안 그래요?
그런가요? 여사님?
여사님? 빨리 좀 나와보셔!
회원들은 갑자기 할머니를 시끄럽게 불러댔다. 주방에서 덜그럭거리며 그릇 정리를 하던 할머니가 그제야 미적거리며 모습을 비췄다. 그런데 어쩐지 할머니의 얼굴은 약간 창백해보였다.
여사님, 저 그림 혹시 아세요? 저거 위작이었대요!
사진작가의 호들갑에 할머니는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처음 본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몰라요? 여사님도 처음 봐?
에이, 면 벌써 난리났대두.
소설가가 톡 끼어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응. 몰라.
할머니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봐. 여사님도 아쉽지.
에이, 이 안에 있다고 해도 그걸 말하나? 순진하시긴.
사진작가와 소설가는 장난스레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혀를 끌끌 차는 시늉을 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두 사람은, 아니 대부분의 회원들은 그림의 진품이 궁전 안에는 없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나는 아까부터 창백해진 할머니의 얼굴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들은 할머니를, 할머니의 궁전을, 과소평가 하고 있는 것 같다.
분명 할머니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뉴스 화면에서는 이 태석 화백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거의 알려진 정보가 없다고 했다. 아마 내가 인터넷으로 찾아본 약력 정도가 그에 관해 남은 기록의 전부인지도. 어차피 사람들은 화백에 대한 정보보다는 의원과 M그룹 대표의 추후 행방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질 테니까.
저건 모함이야! 무언가 잘못됐어!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최 화백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회원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최 화백을 쳐다보았다.
뭐야? 또 왜 저래?
젊은 사업가는 최 화백이 못마땅하다는 듯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최 화백의 귀에는 이미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이 태석...
최 화백은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어떠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분노 같기도 하고 자괴감 같기도 했으나, 감히 예상하건데 아마도 화가로서의 허탈감 같은 무엇이 아닐까. 내가 지도교수에게 위작스캔들에 대해 허탈하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쾅.
순간 최 화백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덕분에 현관문이 거세게 닫혔다.
뭐 좀 알고 있는 거 아냐?
사진작가가 최 화백이 나간 현관문을 턱끝으로 가리켰다.
글쎄. 암튼 이상해. 쯧.
젊은 사업가는 자신의 귀 위에 검지 손가락을 뱅글뱅글 돌렸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M그룹 대표가 자신이 준 그림이 위작이었다는 걸 몰랐다며 혼절했다는 속보가 지나갔다. 구급차에 실려 나가는 그의 모습에서 적잖은 충격이 느껴졌다.
정말로 그는 위작임을 모르고 주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