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궁전 전시회의 총무를 뽑기로 한 날이었다.
후보는 최 화백과 유명 대학 미술학부 김 교수.
먼저 김 교수의 선거유세가 있었다.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자리는 늘 떨리네요. 제가 총무가 된다면 제 월급의 삼 분의 일을 장학회 사업에 지원할까 합니다. 아, 물론 와이프한테는 비밀입죠.
교수가 멋쩍은 듯 웃었다.
사람들이 환호의 박수를 쳤다.
교수님 월급의 삼 분의 일이면 과연 얼마일까요? 전 거기에 귀가 더 솔깃한걸요?
사진작가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은 최 화백 차례였다.
평소 괴팍한 인상과는 달리 그는 서분서분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이 여사를 돕고 싶어서 용기냈어요.
저는 따로 월급이 없으니 그림기부로 대신 하겠습니다.
최 화백의 얼굴이 수줍게 붉어졌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챘는지 휘파람을 부르며 박수를 쳤다.
나는 할머니와 최 화백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할머니는 과한 볼터치라도 한 듯 얼굴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다시금 옷장 안에 엉켜있던 두 남녀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개표가 시작되었다.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나서서 개표하게 되었다.
결과는 5 대 5.
딱 1표만을 남겨둔 상황이 되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투표지를 들어 올렸다.
과반수를 넘긴 쪽이 없는데, 투표 다시 해야 하는 게 아니오?
작곡가가 소리쳤다.
지금 유권자가 열 한 명밖에 안 되는데 그냥 갑시다. 다들 한 고집 하시는데 다시 한다고 생각이 바뀔까요?
사진작가의 말에 다들 동조어린 웃음을 지었다.
내가 투표지를 열자 낯익은 글씨체가 들어왔다.
하필 마지막 투표지는 내것이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나를 보고 있던 최 화백과 눈이 마주쳤다. 그 옆의 대학교수도 바닥만 보며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동자는 그 역시 긴장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내 옆에 서 있던 할머니도 나를 재촉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에 나는 더 뜸들이지 않고 발표하기로 했다.
최 진구 화백.
최 화백의 승리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적어낸 탓이었다.
만세!
화백은 만세를 부르며 성큼성큼 다가와 할머니를 힘차게 껴안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할머니는 화백에게 안긴 채 얼굴이 새빨개졌고,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다가 이내 박수를 치고 환호하였다.
선거에 패한 대학교수는 씩씩거리며 궁전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작곡가가 그를 달래러 급히 뒤따라 나갔다.
나는 할머니는 끌어안으며 기뻐하는 최 화백을 보다가 만감이 교차했다. 후회가 됐다. 내가 대학교수의 이름을 적었더라면 아마 그가 총무가 됐을 텐데. 할머니의 짝으로는 괴짜 최 화백보다는 점잖은 김 교수 쪽이 훨씬 나아 보이는데. 나의 실수였다.
어쨌든 최 화백이 총무가 됐고, 다음 전시회부터는 자신의 색깔대로 해보겠노라 선포하였다. 취임식도 거창하게 할 것이며 한턱 크게 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늘 구석에 서서 사람들을 비웃적거리던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방실방실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던 그 남자는 너무도 낯설었다.
다같이 저녁 식사 할 거니까 한 사람도 집에 갈 생각 마시오!
최 화백은 선출 기념으로 한턱 쏘겠다고 들떠 있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시간에 얽매인 직장인이 아니었기에 밤새 먹고 마시는 게 가능했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최 화백은 먹거리를 사오겠다며 재빨리 궁전 앞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를 보던 김 교수가 최 화백을 가리키며 성질이 급하다고 혀를 끌끌 찼다. 할머니를 의식한 언행이었다. 할머니는 회원들의 눈치를 보며 최 화백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훑었다.
사준다는데 먹고 갑시다!
사진작가가 소파에 벌러덩 눕다시피 앉으며 한 말이었다.
김 교수는 그런 사진작가가 못마땅했는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사준다고 먹습니까. 나는 집에 가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던지요.
되받아치지 않았어도 좋을 말이었다. 사진작가는 굳이 그렇게 툭 받아버렸다.
일순간 찬 공기가 감돌았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할머니 역시 테이블 정리를 하며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평소 화통하고 대찬 기운의 할머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쉬이 나서기 곤란한 모양이었다.
그만들 합시다. 분위기하고는.
보다 못한 40대 중반의 소설가가 나섰다.
뭐야? 나이도 어린게 네가 뭘 안다고 껴들어?
김 교수가 평소답지 않게 발끈했다. 그는 최 화백에게 밀려 자존심이 상했는지 별거 아닌 말에 유난히 예민하게 굴었다.
제가 틀린말 했습니까? 그러다 싸움박질이라도 하시게요? 기분은 알겠지만 적당히 합시다. 여기 혼자 계신 것도 아니고.
야 이 자식아, 너 말 다했어?
교수는 완전히 흥분해 버렸다.
아이, 그만들 하세요.
그래요, 그만해요.
여기저기서 그들을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나이가 어린 나는 함부로 나설 수 없어 아무 말도 못하고 눈치만 보았지만, 할머니는 어쩐 일인지 계속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원래 회원들이 의견차이로 공방을 펼치면 언제나 끝맺음은 할머니 차지였는데. 최 화백 때문에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워진 것일까.
최 선생님한테 밀렸다고 삐딱선 타신 거잖아요, 지금!
사진작가의 일격이었다.
야!
총무 자리만 뺏긴 게 아니니까 이러시지 지금.
총무 됐으면 뭐 사랑도 자동 연결되나? 아니, 그게 그렇게 쉬워?
사진작가의 능청어린 말에 일각에서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학교수는 얼굴이 빨개졌다. 할머니는 못 들은 척을 하며 서둘러 테이블 닦은 행주를 들고 주방으로 가버렸다.
강짜도 적당히 부려야지, 다 늙어서...
사진작가는 이 말을 덧붙이고는 리모컨을 찾아 여유롭게 텔레비전을 켰다. 사람들은 예기치 못한 그의 언행이 심하다고 생각되어, 교수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교수가 부들부들 떨며 주먹만 꽉 쥐고 있을 때, 갑자기 작곡가가 달려들어 사진작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싸갈머리도 정도껏 없어야지!
악!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던 사진작가의 참변이었다. 작곡가는 사진작가에게 달려들어 그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고, 곧 사진작가도 작곡가의 멱살을 잡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싸움이었다. 테이블 위에 미처 치우지 못했던 와인잔이 깨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나는 꺅 소리를 질렀고, 몇몇 남자 회원들이 나서서 둘을 떼어 놓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제야 주방에 있던 할머니가 뛰어 나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는 거야! 둘 다 나가!
두 사람은 동시에 할머니를 보고는,
에이씨!
를 연발하며 마당으로 나가 주먹다짐을 계속 했다.
몇몇 회원들은 그들을 말리려고, 또는 구경삼아 그들을 뒤쫓아 나갔다. 김 교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다가 방에 들어가 겉옷과 가방을 챙겨 나왔다.
현관에는 마침 최 화백이 먹을거리를 양손에 잔뜩 들고 나타났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거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재밌는 것은 마침 나가던 김 교수가 최 화백과 마주쳤는데, 화백은 그를 보며,
분명 내가 한 사람도 집에 가지 말랬지. 아이씨, 밥 먹고 가요.
라며 앙탈을 부렸다.
이에 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지경이었다.
김 교수는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며 턱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최 화백은 주차하면서도 그들이 싸우는 광경은 못 봤는지 두리번거리며 교수가 가리키는 곳을 찾으러 애썼다. 서로 주먹을 날리며 마당에서 시작된 싸움은 어느새 마당 구석까지 밀려가 최 화백이 차를 세운 곳 반대편에 엉겨있었다. 게다가 어느새 어둠까지 깔리어 두 사람의 형체마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번에는 두 남자가 엉겨붙은 실루엣을 봐야만 했다.
최 화백은 사들고 온 먹거리를 현관입구에 내려놓은 채 소리쳤다.
밥 먹고 합시다! 밥!
화백의 너스레에 거실에 있던 이들은 모두 웃음이 터졌다.
잠시 후 작곡가와 사진작가는 코피를 흘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김 교수는 끝까지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할머니가 잡는 탓에 도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태연하게 앉아 닭다리를 뜯었다. 작곡가는 싸움을 말리지 않은 원망 때문인지 씩씩대며 김 교수를 째려보았다. 최 화백이 치킨무를 김 교수 앞에 갖다놓았다. 김 교수가 열심히 치킨무를 먹었다. 그제야 사진작가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작곡가를 팔로 툭 쳤다.
참내. 우리 왜 싸운 거냐.
마침 최 화백이 김 교수에게 새 닭다리를 내밀었다. 이를 본 작곡가도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나 참. 그러게.
일순간 모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최 화백은 혼자 사태파악을 못한 채,
누가 누구랑 싸웠어? 왜에?
라며 해맑게 물었다.
이에 김 교수는 귀까지 빨개져가며 웃음을 참다가, 결국엔 풉 하고 입안의 닭고기를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