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혼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Oct 14. 2018

생태주의의 관점에서 '담대한 발걸음'_향린교회 설교

생태주의적 비전, 향린교회의 설교는 언제나 좋다

20181014_향린교회

'담대한 발걸음'_김희헌 목사님 설교

생태주의, 자본주의, 욥, 부자청년, 통일



들어가기


우리는 지금까지 '경제'가 중심이 된 산업문명을 경험하고 만들면서 살아왔다. 자본주의가 이끌어 온 산업문명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풍요의 여러 차원은 어떤이는 욕심을 구조화시키기도 하고, 어떤이는 그러한 욕심의 종속되어서 삶의 의미와 희망을 잊어버리기도 하였다.


오늘 우리는 '생태문명'이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다시 풍요롭게 하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산업문명이 아니라 생태문명의 관점에서 풍요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우리의 삶의 방식과 믿음의 방향을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역사, 현대


자본주의를 통해서 현대는 산업적인 발전과 함께 경제적인 풍요를 만들었고, 발전이라는 담론 하에 인프라와 국가발전의 기초들을 나았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그러한 현대의 꽉찬 풍요가 이제는 현대 이후를 위해서 나아가고 있다. 포스트모던이라는 것은 모던이라는 합리성의 세계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길을 찾는 것처럼 보이기도하고, 길을 아예 지워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해체주의만으로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없다. 포스트모던은 개념적인 분화는 다양하게 일어났으나 삶의 방식으로서 우리의 풍요와 관계의 완성을 이루어주는 않는다. 방향을 제시해주지는 않고,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길을 지우는 방식으로는 가능한 것 같다.


생태문명, 삶


생태문명이 던져주는 화두는 간단하다. '생명인가? 자본인가?' 당연히 누구라도 생명을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에서 본 것처럼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을 현실의 발 담그고 삶의 방식을 만들어낼 수 없다. 자본주의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냈지만 누군가는 계속 배제되고, 결국에는 인간 자체가 배제되는 결과를 나았다. 생태문명이 제시하는, 혹은 생태주의가 제시하는 것은 한가지다. 우리의 생명을 근본으로 문명을 다시 구성해보고, 대안적인 삶의 방식으로 우리의 관계와 공동체를 회복해보자는 것이다. 최근 한국에 찾아온 생태주의학자 폴 캅의 책들에서도 생태주의의 이념과 방향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부자청년, 자본


오늘날 우리는 부자청년이 처한 환경과 같은 곳에서 살고 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보는 부자청년의 고민은 '자본인가 생명인가?'선택이다. 예수님은 가지고 있는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고 그러한 정체성에 기반해서 삶을 구성했기 때문에 자본이 결국은 자신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에서 첫째가 꼴찌가 된다고 말한다. 부자청년은 비록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일등이지만, 생명의 관점에서는 꼴찌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숭배하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인가? 돈인가? 삶을 살기위해서 돈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돈이 일등이 될 때 우리의 삶은 꼴등이 될 것이다. 자본을 넘어서는 어떤 삶의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욥기, 시대정신


욥기에서 보여지는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욥기 당시에도 사람들은 세상의 풍요가 주는 것들 축복으로 생각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파산에 대해서 절망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부정하도록 부축인다. 자본의 매력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물어본다. 일등을 하라! 앞서서 나아가라 그것의 증거는 너의 재산이다! 그러나 욥은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순간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것이 세상에서는 꼴찌가 되었다. 그러나 욥은 오늘의 본문에서 처럼 새로운 시대의 일등이 되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 생명의 우선성과 생태적인 관점에서의 주인되시는 분을 인정하는 것이 그 당시에는 꼴등이지만 앞으로의 시대에서는 일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문제, 실제적인 삶에서 주인이 되신다. 그리고 우리가 공동체로 존재하는 가운데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시고 인도하신다. 소외된 이웃들과 제도적 약자들에게도 역시, 진리를 찾아다니면서 삶의 근본을 고민하는 이들에게도 역시.


낙타, 천국


하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부자가 천국을 갈 수 없다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온전한 해석이라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핵심은


메타, 파르시아


대범함, 확신, 자유, 개방성이라는 뜻을 가진 파르시아'라는 헬라어는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때 드러나는 의미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메타 파르시아'라고 하시면서 믿음을 가지고 역사를 열어내고, 함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자고 하신다.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열어내는 담대한 희망에서 우리는 통일을 바라본다. 담론적으로 볼 때 하늘의 진리를 열어내는 방식이 생태주의가 될 수 있고, 생명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생태문명은 우리에게 담대한 희망으로, 담대한 발걸음의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지 않을까?


여순 사건, 혁명


여순사건에 대한 해석은 어떻게 되는가? 반란인가? 혁명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싸웠는가? 여순사건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생각과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을 해석하는 여론과 역사는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여순사건을 볼 때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혁명의 입장에서 여순사건이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여순사건 이후 2년 후에 국가는 국가보안법을 제도화한다.


통일 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비전은 하나님의 때에 보여지는 새로운 방법과 실천일 것이다. 만약 이 모든 것이 통일과 하나됨을 위한 과정으로 보여진다면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거기에 계신다!!


미지막 찬양_국악찬송 178장 베드로의 편지




민네이션, 생각


새로운 시대를 여는 담론은 무엇인가? 생태주의가 가지고 있는 비전은 어떻게 통일과 연결되고 우리의 하나님됨의 비전이 되는가? 이런 고민들이 깊이있게 생겨나기 시작한다.


욥의 시점에서 시대정신과 부자청년의 관점에서의 시대정신이 극명하게 비슷하면서도 주체들의 행동은 대비가 된다. 어디까지 보고 있는가? 현상 넘어서 그 현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들이 보이는가? 그럼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현상 넘어에 움직이고 생동하고 있는 비전이 보이지 않는가?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다. 하나님이 거기에서 우리의 삶을 열어가지고 계신다. 이미 우리는 거기에서 준비되고 있다.


나는 사실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예수님은 항상 함께 하신다 우리가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항상 함께 걸어가신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이 좋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이 걸으시는 길로 걸아갈려고 한다. 생태주의가 완전한 답이 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나라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여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더 찾아보고 공부를 해봐야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연과 햇빛, 바다와 공기를 누리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비전을 고민해보아야겠다.





참고 1. 생태주의


생태주의(ecologism)는 전통적인 환경주의보다 더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환경 문제를 바라보는 사상이다. 즉, 현재의 환경 문제를 기술적 전문성의 적용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며 사회의 근본적 성격이 개선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환경주의와 달리, 이를 보다 심각하고 심층적인 잘못들이 겹쳐 일어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생태주의와 전통적 환경주의의 차이


전통적 환경주의가 사회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다면, 생태주의는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생태주의적 관점을 따른다면 환경 문제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질서들의 문제가 겹치며 만들어 낸 표면적 증상일 뿐이다. 따라서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에 있어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생태 낭만주의와 생태 합리주의


1970년대에 출현한 이 사상을 핵심으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는데, 크게 나누면 생태 낭만주의와 생태 합리주의의 두 가지 갈래로 분류할 수 있다.


생태 낭만주의(ecological romanticism)는 18세기 낭만주의 사조가 활기를 띠면서 환경위기 극복의 대안으로 나타난 사상이다. 생태 낭만주의는 사회제도의 개선이나 변혁에 신경 쓰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감성을 제고시키고, 이를 통해 개인의 가치관 변화와 그에 따른 실천적 행보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환경 문제의 근원적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가치관의 혁신과 유포가 지속된다면 문화 패러다임의 교체가 형성되면서 환경위기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생태 낭만주의의 전형으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심층 생태주의와 문화적 생태 여성주의가 이에 해당한다.


심층 생태주의는 환경위기의 원인으로 인간 중심의 자연 지배적 세계관을 지적한다. 이들은 서양 전통의 세계관에 내재된 인간 우월주의와 이원론적 분리주의에 반대하며 두 가지 규범을 내세웠다. 첫 번째는 생명적 관점에서 인간이나 자연적 존재가 평등하다는 생명 중심적 평등(biocentric equality)이고, 두 번째는 나를 나 이외의 타인과 동식물종, 지구로 넓혀서 모두를 하나로 인식하는 경지의 자기실현(self realization)이다.


문화적 생태 여성주의(cultural ecofeminism)는 남성 중심주의 사회에서 폄하된 여성적 가치 즉, 감성이나 영성을 통해 여성주의의 문제와 환경문제를 함께 풀어 나가려 했다. 이 입장을 따르면, 생명체를 낳고 부양하는 자연은 어머니로 파악될 수 있어 여성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자연에서 생태 영성(ecological spirituality)을 분별하여 지구 자연을 구하는 데 여성이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생태 합리주의(ecological rationalism)는 낭만주의와 달리 계몽주의의 가치를 선택적으로 수용한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므로 사회제도를 바르게 구축해야 하고, 그것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조성될 수 있다. 특히 도구적 이성을 넘어, 관계적 이성을 통해 동료 사회 구성원과 자연에 대해 호혜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새로운 생태 사회를 조성하는 것으로 환경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태 합리주의의 전형으로는 사회 생태주의 사상, 사회적 생태 여성주의 사상 등이 있다.


사회 생태주의 사상은 환경위기의 뿌리를 인간과 자연의 대립적 지배관계가 아니라 인간 사회 내의 사회적 서열화 요인에서 찾는다. 서열화 의식이 사회제도로 뿌리를 내리고, 이것이 확산되면서 계급차별이 일어나고, 이것이 자연의 영역으로도 비화하여 자연차별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결국 서열화로 인한 차별의식이 생태위기를 초래한다. 사회 생태주의는 서열화에 도전하여 그것을 원천적으로 청산함으로써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이는 아나키즘의 지평에서 생태적 인식을 적극 반영하는 사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생태 무정부주의(eco-anarchism)로 불리기도 한다.


사회적 생태 여성주의(social ecofeminism)는 문화적 생태 여성주의에서 주장한 여성적 가치의 우월론은 본원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면서도 자연적 존재이므로 양자의 균형 속에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생태 여성주의가 자연과의 영성적 결속을 중시하는 데 비해, 사회적 생태 여성주의는 환경문제와 연루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안에 관심을 표출하고 이를 변화시키는 데 주력한다.


생태 사회주의, 생태 러디즘, 반성장주의


생태주의의 다른 다양한 논의들을 낭만주의나 합리주의의 분파로 특별히 분류하지 않고 나열해 보자면, 앞서 말한 사상들 이외에 생태 사회주의, 생태 러디즘, 반성장주의 등이 있다.


생태 사회주의(eco-socialism)는 생태적 위기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결과라고 보는 사상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을 수반한 경제성장과 산업화가 지구의 건강에 책임성을 망각한 낭비, 과소비 및 환경오염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다.


생태 러디즘(eco-luddism)은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다. 고삐 풀린 과학기술적 진보는 인류에게 무한한 편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해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19세기 초 러다이트 운동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반성장주의(anti-growth)는 성장 그 자체가 주된 문제가 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다시 말해, 환경적 위기는 성장의 결과에 대처할 수 있는 지구의 능력을 벗어난 성장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반동적 생태주의(Reactionary Ecologism)는 생태위기의 현실을 인식하고 생태학의 원리를 수용하지만, 거대 사회와 공업력을 기반한 경제를 긍정한다. 대표적인 논리로 신맬서스주의를 들 수 있으며, 에코파시즘의 대표적인 논리로 비판받기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나님과 선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