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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Oct 14. 2018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출판기념회_기록

민중신학의 주제, 대안, 미래를 고민하며

20181014_향린교회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_출판기념 토크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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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 안병무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22주년이다. 민중신학의 텃밭인 향린교회에서는 22주기를 맞이하여 추모기도회를 진행했고, 이에 맞게 출판된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라는 책을 돌아보면서 지금까지의 민중신학, 현재의 민중신학, 앞으로 제시될 주체로서의 '민중'들의 신학을 조망하는 시간을 가졌다.



책, 소개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는 국내 가톨릭 출판계에서는 처음 펴내는 민중신학 책이다. 본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1부는 ‘민중을 말하다’라는 주제 아래 오늘날 특별하게 부각되는 민중 현상에 대해 다루었고, ‘시대를 말하다’라는 제목을 단 2부는 오늘의 사회적 쟁점에 대한 민중신학적 문화비평이다. 3부에서는 민중신학의 중요 개념들을 현대적으로 풀이했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한恨과 고통을 발견하면서 탄생한 한국의 신학이다. 그래서 이 신학은 언제나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과 탄식의 증언자로, 감시자로, 그리고 고발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바로 거기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책, 목차


프롤로그 21세기 민중신학의 동시대성을 향한 말걸기 1부 민중을 말하다
1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얼굴들: 민중신학과 여성의 타자화
2 경계 밖에 선 그이들: 민중신학과 성소수자
3 늦게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청년, 민중신학과 만나다
4 타자로서의 난민과 환대의 선교

2부 시대를 말하다
1 유혹하는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영성
2 쫓겨나는 민중: 젠트리피케이션과 오늘의 민중신학 3 방법으로서의 통일: 탈분단 상황에 대한 민중신학적 성찰
4 잔여?주체, 포스트휴먼과 마주하다

아포리즘 민중신학, ‘어디로?’: 그 원천을 질문하면서

3부 개념을 말하다
1 왜 고통이 중요하며, 왜 고통이 문제인가?
2 공公과 인권, 촛불의 열망과 더불어 생각하는 ‘공’公의 의미
3 논란의 중심, 민중 메시아
4 민중신학의 성서텍스트론
5 민중신학의 교회론

에필로그 ‘운동의 신학’에서 ‘고통의 신학’으로: 포스트-‘1987년 체제’의 민중신학





패널토의, 나의 한 단락'에서는 차세대 민중신학자들의 현재의 민중신학의 단면을 짚어보고, 앞으로 다가올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 '민중신학'에 기반하여 대안을 제시한다.



최순양, 이화여대


맑스주의 진보론자들이 자본주의라고 하는 틀거리 속에서 억압을 보려했을 때도, 민중신학자들이 남성 민중을 주체로 형상화하면서 여성을 어머니로 읽으려 했을 때에도, 들뢰즈나 푸코가 욕망과 권력으로 전지구적 억압을 보려고 할 때에도 어김없이 그들이 볼 수 없는 사각지대가 존재해왔다.


스피박은 이를 서발턴subaltern이라고 명했고 그들은 타자화 되기가 너무도 쉬웠다. 그들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은 현실화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을 배제하거나 아니면 엉뚱하게 재현하기 때문이다.


그 사각지대는 '여성'이거나 비서구인종 여성이었고 그리고 이제는 패미니즘이 보려 하지 않는 성소수자이다. 쥬디스버틀러는 레비나스를 묵상하면서 얼굴에 반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불확실성은 나에게로부터 출발해서 다른 이들의 불확실성을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만 있는 고유성singularity을 보려 할 때 가능해진다.  




박재형, 기독교사회문화 연구원


아니, 쫓겨나는 이들을 우리는 이제 민중이라 부르려 한다. 그 쫓겨남의 사건은 기존의 이분법적이고 정태적인 민중 이해를 수정하고 민중의 다양성과 생명력을 담보할 수 있는 새로운 이해로 확장하도록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쫓겨남은 단순히 내물리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도시를 포함한 우리의 삶의 공간 가운데 균열을 일으키고 그 균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공간을 만들도록 이끌고 있다.


우리는 이미 다양한 쫓겨남의 현장 속에서 새로운 민중사겅르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쫓겨남의 사건 속에 관여하고 연대함으로써, 새로운 해방 공간이 창조되는 것을 목격해 왔다. 예수의 제자들이 성문밖에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만났듯이 우리는 쫓겨남의 사건 가운데서 민중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쫓겨나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공간으로서 성문밖은 이 시대의 민중 예수를 만나고 그 민중의 메시아적 사건에 참여하게 하는 창조적 균열이며 해방적 공간이 된다. 성문밖 그곳은 도시라는 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그 도시의 가치들로부터 끊임없이 부정당하는 쫓겨나는 민중의 자리platz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적 사건의 공간raum이 된다.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


고정희가 묘사한 것처럼 악령은 우리의 밥그릇 안에 들어낮을 정도로 집요해서 우리를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한다. 악령의 여러 얼굴 중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우리의 얼굴'이다. 거울 속에서 우리의 얼굴을 한 채 우리를 바라보며 서 있는 악령에게 물어본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악령이 대답한다. '나는 너다

 그 순간 우리는 저항할 수도 없는, 도피할 수도 없게 하는 지독한 무력감과 마비감에 휩싸인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악령의 얼굴이 우리의 얼굴이라는 자각이 오히려 희망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유혹하는 악령이 우리의 얼굴을 절박하게 가지려는 이유는 악령은 우리의 동의와 공모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유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혹의 힘은 유혹하는 자에게 있지 않고 유혹당하는 자에게 있다.


유혹을 실현하는 존재는 악령이 아니라 악령들린 자이다. 하비가 '자본축적의 조건들을 재건하고 경제엘리트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로 정의하는 신자유주의의 세력이 상식적인 것으로 믿게 만들어 온 경쟁과 개인주의의 삶의 방식이 비상식적인 것임을 식별하는 순간, 신자유주의는 영원한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지배계급이 강요하고 ㅇ우리가 동의한 특수한 역사적 신년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신자유주의의 악력은 힘을 잃고 떠날 것이다. 우리가 늘 마음챙겨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익상, 성공회대


'잔여-주체'는 보편-주체를 무효화하는 주체, 효력 정지하는 주체다. 보편의 주체화요구를 내파하며 탈주체화하는 역량이다. 포스트 휴먼적 상황에서 이 주체는 자본주의적 인본주의가 그 경계를 험루며 확장해온 보편-주체의 경계면을 따라서 함께 변화한다.


자본주의적 기획 속에서 자연과 초자연과 이들 사이의 매개로서 인공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자 포스트휴먼적 주체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이제 자연, 초자연, 인공물의 3자는 평등한 보편적 인간을 말하던, 말하는 서구의 근대적 인본주의의 인간상 속에서 이 기획의 '벗어남'이 담고 있는 이중성의 결을 따라 포스트휴먼으로 통합되며 집결하고 있다.


이 현상은 일차적으로  비오스적이며, 따라서 조에-생명의 불확정성을 내장하고 있다. 물질적 에너지를 물질, 비물질을 넘나드는 정보로 치환하는 과학기술문명의 시대에 조에 불확정성의 '잔여-주체'는 관계망을 미덕으로 삼는 낭만적인 대응에 안주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기술 문명을 단지 부르주아의 악덕으로 치부하며 윤리적 비판의 대상으로만 다루는 방식으로 민중(사건)을 유지하려 할 수도 있다.


포스트 휴먼적 '잔여-주체'는 과학기술문명의 현실 한복판에서 '연결'과 '벗어남'의 중립적 사용이 불가능함을 폭로하는 한편, 민중(사건)의 지평이 과학기술문명을 배제한 채 벌어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주체다.



정용택, 제 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민중신학에서 고통이 중요한 이유는 고통이야말로 민중을 객관화 대상화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와 생성의 흐름 가운데서 우연적이고 비결정적으로 출현하는 '사건' 그 자체로 파악할 수 있께 해주는 경험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민중 신학이 민중의 고통을 주체, 보다 전통적인 어법으로는 '고난의 담지자'라 규정해왔다는 것은 새삼 재론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민중신학의 역사적인 민중을 고통당하는 이들로 규정짓는 것 자체는 단 한번도 논란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적고통의 관점에서 민중을 이해한다는 것은 민중론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첫째 '우리는 어떤 인간의 삶은 다른 이들의 삶보다 더 취약하고 따라서 어떤 인간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보다 더 큰 슬픔이 되는 그런 조건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런 조건에 반대할 수 있다'_주디스버틀러_는 사실이다. 민중신학에서 민중은 바로 이러한 조건에 놓여 있는 주체를 가리킨다.


제도적 틀 안에서 규범적 기대와 어긋나는 현실의 문제들은 그야말로 폭력으로 인지, 지각, 체험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상재덕으로 취약한 조건에 놓여 있는 어떤 사회적 존재의 이름이 '민중'이라는 것이다. 다른한편으로는,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상처에 대해 성찰하고, 상처를 배포하는 매커니즘을 찾아내고, 튼튼하지 못한 성긴 국경, 예기치 못한 폭력, 탈취, 공포 때문에 누가 어떤 식으로 고통을 겪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 사회적 고통은 민중적 존재의 삶, 즉 사회적 고통에 더욱 취약한 존재의 삶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작동 원리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띠라서 민중은 사회적 고통에 특히 취약한 삶, 도는 그런 삶을 사는 존재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사회의 구조와 제도에 관행들 내부의 균열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민중은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가 사회 자체에 대해 갖는 내적인 차이, 사회가 사회 자체의 규범이나 규칙, 이데올로기, 정당성과 갖는 자기모순을 지시하는 기표이다.





제도, 마음

민중신학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제도와 국가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 이러한 구조에서 민중은 어떻게 탄생하고 하나님은 그 민중들의 고통에 어떻게 답변하시는가?이다. 고통에 대해서 민중은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적이다. 그 말은 사건 안에서 민중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일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관계가 생기고, 그 관계에서 민중은 소수자, 소외받는자,얼굴이 없는자, 목소리를 낼 수 없는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라도 민중이 될 수 있고, 소외자가 될 수 있다.



민중신학, 어머니


민중신학이 가지고 있는 제도적 대립각은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민중'의 탄생에서 가장 취약한 '어머니'에 대한 담론까지 발생하는 안병무 선생의 관점이 민중신학의 해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머니는 사실 유교적 전통에서는 자본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도도 큰 변수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는 두가지 모두에서 소외당하는 자, 배제받는 자, 서발턴과 하위주체, 혹은 잔여주체가 되는 존재이다. 민중신학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어머니'의 주체성에 대한 담론에서 확대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민중, 제도


제도가 변경되면서 바뀌어가는 민중들의 개념이 달라진다. 제도가 사람을 만드는가? 아니면 사람이 제도를 만드는가?라는 고민은 계속해서 이야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고통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제도를 잘 만드는 것과 사람이 바뀌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것은 계속해서 '민중신학'에서 다루어져야할 논제일 것이다. 제도의 악함이 이제는 문화를 넘어서 하버마스의 이야기처럼 삶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민중신학, 대안


앞으로 민중신학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에토스는 '민중이 곧 예수다, 예수는 곧 어머니다'라는 민중메시아와 어머니메시아에 관한 논제이다. 사회적인 문제로 발전했던 시대적 상황이 지나가고 포스트휴먼시대에 민중신학은 어디로 갈 것인가? 민중신학이 가지고 있는 운동성을 어느정도 상실한 지금, 민중신학의 운동성을 다시 살리는 것은 현대사회의 민중들이 처한 다양한 고통에 대응하는 것이다.


근로자, 노동자, 성소수자, 여성, 노약자, 외국인노동자, 제도적인 희생자, 국가안보와 연결된 희생자들, 생태적으로 개발에 따른 희생의 주체들 말이다. 이들에게서 보여지는 민중신학의 핵심은 '잔여-주체'로 남겨진 민중들이 사실은 미래의 대안과 과거의 생명을 담지한 주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인데, 이러한 주체를 기억하고 운동해서 다시 살리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정의를 다시 제시하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안으로 공동체와 생명과 생태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민중들의 신학의 뜻처럼, 우리들 사이에 흔하게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한 논의들이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히브리미학, 민중신학


히브리미학의 특징은 위에서 내려오는 빛이 아니라 땅에서 솟아나는 빛으로 인해서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에 있다. 민중신학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중들이 발 딛고 살고 있는 삶의 중심은 바로 땅이고, 땅에 심기운 민중들의 삶이 바로 빛이 되는 것이다. 고통의 문제와 가난의 문제까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미학적인 상징이 현장으로 뚫고 나오는 지점일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민중신학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바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소외의 문제만이 아니라 어머니 안에서 보여지는 사랑의 근본적 모습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토론회에서는 크리스테바의 모성애와 예수의 대한 이야기 혹은 경계와 아브젝시옹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야하지 않을까?


주체를 설정할 때 '소외의 주체'가 아니라 '사랑의 주체'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보는 법의 교육은 바로 인식론에 대한 것인데, 메시아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존재성은 소외이전에 생명과 사랑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민중신학이 가져야한 미래의 대안은 고통에서만 끝나는게 아니라 사랑으로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는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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