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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Dec 23. 2018

하나님과 선교

선교신학의 도전 발표회_기아대책

6개월전부터 선교신학의 도전이라는 책을 공부했다. 기아대책 간사님들과 함께 선교의 큰 흐름을 찾아서. 그리고 발표회를 가졌다. 많이 오지는 않았지만 담당팀에서와서 깊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제 시작이다. 시작. 나는 3장을 맡아서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을 정리하였다.




20181220_기아대책 COP 발표회

3장_선교의 정당성_하나님의 선교


들어가기


기독교선교의 존재론은 다음과 같은 도전을 받고 있다.


사회종교적 도전 : 사회적으로 배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종교는 배척되어야 한다.

인식론적 도전 : 모든 시대에 유효한 보편적 진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역사적 도전 : 기독교 선교는 식민주의, 서구제국주의, 자본주의, CIA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인류학적 도전 : 선교사들은 기존의 전통문화를 파괴한다.

윤리적 도전 : 기독교 선교는 종교적 이름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인간의 고통을 심화시켜왔다.

심리학적 도전 :  근본주의적인 종교적 확신은 심리적으로 위험한 느낌을 주며 영원한 심판이라는 이미지는 공격적이다.

실용주의적 도전 : 오늘날 모든 나라에 그리스도인이 있고 선교사들은 더이상 선교목적으로는 필요하지 않다. 그저 긍휼사역이나 경제개발 정도에 참여하는 것이 맞다.


기독교 선교는 모든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는 주시다”라고 고백하도록 촉구하며 모든 권위를 그리스도 안에 둔다. 이러한 근본적인 선포는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자체를 완전히 다른 지평에 놓는다. [선교적 선교의 중심 전체는 하나님의 실재이다. 창조자, 보존자, 구속자, 심판자_Lamin sanneh(1989, 158)]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헌신으로 초청하기 위해서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하는 선교사역은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다음과 같이 우리가 하는 선교의 정당성이 어디로부 터 오는지 알아보자.






1.우주적계획을 가지신 우주적 하나님


선교의 정당성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자신의 인격, 계획, 성품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한 개인의 개별화되고 짜맞추어진 신앙 대상인 개인적 신으로 축소될 수 없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 창조자로서의 지위, 통치, 인간에 대한 주장, 열방과 지구에 대한 주건, 다른 영적 권세들에 대한 우월성, 구속의 계획에 있어서 우주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피조계를 향한 우주적 의지와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말씀하신다. 모두가 하나님을 거역해서 영원한 처벌을 받을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우주적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궁극적으로 타락한 피조계를 새롭게 하고 만물을 자신의 주권 아래에 두어 자신의 우주적 나라를 확립하려 하신다.


구원의 베과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모든 나라, 인종, 언어집단, 세대, 남녀 부자와 가난한 자들에게 다 확산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주적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이며, 그것이 우주적 선교의 영역을 궁극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기독교선교는 하나님 자신의 선교와 조화되는 한 우주적 정당성을 가진다. 마태복음 28장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상명령에서 우주적인 영역까지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라비안의 지도자였던 니콜라스 루드비히 폰 친젠도르프 백작은 첫 번째 중요한 개신교 선교운동을 시작했는데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근거해서 선교를 정당화했다.



2.우주적하나님이 구체화되다


하나님의 우주성은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in particularity 구현된다. 우주적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의 시공간이라는 구체적인 여건 속에서 구속적 활동을 통해, 기적을 행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역사해오셨다.


우주적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으로 드러난다. 다윗왕을 통해서 우주적인 왕의 상징을 전해 듣게 된다.


우주적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 속에서 친히 구체화되셨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인간이 되셨고, 구체적인 장소, 구체적인 밤, 구체적인 로마 통치의 정황, 구체적인 유대 환경 속에서 태어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_요한복음 1장 14절]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역사속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인간 역사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신약성경의 언어는 명확하게 나사렛 예수를 구약성경의 야훼와 동일시한다.(C. J. H Wright 2006, 105-35)


[따라서 이 물질적이고 물리적이고 역사적인 세계는 시간을 넘어선 우주적 본질의 창백한 반영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과 종말론적 미래의 일부분이다_Roxburgh 2000, 187] 선교는 이 이야기를 각 민족과 각 개인의 이야기로 불러오며, 각각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영원한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에 연결함으로써 이 이야기에 영원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3.하나님의 선교로서의 선교_하나님의 선교



1)신적 특권으로서의 선교


선교를 제자화라는 명령에만 근거에서 바라보게 되면 명령을 지키는 ‘인간의 순종’에 중점을 두게 되고, 이것은 인간이 그 성취를 취하게 되는(소위 말하는 ‘전도왕대회’) 문제가 발생한다.


[선교는 하나님의 마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하나님은 보내는 사랑의 원천이시다. 이것은 가장 깊은 선교의 근원이다. 그보다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기때문에 선교가 있다_David J. Bosch(1991, 392) ]


20세기 중반에 선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일어났다.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라틴어, missio Dei)로 이해되었는데, 이는 곧 선교는 신적 주도권과 특징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관점이다. [우리는 그 본질에 있어서 오늘날 선교의 토대가 되고 있는 하나님을 만난다. 선교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선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성품 자체가 선교이기 때문이다_Gnanakan 1989, 67)]


선교는 하나님의 자기 이해이며,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교사 하나님이시며, 선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의 보내시는 활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신 말씀에 있다. 하나님의 보내시는 의지가 성자 하나님의 보내심에서 실현되었듯이 이제 예수께서 교회를 보내시는 것이다.


선교를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근거를 두는 것은 선교에 대한 이해를 하나님의 보내시는 성품과 특권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2)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발전


성부의 성자를 보내심, 성부와 성자의 성령을 보내심을 섦여하는 ‘신적선교’의 신학은 어거스틴에 의해서 개발되었고, 토마스아퀴나스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교회의 보내심에 대해서는 강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세기 진젠도르프는 선교를 교회의 활동으로 묘사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선교의 주’로 간주하면서 그가 주권 가운데서 성경을 통해선교의 시대를 시작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1889년에 선교대변인 A.T 피어슨은 선교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로 주장하는 글으 ㄹ썼다. 20세기 초반 구스타프 바르넥은 가장 ‘근본적인 선교의 교리’를 하나님의 선교로 주장하였다.


1932년 영향력 있는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선교의 토대를 교회론, 구원론, 혹은 비교종교학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활동에 둘 것을 촉구하였다. 칼 하르텐슈타인은 바르트의 영향을 받아, 1934년 이 사상을 발전시켰다.


1952년 독일 빌링겐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에서는 하르텐슈타인이 대회보고서에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사용하였다. 빌링겐대회의 특징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기독교 국가에서 벌어진 수 많은 선교에 대한 문제들(들어가기에서 본 여러가지 도전들)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도출했다. 그 해결책은 선교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에서 발견되었는데, 하나님의 성품과 주도권이 인간을 선교에 중심에 놓는 것을 대체했다. 인간의 의도보다 ‘신적 의지’가 선교의 핵심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하르텐슈타인은 대회 보고서에서 [성경의 능력을 통해 우주를 화해시키려 성자을 보내심은 선교의 기초요 목적이다.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에서만 나온다. 따라서 선교는 구속 역사와 하나님 구속 계획이라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폭넓은 골격 속에서 위치하고 있다_Richellbacher 2003, 589-90] 라고 기록하였다.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의 실질적인 의미는 다음의 세가지 방식으로 분화 되었다.


독일 : 하르텐슈타인과 발터 프라이탁으로 대표되는 독일인들은 종말론적이고 구속사적으로 접근했다. 선교는 두 번에 걸친 그리스도의 오심 사에서 역사상 일어나는 하나님의 활동이다. 복음이 열방에 선포될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재림하실 것이다.


 네덜란드 : J.C 호켄다이크로 대표되는 화란인들은 하나님의 선교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으로 보았다. 선교는 세상을 섬기기 위한 세속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이다.


미국 : 여전히 사회복음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던 미국인들은 교회는 현재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역동에 반응하고, 개인적 , 사회적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주장했다. 빌링겐 대회에서의 미국 보고서는 선교 과업의 중심적 요소는 영혼 구원이 아니라, “삼위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하셨고, 하고 계시는 일에 대한 교회의 민감하고 전적인 반으”이라고 주장했다.


비세덤은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God1958)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염두에 두신 모든 것, 즉 구속의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충만함을 하나님의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제공된다.이것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다른 나라에서 옮겨진 사람들이 다시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_Vicedom 1965 ]


하르텐슈타인과 프라이탁의 죽음으로 독일의 관점보다는 화란과 미국의 관점이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의 주가 되었다. 하나님의 해방 행위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관점이 강해지면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이해하게 되었다.


호켄다이크에게서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 중에 하나였고, 교회나 복음 없이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실 수 있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많은 선교사님들이 화란의 철학과 신학을 자유주의라고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관점은 1968년 스웨덴 웁살라 WCC총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것이 해방신학에 반영되었다. 방콕에서 열린 1972년의 선교와 전도위원회(CWME : 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에서 정점에 달한다.


나치의 경험으로 정치신학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독일인들은 하나님의 선교를 세속화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며, 이 세상에서는 선교는 임시적인 방편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로 인해서 웁살라에서는 복음주의와 협의회 가운데 긴장이 고조되었다. 하나님의 선교는 그리스도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 은혜, 용서보다 하위에 있는가? 하나님의 선교는 전체 피조계를 향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관심, 즉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선교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하는가?


이후 두가지 관점을 통합하려는 시도도 상황속에서의 선교(Mission in Context)에 담겨지게 되었고, 이에 반해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이 모든 것을 다 담는 ‘쇼핑카트’와 같거나 복음의 본질을 흐리는 ‘트로이의 목마’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4.선교의 삼위일체적 근거


선교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의 역할에 대한 인식은 19세기 초 개신교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빌링겐대회에서 삼위 하나님의 선교에 교회의 선교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63년 레슬리뉴비긴은 ‘오늘날의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 교리’를 저술했다. [교회의 선교가 삼위일체적 모델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그렇게 할 때에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_레슬리뉴비긴 1989]


카톨릭에서 1965년 바티칸 공의회에서 ‘만민에게’라는 저술을 통해서 삼위일체적 선교에 대해서 발전시킨다.



1)성부에 의한 보내심


하나님의 성품은 계속해서 보내시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를 통해서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보내시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들을 성취할 것이다.


성부하나님의 보내심은 항상 목적을 띄고 있다. 보냄이라는 개념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도하셨음을 강조한다.



2)성자를 보내심


(1)공관복음서에서 예수의 보내심


성부께서 예수를 보내신 것은 그가 지상에서 즉각적으로 성부의 대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 예수는 이스라엘로 보냄을 받았다. 예수는 율범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는 분란을 일으키기 위해 오셨다. 예수는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다.



(2)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보내심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께서 영원한 로고스이시고, 말씀이 인간이 되시고,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기 위해, 성부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속으로 보냄을 받으셨다는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수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 성부의 뜻과 일을 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으셨다. 예수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오셨다. 예수는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우해서 오셨다.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는 것이 성부의 뜻이다.



(3)예수의 보내심에 대한 바울의 이해


바울은 성자 보내심이 우선적을 구속의 목적을 위해서라고 해석한다. 성자를 보내심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주어진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성육신의 역사적 본성과 종교적 상황을 강조한다. 구속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이어지는데, 아들로 입양되는 관계로 연결된다. 성부는 구속을 위해 성자를 보내신다. 그런 다음 성령은 신자에게 능력을 부여하고 세상을 확신시키기 위해 보내심을 받는다.



3)성령의 보내심


성부와 성자에 의한 성령의 보내심은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성자의 보내심을 계속한다. 성령의 사역은 성령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로를 증거하면서 계속된다.


성령이 보내졌을 때, 복음은 새로운 능력과 확신으로 전파된다. 성령의 보내심이 교회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통해서 복음은 전파되고 변화를 일으킨다.



4)교회의 보내심


(1)예수의 제자들을 보내심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그들을 보내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서 사역 여행을 하게 하신다.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의 사역을 흉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것과 같은 권위, 활동, 메시지, 대상 집단, 결과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어서 자신의 사역을 완성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었다.



(2)오늘날 교회의 보내심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 오순절이 찾아왔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가 탄생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상명령과 성령의 보내심과 함께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신다. 그들의 보내심의 영역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보내지면서 확대된다. 성령을 보내심과 함께 예수와 원 제자들의 의해 시작되었던 사역은 전 세계로 폭발해 나간다.


교회의 보내심은 성삼위 하나님의 보내시는 활동에 긴밀히 연결된다. 인간의 권위가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의 권위를 통해서 신자들은 세례를 받는다.



5.실천적함의들


1)선교는 하나님의 특권이며 사업이라는 확신


선교의 성공은 인간의 노력과 전략에 의존한다는 교회의 인식에서 자유롭게 해 준다. 선교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교의 첫번째 함의이다.(Vicedom 1965)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선택하거나 고안해낸 사업에 가담한 것이 아니다. 우니느 창조 자체의 중심 의미인 하나님의 한 활동에 참여하도록 초청받는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 성자 성부에 대한 사랑의 순종에 참여하는 자드링 되도록 초청받는다.(Newbigin 1963)



2)우리는 자신있게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


 교회의 선교는 하늘과 땅의 우주적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선교적 의지에서 직접 흘러나오며, 그 앞에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의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려 한다. 이것은 교회로 하여금 담대한 겸손으로 복음을 선포하게 하며, 성경적 진리가 모든 나라, 문화, 인종집단의 남녀들을 위해 유효함을 정당화 한다.



3)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선교의 방법과 메세지 모두에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보내심을 받는다. 선교의 본성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나름대로 창의성이나 영리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선교는 예수의 사역을 계속하는 것이다.



4)선교는 성령의 능력에 의존하는 가운데 수행되어야 한다.


선교의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은 성령님이다. 세계복음화는 신적 사업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위대한 선교자이시다. 성령께서 그 일과 일꾼들을 지배하실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과업에 있어 성공을 바랄 수 있다는 것이다.(John R. Mott 1910)



5)우리는 우리의 선교에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하도록 격려를 받고 영감을 받을 수 있다.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는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됨으로써 역사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 선교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그 자체가 세상 속에 보내진 것이며, 성부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의 선교를 지속하는 것이며, 하나의 기관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땅 끝까지 보내심을 받은 원정대라는 진리가 새로운 생생함으로 이해되었다.(Newbigin 1963)






민네이션, 생각


‘사람을 보내는’ 이라는 문구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보내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에서 ‘보낸다’라는 단어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기아대책은 공동체에 하나님이 잠재력을 개발하기 위해서 ‘사람, 자원, 아이디어’를 보낸다. 사람은 기대봉사단이 되고, 자원은 돈과 물질이 되고, 아이디어는 voc에 대한 아이디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미션을 주셨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였다’라는 것은 보내시는 하나님의 미션에 응답해서 현장으로 간다는 것이다. 우주적인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기아대책의 구체적인 사업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현장에 계신다. 이미 현장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현장에서,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삼위일체의 사역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야하는가?에서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이 오신다고 말하고 있다. 삼위가 보내시는 사역을 하면서 스스로를 보내기도 한다고 말이다. 이러나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들은 ‘종말론’과 ‘윤리론’에 대한 약화를 가지고 온다고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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