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대한 복음주의적 평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에 대한 복음주의적 평가
Appraisal of ‘Missio Dei’ in Evangelical Perspectives / 이현모 교수_침례신학대학교 선교학
들어가는 말
Missio Dei라는 용어가 등장한 지 80년이 넘어간다. 그간 Missio Dei 개념의 수용여부가 에큐메니칼 선교신학과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구분선이 되었다. 그러나 Missio Dei를 수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것은 “예”, “아니오”의 단답형으로 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몇 가지 중요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교회 중심, 그리스도 중심, 칭의론 중심, 영적 중심, 개인 중심 등이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복음주의 신학에서 타당성과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다만 이 중심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중심주의가 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지속적인 창조적 긴장 가운데 신학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복음주의가 수용해 왔던 missiones ecclesiae는 지상위임령을 위임받은 교회를 강조한 장점이 있지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선교의 주체 세력이 하나님이심을 간과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Missio Dei라는 개념을 평가해 보도록 하겠다.
1. Missio Dei 개념의 탄생과 변천
Missio Dei 개념은 모든 인간의 행동에 선재(先在)하는 actio Dei를 강조하면서 선교를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의 동참으로 규정하여, 당시의 다른 세속적 근거와 단절시키려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변증법적 신학에서 근거한 것이다. 이를 이어 받아서 칼 하르텐슈타인(Karl Hartenstein)은 선교를 삼위일체적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선교를 순수한 인간 활동의 영역에서 근본적으로 제거시켜서 하나님 계시의 양도할 수 없는 지침인 하나님의 뜻과 행동으로 규정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르트의 선교신학이 미친 영향력의 절정은 IMC의 빌링겐 대회(Willingen, 1952)였다. 이 대회를 거치면서 선교는 교회론이나 구원론의 개념을 벗어나서 삼위일체의 맥락 속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이는 선교를 철저히 하나님의 본성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론이나 구원론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를 보내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낸다는 삼위일체적 개념으로서의 선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교회를 세상에 파송한다는 개념과 연결이 되었다.4) 또한 exitus로서의 삼위일체적 선교개념은 성육신하고 죽으신 그리스도와의 연대로서의 선교와 밀접한 관계를 인정하고 있었다.5)
그러나 빌링겐 대회는 Missio Dei의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교회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움직임이 등장했다고 보인다. 그래서 요하네스 아하르드(Johannes Aagaard)는 빌링겐이 선교사상에 대한 바르트의 영향의 완성으로 간주되면서 동시에 결정적, 통일시키는 힘으로서의 바르트 영향의 종식의 시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6) 호켄다이크(J.C. Hoekendijk)가 등장하면서 Missio Dei는 점차 교회를 완전히 배제하는 개념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호켄다이크에게 Missio Dei는 하나님이 그 자신을 ‘표명’하는 데 있어서 아무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7) 심지어 호켄다이크는 Missio Dei와 인간의 선교를 동일한 개념으로 주장하고 “교회 안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하나님은 비신자들까지를 포함해서 당신의 일을 하므로 세상의 모든 인간의 노력과 활동이 결국 하나님의 선교라는 주장이다. 호켄다이크는 기독교 신앙은 오늘날의 사회적인 도전과 현실의 목표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구원’은 마침내 세상 역사 자체 안에 나타나는 ‘샬롬’이라고 정의했다. 이 샬롬은 하나님과 또 이웃과의 관계에서 발견되고 성취되는 것이며, 이 ‘샬롬’이 구원이고, 이 ‘샬롬’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곧 선교라고 주장하게 되었다.8) 오늘날의 Missio Dei를 중심으로 하는 선교개념은 더 확대되면서 극단적인 정치투쟁의 참여에서, 연대성을 중심에 두고 확대하려는 코이노니아 개념,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적 구원론을 벗어나려는 시도, 교회를 배제하려는 그룹과 교회를 제한적 참여의 수준에 머물게 하는 그룹 간의 문제, 인권 문제, 생태계 신학과 반세계화 운동까지가 모두 Missio Dei를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
2. 복음주의적 관점에서의 평가
이런 다양한 Missio Dei 개념의 흐름들을 분석해 보고 복음주의 선교학의 수용 여부를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1) 교회론 중심의 평가
우선 교회를 배제하거나 소극적 역할로 보는 저(低)교회론을 근거로 하는 선교개념은 ‘교회를 본질상 선교적’이라고 보는 에밀 부르너(Emil Bruner)나 가톨릭 Ad Gentes의 개념에 영향을 주었고 반대로 영향을 받기도 했다고 보인다. 스티브 베반스(Stephen Bevans)는 그의 저서에서 “교회는 궁극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언급으로 교회와 선교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교회의 중심은 교회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과 “죄악된 세상에서 피난처를 예비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언급한다. “결국 죽음의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에서 구원의 작은 널빤지 역할을 하는 곳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Lumen Gentium을 해석하는 오토 세멜로스(Otto Semmelroth)도 “교회는 일시적이고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교회관은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표현들이다. 이런 저(低)교회론은 ‘본질상 선교적’이라는 개념에서 유래된다.
‘본질상 선교적’이라는 개념은 조심스러운 분석을 요한다. 우선 교회가 선교적 사역을 감당할 때 비로소 탄생하는 존재라는 논증은 유효하다. 다만 ‘선교적’이라는 말의 의미에서 미묘한 차이점을 발견한다. 복음주의에서 의미하는 ‘선교적’이라는 말은 교회의 궁극적 사명과 목적이 복음전파를 통한 영혼 구원이라는 선교 사명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에 위임된 사명(mission)이다. 교회는 복음 전파를 중심으로 한 이 사명을 위임받은 주체라고 본다. 단순히 교회를 구원받은 자들의 예배 공동체로만 인식하고 선교는 이 예배 공동체를 확장시키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복음주의 교회관은 구약의 성전(聖殿) 개념과 교회를 혼동하고 있는 부족한 교회관이다. 그러나 Missio Dei를 지지하는 가톨릭이나 개신교 에큐메니칼 그룹에게 ‘본질상 선교적’이라는 말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인다. 과도히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이는 영혼을 구원시켜서 교회로 데려오는 활동이 교회론의 중심이 되는 것을 반대하거나 큰 비중을 두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서는 안 되며 교회는 단지 세상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도구라는 면에 유일한 강조점을 두거나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하는 존재라는 주장이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일은 많은 경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보냄을 받은 자로서 참여할 뿐이지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어 들이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순례자로서-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동안만 필요한 존재이지 목적지에 도착하면 더 이상 순례자는 없는 것처럼- 불필요한 존재라고 보기 때문에 “교회는 궁극적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교회는 자신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되므로 웁살라 보고서에서는 “타자를 위한 교회”, 혹은 “세계를 위한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적으로 현 세상에서의 성취로 보는 견해에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마태복음을 근거로 많은 학자들이 현세적 하나님의 나라를 주장하지만, 마태복음에서 핵심적으로 천국 개념을 진술하는 13장을 살펴보면 현세적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적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이중 현세적 천국 개념은 씨 뿌리는 비유(마 13:3-9)와 겨자씨 비유(마 13:31-32), 누룩의 비유(마 13:33) 등 3개이고 종말론적 심판을 포함하는 천국 개념은 가라지 비유(마 13:24-30)와 물고기 그물의 비유(마 13:47-50)이며 부분적으로 밭에 감춰진 보화(마 13:44)와 좋은 진주의 비유(마 13:45-46)라고 하겠다. 예수의 천국 개념은 현세적인 측면과 종말론적 측면, 분명한 악에 대한 심판의 개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는 극단적인 에큐메니칼 그룹과 근본주의 그룹 양자를 향한 교훈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소멸되는 존재가 아니라 완성되는 존재이다. 요한계시록 7장 9절의 무리를 완성된 교회로 보는 것이다.
에큐메니칼의 Missio Dei가 영혼을 구원시켜서 교회로 데려오는 활동에 반대하는 핵심 이유는 이럴 경우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동일한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애버리 둘레스(Avery Dulles)도 “교회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아니지만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되지도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선교적 교회론을 강조하는 콜롬비아 신학교의 석좌교수인 데릴 구더(Darrell L. Guder)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는 본질적 Missio Dei와의 관계에서 교회를 ‘증인’으로 정의했다. 증인이라는 개념은 구속적 메시지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두 개념을 연결해 주는 열쇠가 된다. 복음주의 교회는 ‘증인’이라는 사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구속사의 존재를 세속사와 구분해서 보느냐 아니면 구속사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일부 에큐메니칼 신학은 철저히 구속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복음주의 신학은 성경의 이야기는 세속사 중 유대 지역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분된 구속사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사실 검증의 대상이 되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구분된 구속사를 부인할 경우 어거스틴과 안셀름, 마틴 루터를 근거로 내려온 복음주의 신학의 근본은 폐기되지 않을 수 없으며, 다원주의 문제를 포함한 종교신학이나 문화에 대한 문제 등에 전혀 새로운 문을 열어주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가장 심각한 것은 구원의 개념이 전혀 다른 장(場)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견해를 수용할 경우 구원이란 점차 하나님의 나라 구현이 된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인간의 성취를 기대하는 이레니우스의 신학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인간은 타락하여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가 아니며 스스로 발전 개혁을 할 능력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이 계속해서 성장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기까지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과 사랑을 보여주는 의미라고 보게 된다. 이 점에서 물질과 영을 구분하는 이원론 개념은 없어진다. 물질과 영이 구분되지 않으므로 영혼의 구원이라는 개념도 당연히 의미를 잃게 된다. 또한 인간을 창조의 중심이라고 보기보다는 창조의 한 구성요소로 이해하게 되므로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생태계 관심 혹은 생태적 정의(eco-justice) 또한 구원의 영역에서 다루어야 하는 주제가 된다.
복음주의 교회관은 양 측면을 가진다. 교회를 구원받은 자들의 자발적 공동체라고 볼 때 이는 저(低)교회론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실 복음주의에서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의미하지 교회와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가톨릭은 고(高)교회론이었다. 그러나 선교의 관점에서 에큐메니칼의 Missio Dei 주장에 비교해 볼 때는 교회의 역할과 존재를 높게 보는 고(高)교회론을 지지한다. 구속사관을 견지하는 한 구속의 역사에서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대리인 혹은 증인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구속의 역사를 제외한 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의 보존에서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해야 하지만 대리인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까지는 할 수 없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삼위일체적 개념, 구원론을 중심으로 하는 본질상 선교적 성격은 복음주의 선교론이나 교회론이 지지하는 바이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교회론과 구속론, 기독론의 삼중대화를 중심으로 한 선교의 정의를 견지하면서 동시에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질에 기인한다는 측면의 삼위일체론과 보냄 받은 타자로서의 교회론을 위의 대화의 범주 안에서 제한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보쉬는 자신의 저서에서 “우리가 다시 좁고 교회중심적인 선교 견해로 되돌아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라고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우리의 교회론이 넓어져야 할 필요는 긍정하지만 전적으로 보쉬의 교회개념을 수용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복음주의의 교회관은 구원받은 자들의 예배공동체만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타자성이나 선교적 본질을 약화시키거나 무의식중 배제시킴으로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는 교회가 가지는 공적 측면을 너무 간과하고 신앙의 사유화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가 비판한 개신교 교회론은 일리가 있다. 판넨베르그는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이라는 책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주로 그 자신과 경건과 그 지체들의 구원에 관심을 둔다면 이는 대부분 왜곡된 개념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 참된 의미가 종교적 연합의 사유화된 관념을 피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974년 로잔 선언문 발표 이후로 꾸준히 이런 약점을 보강하고 있지만, 한국교회의 상황을 보았을 때 교회의 선교적 본질 회복은 아직 약하다고 평가한다. 짧은 시간 내에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국가가 된 한국교회의 선교적 본질이 약하다는 말은 모순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제 한국교회 선교는 이런 교회론의 약점으로 인해 기초가 허약하다고 본다. 다만 교회를 배제하지 않는 신학의 고수는 강점으로 보인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도 구속사적 차원에서의 교회의 위임령을 인정하면서 어느 정도 교회의 타자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신학적 근거가 한국교회 선교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는 이미 로잔 선언문에 포함되어있는 것이고 1989년 마닐라 선언문에서 재확인된 사실이다. Missio Dei라는 용어를 사용하던 사용하지 않던 간에 복음주의 신학에서 교회와 구속 중심의 제한적 Missio Dei 개념은 이미 인정되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보쉬가 자신의 「변화하고 있는 선교」의 마지막 페이지에 사용한 표현이 우리의 의도를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선교는 그 안에 missiones ecclesiae를 흡수하기를 추구하는 Missio Dei이다.”18) 혹은 동일한 개념을 역으로 표현해서, “선교는 그 안에 Mission Dei를 흡수하기를 추구하는 missiones ecclesiae이다.” 또한 최근 Missio Dei 신학이 확장되면서 등장하는 생태계 신학이라든지 인권이나 문화에 대한 신학 등에서 복음주의도 건강한 신학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2) 삼위일체론 중심의 평가
점차 서구 신학에서 삼위일체적 접근이라는 용어가 인기를 끌고 있다. 필자가 복음주의 계열이 아닌 다른 신학을 이해하려 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이 ‘삼위일체적’이라는 개념인 듯하다. 점차 이 삼위일체적 개념은 초기 사용자인 칼 바르트나 하르텐슈타인, 복음주의적 개신교의 이해와는 거리가 있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오늘날 다양한 비복음주의 계열의 신학자들이 삼위일체적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날 복음주의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에큐메니칼 개신교 간의 긴장에는 항상 이 ‘삼위일체적’ 이라는 개념의 이해 차이가 있다. 긴 개념은 오히려 초점을 흐리게 하므로 필자는 과도히 단순화시킨 이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로마 가톨릭이나 에큐메니칼 개신교의 일부에서 주장하는 ‘삼위일체적’이라는 의미는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라는 요구로 보인다. 즉 구세주로서 십자가에서의 죄 용서와 회개를 요구하는 복음주의의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세상에서의 섬김과 관계를 더 중시하는 방향을 표현한 것이 ‘삼위일체적’이라는 개념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과도히 단순화한 해석은 취약한 부분이 있다. 모든 가톨릭이 이런 관점의 삼위일체적 개념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Missio Dei 개념의 바탕을 이루는 이런 삼위일체적 접근 개념은 선교의 방향과 목표, 정의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로서 섬김을 위한 삼위일체적 개념은 교회론에서도 코이노니아라는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코이노니아론은 교회를 기독론적 측면에서 보는 것에서 방향을 돌리게 하려는 Missio Dei적 시도로 보인다. 몰트만(Juergen Moltman)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론을 주장할 때 이는 교회를 기독론의 입장에서 벗어나서 창조론에 근거해서 보게 하는 변화라고 보인다.21) 즉 삼위일체적 이해와 병행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코이노니아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교회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논리적 지적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상치되는 개념조차도 코이노니아라는 이름 하에서 에큐메니칼의 일치 모형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교회의 특징은 점차 코이노니아를 확대시켜가면서 다원주의적 차이점까지도 포용적 태도로 수용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때로 논리를 넘어서는 상황에서는 신비주의가 주목 받게 되는데, 최근의 에큐메니칼 그룹의 삼위일체적 접근 주장들은 정교회의 신학에서 영감을 받아 온 듯하다.22) 정교회는 공동체에서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근거로 성부와 성자, 성자와 성령, 성령과 성부 간의 상호개방성을 지지하고 있다.
오늘날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와 ‘삼위일체적’ 사고가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요소는 대립이기도 하지만 각기 신학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바라기는 이것이 상호 배타적인 주제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극단적인 견해에서 이 두 개념이 다른 방향을 지향하기 때문에 동시 포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립만을 보지 않는 온건한 측면에서의 신학적 절충도 필요하리라고 본다. 복음주의가 지나칠 정도로 그리스도 중심성을 붙잡은 결과 실제 삼위 하나님의 개념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이라는 측면은 간과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십자가의 대속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개념을 버리지 않는 면에서 바르트의 초기 삼위일체적 개념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이지만 삼위일체 개념을 생각해야 하는 좀 더 실제적인 이유는 복음주의 자체에서도 세상에 대한 책임을 좀 더 강조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굳이 삼위일체적이란 표현을 사용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으나 타자성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파송하는 자와 파송 받는 자로서의 삼위일체적 개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맺는 말
필자는 교회는 본질상 선교적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동시에 그 말이 내포하는 교회를 배제하는 Missio Dei 개념에는 단호히 반대한다. 교회는 증인으로서 선교 공동체이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 구현에 참여하는 것은 분명한 교회의 사명이고 선교임에 동의한다. 복음의 하나님 나라적 측면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 구원은 아니다. 이 둘 사이의 구분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복음주의에서 교회는 좀 더 타자적 성격을 포함해야 하지만 결코 중요하지 않은 존재는 아니다. 증거하는 선교 공동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일은 교회의 존재 자체여야 한다. 그러나 복음주의 교회가 은연중에 하나님의 나라 성장(Kingdom Growth)보다는 자기 교회 성장을 중심으로 선교를 생각하는 교회론은 배제되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혼동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신약의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거나 구약의 성전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교회는 겸손히 선교하기 위해 존재하는 선교적 공동체일 뿐이다. 또한 삼위일체적 접근은 선교의 근원을 분명히 해주는 이점이 있지만 결코 그리스도 중심성을 배제하는 삼위일체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핵심으로 하는 그리스도 중심성을 유지하면서 삼위일체적 접근을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보완된 개념의 Missio Dei는 이미 복음주의 안에서도 자리를 잡고 있다고 본다. 다만 에큐메니칼 그룹과 복음주의 그룹 양자가 서로의 차이점보다는 공유해야 할 면의 면적을 넓혀가는 노력은 여전히 필요하다.KM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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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모 교수는 침례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이고, 침례신학대학교 선교대학원 원장을 맡고 있다.
제롤드 슈와르츠(Gerold Schwarz)는 Missio Dei라는 용어를 처음 제조한 사람은 칼 하르텐슈타인(Karl Hartenstein)이고 시기는 1934년이라고 주장한다. Gerold Schwarz, “Karl Hartenstein 1894-1952, Missions with a Focus on ‘the End’,” in Gerald Anderson eds., Mission Legacies: Biographical Studies of Leaders of the Modern Missionary Movement (Maryknoll: Orbis Books, 1994), 591-3. 그러나 하르텐슈타인은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의 추종자였고 그의 선교개념은 철저히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다. 하르텐슈타인이 1928년에 쓴 What Does Karl Barth’s Theology Have to Say to Mission? 이라는 글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의 선교신학을 Missio Dei의 근거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대략 1930년 전후를 기원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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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에르마허가 이미 이를 잘 지적했다. “개신교는 교회와 개인의 관계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종속하게 만드는 반면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와 개인의 관계가 교회와의 관계에 종속하게 만든다.” Friedrich Schleiermacher, The Christian Fait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103.
David Bosch, 「변화하고 있는 선교」, 581.
이 글에서 판넨베르크는 사실 예수의 관심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장의 문맥에서 이를 주장하는 것이지만 신앙의 사유화를 경고하는 그의 주장은 복음주의 신학에서도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Wolfhart Pannenberg. “The Kingdom of God and the Church,” in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9), 75. 재인용 Stephen Bevans,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 621.
David Bosch, 「변화하고 있는 선교」, 763. 이것이 데이빗 보쉬의 선교에 대한 최종 결론은 아니다. 보쉬는 포괄적 개념의 선교를 지지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선교는 미래를 걸고 예수님의 해방하는 선교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것이다”라는 헤링(Hering)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이런 신학자들로서는 유겐 몰트만과 해방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 다니엘 미글리오리, 소브리노, 여성해방 신학자인 엘리자베스 존슨, 케더린 라쿠냐,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삼위일체적 접근을 주장하는 레이몬드 파니카, 가빈 드코스타(Gavin D’Costa) 등이 있다.
Stephen Bevans,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 578-80.
박근원, “머리말,” 한국기독교학회 편 「교회와 코이노니아」, 5.
참조 Vladimir Lossky, The Mystical Theology of the Eastern Church (Grestwood: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