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리쾨르 타자로서 자기 자신_7장 자기와 윤리적 목표
20190308_철학아카데미
폴 리쾨르 타자로서 자기 자신_김선하 교수님
7강_자기와 윤리적 목표
지금까지는 자기성’의 언어적, 실천적, 이야기적 차원을 논의했었다. 오늘부터는 이러한 지평면 윤리성과 도덕적인 차원을 추구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볼 것이다.
누가 말하는가? 누가 행동하는가? 누가 이야기되는가? 누가 책임 전가의 도덕적 주체인가?라는 질문 즉, ‘누가’라는 주체의 문제를 분석을 통해서 우회해보자.
‘좋다’와 ‘의무적이다’는 술어들은 화자의 관련된 담화적 명제, 행위의 문장들, 이야기적 구조들과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행위의 윤리적, 도덕적 결정들이 행위 주체와 맺는 관계는 자기 자신을 향한 회귀의 길에서 새로운 매개로 다루어질 것이다.
경험론 전통에서 흄을 보자. 의무-존재와 존재는 대립되며 이행은 불가능하다. 규정한다는 것은 기술한다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이야기 이론은 행위와 도덕 이론의 접합점에 위치한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덕적 판단이 가정적인 방식으로 실행되는 사유 경험들을 위한 상상적 공간을 펼쳐내는 것이다.
둘 다 좋다고 평가되는 것과 의무인 것처럼 강제되는 것(이중적 의미), 풍속에 대한 직관적 관념으로 귀결되어 있다. 윤리학은 하나의 완성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고 ‘좋은 삶’을 이야기한다. 목표를 가지고 있다. 도덕은 보편성에 대한 갈망과 규범들을 말하고 칸트의 의무론에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산은 윤리학은 목적론적인 관점으로 구분했다는 것이고, 칸트의 유산은 도덕-의무론적 관점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리쾨르의 의도는 도덕에 대한 윤리학이 우위에 있다는 것과 윤리적 목표를 위해서 규범의 틀을 거쳐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 규범이 실천적 궁지들로 이끌 때 규범이 목표에 의존하는 것의 타당성을 확립하려고 한다. 도덕은 윤리적 목표의 제한된 실현만ㅇ르 구성한다. 윤리학은 도덕을 포용한다. 종속과 보오나 성의 관계는 윤리학에 대한 도덕의 궁극적 의지는 이 관계를 강화한다.
목적론적 목표와 의무론적 순간 사이의 유기적 결합을 해보자. 자기성에 대한 검토는 행위에 적용되는 술어의 차원에서 식별, 자기 지칭이라는 차원에서 그것의 복제를 만나게 된다. 자신의 긍정평가에 있어서 윤리적 목표에 부합하고, 자기의 존중은 의무론적 순간에 부합한다.
자기의 긍정평가는 자기 존중보다 더 근본적이다. 자기 존중은 자기의 긍정 평가가 규범의 체제에서 띠는 측면이다. 그 어떠한 확실한 규범도 존중의 즉각적인 실현에 확실한 안래를 더 이상 제시하지 못할 때, 의무의 논리적 궁지들은 자기의 긍정 평가가 이 존중의 원천일 뿐 아니라 방책으로 나타는 상황들을 만들어 낸다. 자기의 긍정평가와 자기의 존중은 성장의 가장 진전된 단계들을 나타낸다. 이것을 자기성을 펼친다고 한다.
목적론적 견해가 이야기 이론이 연장하는 행위 이론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목적론적 관점이 표현되는 것은 행동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평가나 판단들을 말한다. 의무의 도덕에 속하는 의무적 술어들은 구속의 형태로 밖으로부터 행위자에게 강제가 된다. 의무론적 관점이 목적론적 관점에 종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의무-존재와 존재 사이의 괴리는 극복된다.
이번 연구의 범위는 도덕에 대한 윤리학의 우이를 밝히고 규범에 대한 목표의 우위를 확립하는 것이다. 윤리적 목표는 정의로운 제도들에서 타인과 함께하는, 타인을 위한 좋은 삶의 목표이다. 윤리적 목표의 첫째 구성요서는 잘 산다, 좋은 삶(아리스토텔레스), 진정한 삶(프루스트)이다. 좋은 삶이란 윤리적 목표에 대상 자체, 행위의 긍국적 목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의 목표가 뿌리내리는 근본적 정착을 프락시스에서 추구한다. 프락시스에 내재하는 목적론, 좋은 삶의 목표를 원칙적으로 구조화시키는 목적론을 확립하려고 했다.
이야기 이론은 행위의 개념을 확장하여, 계층화하는 프락시스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좋은 삶이라는 관념에서 그것을 윤리적으로 통합시키는 관점이다. 하나의 실천인 직업과 게임, 예술에서 잘 행함에 대한 가르침에 결부된 판단들, 평가적(차후는 규범적) 성격의 판단들이 전개될 수 있는 의미 공간을 여는 것은 구성적 규칙의 개념이 가져다주는 차원이다.
메킨타이어는 ‘훌륭함의 척도들’에서 일정한 실행자 집단에 공통적이고 고찰되는 실천의 대가들과 명인들에 의해 내면화된, 완벽이 이상들에 따라 상이한 결과들에 적용되는 비교 규칙들이다. 실천들은 사회적으로 구성적 규칙들이 확립된 협롱적 활동들이다. 실천적 협동적, 전통적 성격은 성공의 수준과 훌륭함의 정도를 정하는 기준들에 대한 상당히 지속ㅈ거인 합의가 실무자들에 공통되는 문화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척도들과 관련된 논쟁 실행자들 사이의 경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에르곤 ergon인 하나의 기능이나 과업이 있다. 인간의 에르곤은 생활설계인데 각각의 실천이 분명히 해주는 훌륭함의 척도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모든 행동의 하나의 궁극적 목적을 지행 한다고 생각했다. 목적들이 끼워 넣어지는 비밀은 실천과 생활설계 사이의 관계에 있다.
이야기적 통일성에 있어서는 이야기가 행동들에 적용되는 평가들과 인물들 자신의 평가들 사이에 실현시키는 결합이다. 한 삶의 이야기적 통일성이 보장해 주는 것은 윤리적 주체는 이야기에 의해 이야기적 동일성이 부여되는 자이다.
이야기적 통일성이란 모든 이야기에서 마나는 의도들, 원인들, 우연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하나씩 이어가면서 연결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과업을 맡고 있다.
해석의 관념은 의미의 단순한 관념에 누군가를 위한 의미라는 관념을 덧붙인다. 행위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은 행위자에게는 자기 자신을 해석하는 일이다. 인간은 자기 해석적 동물un self-interpreting animal이다. 자기에 대한 개념은 행위 텍스트에 대한 해석과 자기해석의 관계로 풍요로워진다.
윤리적차원에서 자기해석은 자기의 긍정평가이다. 자기의 긍정평가는 해석으 운명을 따라간다. 실천적 판단의 실현에서 해석들 사이의 논쟁, 이의제기, 경쟁, 갈등을 이야기한다. 삶에 대한 이성과 중요한 결정들 사이의 일치추구는 관찰에 토대한 과학들로부터 기대될 수 있는 종류의 검증을 받을 서 없다. 해석의 합당성은 기껏해야 그럴듯함을 넘어설 수 있는 판단의 행사에 속한다.
윤리적 관점의 정의는 정의로운 제도들에서 타자와 함께, 그리고 타자를 위한 진정한 삶의 목표로 한다. 윤리적 목표의 두번째 구성요소인 염려sollicitude는 첫 번째 구성 요소와 연계되어 있다. 반성성은 폐쇄의 위험성이 있으나, 염려가 자기 긍정 평가의 대화적 차원을 펼친다.
나의 평가가 아니라 자기의 긍정 평가가 한결같이 이야기되었다. 자기를 말하는 것은 나를 말하는게 아니다. 자기는 매번 나의 것이다(하이데거). 매번을 토대로 내 경험들이 나의 것이란느 소유는 모든 문법적 인칭들에 배분된다. 이 타자는 또 다른 나alter ego가 아니라 나와는 다른 진정한 타자이다.
능력capacite는 ‘나는 할 수 있다'가 주체를 나타내는 리쾨르의 언어가 된다
상호성의 입장에서 서로 잘 사는 것을 추구하는 ‘우정’의 입장에서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해서 리쾨르는 균형점을 가지고 온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상호주체적인 관계에서 타자의 주도권에 근거를 준다. 타자는 비관계인데, 타자가 얼굴에서 나타남에서 시각과 청각이 벗어난다. 타자는 현상이 아니고 돌연한 현현이다.
타자의 얼굴은 정의의 스승이며가르침을 주고 그것도 윤리적 방식으로만 가리츠니는 스승의 얼굴이다. 살인을 금지하고 정의를 명령하는 자이앋. 이런 명령과 우정 사이의 관계에서 우정의 상호성과 명령의 뷸균형 사이의 대조가 일어난다. 자기 명령에 의해 합류되는 것은 목적격으로서이다. 책임의 부여는 소환된 나의 수동성만을 상대로 한다.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자기로부터 빠져나와서 타자와 함께 경험을 하는데, 이때 타자는 결국 자기 자신이 된다. 이 모든 논의는 레비나스가 너무 타자 중심적으로 갔기 때문에 리쾨르는 평등의 차원에서 우정을 말한다. 우정은 가역성이 있고, 대체 불가능하고, 유사성이 있다. 자기 긍정 평가와 타자에 대한 배려의 교환이 낳은 선물은 나 자신처럼 타자를 존중하자이다.
타자와 서로 마주봄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이것은 더 크게 정의의 범주가 더 넓어진다. 잘-살기는 상호 개인적인 관계에 국한되지않고 더 큰 차원으로 정의는 나아가는데, 그것이 결국 제도을 만들어낸다.
정의는 배려에 포함되지 않은 윤리적 특징들을, 평등을 나타낸다. 정의의 적용점으로서 제도와 정의의 윤리적 내용으로서 평등은 윤리적 목표를 구성하는 세 번째 요소에 관한 연구의 두 초점이 있다. 제도의 의미는 역사적 공동체와 더불어 살기 구조이다.
개인 상호간의 관계로 환원될 수 없지만 배분의 개념이 이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구속적인 규범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통의 관습에 의해서 톡징이다. 이것은 에토스이다. 법률적 체제들과 정치적 조직과 연결된 구속들보다 더불어 살기의 윤리적-우위를 강조하는 행복한 방식이다. 이것은 한나아렌트가 말한 공동의 권력을 지배와 분리하는 거리를 표시하는 것이다.
지배관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공동의 권력이다. 권력은 노동과 작품이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행동의 범주로부터 직접적으로 비롯된다. 행동의 범주는 다원성과 협의하는 조건을 강조한다면, 국가적이란 낱말로 환원될 수 없는 넓은 의미의 정치적 의미를 띤다. 다원성은 대화적 상황에서 제삼자로 제외된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확장시킨다. 권력이 이러한 차원을 부여받은 것은 바로 제도들로부터이다.
좋은 삶은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좋은 삶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내 이야기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를 듣는 것에서 좋은 삶은 추구된다. 타자와 함께 타자를 위하여’라는 슬로건처럼 리쾨르는 변증법을 가지고 나의 이야기와 타자의 이야기가 상승하여 좋은 삶이 된다고 보았다.
이야기를 통해서 ‘나는 누구다~’라는 것을 규정하면, 그 규정에 맞는 행위와 의무가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럴 때 발생하는 것이 자기 존중이라는 의미에서 도덕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자기긍정의 의미에서 윤리적인 입장인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누군가는 자기존중의 입장이 강하고, 누군가는 자기 긍정이 강하다. 리쾨르에게서는 자기긍정이 자기존중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자기존중이 되는 과정에서 자기긍정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존중 안에 good이 들어 있지 않으면 자기긍정으로 옮겨갈 수 없다.
‘증언’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삶의 통합성과 자신이 겪은 경험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해석할 수있어야 한다. 결국 ‘사건-해석-이야기-증언’을 통해서 인간은 주체가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그 인생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이다. 결국 완전히 다른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스스로를 이야기할 때 자신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누군가와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 사람을 이야기할 때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인식이 만들어진다.
우정으로 인해서 사람은 ‘선’을 추구하는 존재가 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친구를 인정하고 그것 자체가 이상적인 것이다.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친구를 좋아하는 것이 행복함의 원인이 된다. 결국 친구와 우정을 통해서 타자의 매가가 실행 능력의 도정에서 만나게 된다. 우정은 좋은 삶의 목표와 정치적 성격을 띤 정의를 중간에서 연결한다.
심리학이 아니라 윤리학에 속한다. 우정은 선택된 숙고 사하들에게 작용하고 아비투스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미덕이며 끊임없이 실질적 발현의 요구를 가지고 있다. 자기사랑은 필라우시아는 ‘행복한 인간은 친구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힘과 행위라는 개념과의 관계 속에서 결여의 매개를 통해 자아에게 자리가 주어진다.
친구라는 것은 더불어살기이고, 좋은 것을 같이 추구하는 것이며, 있는 모습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그 타자와 함께 행복을 추구하는 가운데 정의와 제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뜻한다. 친구는 결국 자기자신이 된다.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은 바로 친구이다.
우리가 용서하는 방식은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하는 것, 정신적인 고양이 필요하다. 성경적으로도 탕감받는 사람이 용서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얼마나 탕감받았는지 잊어버려서이다. 그러나 용서를 할 때 자신이 얼마나 탕감받았는지를 숙고하면 그 사람은 더 높은 차원의 용서를 하게 된다.
리쾨르는 우정에서 ‘사심없음’을 이야기한다. 사심없음은 어떻게 보면 무심함일수도 있지만 이러한 무심함에서 용서와 배려 그리고 우정이 발전해서 정의와 제도가 나온다.
리쾨르가 말하는 것처럼 도덕이 윤리에 포함되는데, 만약에 그 반대가 되면 어떻게 될까? 도덕 속에 윤리가 있는것 말이다. 도덕적인 당위 속에서 좋은 삶이 있는 것들 말이다.
도덕적인 당위는 자기존중을 만들어내는데 만약에 ‘책임전가’가 만들어지게 되면 그 시간만큼 자신을 존중하는 것은 빠져나가는데, 그럼 그 때는 그랬어야 한다는 당위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럼 결국 형식주의, 껍떼기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닌가?
‘우정’이라는 측면을 리쾨르는 필리아를 가지고 왔는데 다른 사람들인 에로스, 아가페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아가페’로 만나기 때문에 좋은 삶과 진정한 삶을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좋은 삶을 만들고 진정하고 정의로운 삶을 만들게 되지 않는가?
이러한 자연스러운 정의로운 삶은 결국 ‘제도’로서 공동체 전체로 확장되는 것이 아닐까?
리쾨르가 이야기하는 대로 타자와의 관계에서 우정을 중심으로 확대되면 ‘제도’가 되는데 악은 상징은 오히려 그것의 반대를 다루고 있는가? 우정과 같이 서로 다른 타자들이 죄악의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고 이것이 제도적인 차원까지 발전하여 허물까지 된다면?
좋은 삶은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좋은 삶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내 이야기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를 듣는 것에서 좋은 삶은 추구된다. 타자와 함께 타자를 위하여’라는 슬로건처럼 리쾨르는 변증법을 가지고 나의 이야기와 타자의 이야기가 상승하여 좋은 삶이 된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