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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10. 2019

융과 기독교의 신에 대한 관념 비교

새물결아카데미_장덕환 박사(정신의학과)

20190509_새물결아카데미
장덕환_칼융과 기독교



들어가기

기독교의 관점에서 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융의 말년에 인터뷰를 했다. “신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니 융은 “어떤 것이 진실이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증명할 수 없을 때 믿는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다만 나는 신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비기독교인이면서 과학적인 증거를 가지고 신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융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은 어떤 것일까? ‘분리에서부터 융합으로’라는 것이 책의 핵심이다. 분리는 억압을 통해서 생긴다. 무엇인가가 억압되는 순간에 억압되는 대상과 억압하는 대상으로 나눈다. 융합이 되려면 분리에 대한 저항이 있어야만 한다. 저항 이후에 융합으로 갈 수 있다.

프로이트는 분리와 억압을 이야기했다면, 융은 저항과 융합을 이야기한다. 오늘은 억압에서 시작해서 융합으로 가는 것을 이야기해볼 것이다.


정신과, 치료

정신약물학은 1950년부터 시작되었다. 조현병 환자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약물학적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치료가 있다. 이것은 정신을 분석하여 정신 안에 억압되어 있는 것들을 해석하고 풀어가는 과정이었다. 이 부분이 바로 프로이트가 시작했던 뉴로사이언스였다. 정신치료로 들어가면 크게 두 줄기가 있다. 프로이트와 융이 바로 그 두 줄기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정신치료는 이 두 사람의 방법론을 현실에서 의학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프로이트, 융

프로이트와 융의 차이점은 여러가지가 있다. 프로이트는 과학적인 접근을 하기 때문에 ‘오이디프스컴플렉스’와 같은 ‘인과적 모델’에 기본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방법론은 연대기적인 시간대에서 어떤 시간이 꼬여버리면 그것을 찾아가서 해결한다는 기계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발견했고 무의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종교를 비판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특히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신의 개념은 인간을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융은 목적론적이다. 만약 지금 내가 아프다는 것은 인과적으로는 과거의 어떤 신진대사의 문제나 사건일 수 있지만, 목적론적으로는 어떤 목적을 위한 예비적 단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융은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 전체를 두고서 다양한 분설툴을 사용한다.


융, 장단점

확충기법은 자신이 꾼 신비적인 꿈을 세계에 존재하는 신화와 민화와 속담을 찾아서 연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확충기번은 논리적 모순이 있다. 유사성을 확정지어서 미래를 투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확충기법은 신비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융은 집단무의식의 중심에 있는 것이 자기이다. 그 자기를 설정하는 순간 그것은 신비주의적인 요소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비논리적이고 신비적이고 연결고리가 끊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융의 심리학은 인격의 비밀을 탐구하려는 목적이 있다. 자아와 자기가 합일되는 과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에서 부터 집단의 무의식이 합일이 되는지,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화해가 되는지를 보려고 한다.


융, 뿌리

융은 왜 그토록 융합을 생각했을까? 왜 분리된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과정을 거쳤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융의 과거, 어릴적의 사건들을 이해해야 한다.

융의 할아버지는 융하고 이름이 똑같았다. 슐라이허마흐와 매우 친한 친구였으며 동시에 사돈이었다.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스위스로 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융은 스위스 국적을 가지게 된다. 융의 아버지는 융의 할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랐다. 소심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이었고, 그러한 성격으로 목사가 되었다. 그 당시의 신학적 영성을 본 받아서 매우 이성적이었다.

어머니는 바젤대학의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어머니는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깊었는데, 유령과 대화를 하기가 일쑤였고, 유령의 존재가 너무 많은 부분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서 여러가지 작업들을 했다. 외할머니는 1호 인격, 2호 인격과 같은 용어를 사용했다. 외할머니는 예지력이 있었고 몽유병과 여러가지 신비주의적인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태어난 융의 어머니는 신들에 대한 친근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융의 인격을 구성하는 뿌리는 이성적 아버지와 신비주의적 어머니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을 반복했다. 융의 어머니는 결혼하고서 6년동안 유산을 여러번하고 마지막에 융을 낳았다. 융의 어린시절은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어두웠다. 어머니의 늪에서 자란 것 같았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정신병과 신비주의를 왔다 갔다 하면서 요양소를 드나들었고 융의 정신도 여러가지로 분열되어 갔다.

자라면서 융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냉소적인 사이에서 유모 곁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교구를 옮겨서 라인강가의 유명한 폭포 옆으로 사역지를 옮겼고, 자살충동과 삶의 대한 고민들을 더 깊게 하게 된다.


융, 정신형성

융은 4, 5, 6, 7세의 사건들을 기억하고 책을 썼다. 전아동기의 시기에 융은 꿈에 자신의 집안 지하에 존재할 것 같았던 남근상을 보기도 하고, 집단무의식과 마주해서 운명론적으로 다가가기도 했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불안함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기분을 주었고, 융은 자라나면서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김나지움에 입학한 융은 역시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했다. 머리를 다쳐서 매일 졸도를 하기도 했고, 호흡기가 좋지 않아서 숨이 멈출뻔한 적도 많았다.

11세 때 주체적인 자아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사례는 많이 있다. 자신이 정신적으로 정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때부터 이전과 같이 살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한 성당을 지나가다가 황홀경을 경험하는데, 그 때 하나님이 성장 지붕에 대변을 누는 환상을 보게 된다. 이때 융은 ‘신이 내게 원하는 것은 신앙적 복종이 아니라,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용기를 내서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을 원한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주체로서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격에 대해서 의식과 무의식의 인격들을 나누어서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에 대해서 신앙을 빗대에서 용기와 변화를 보게 된다. 아버지의 신앙은 매우 메마르고 힘이 없고, 열정이 없는데 여기에서 ‘교회에 신은 없다’라고 깨닫게 된다. 아버지로부터 나온 뿌리는 열등감과 이성적 허영등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뿌리, 구분

아버지로 부터 철학적 , 심령술적 접근을 가지고 온다. 그 당시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이 세상은 인간 의지의 표상이라는 것을 이야기했고, 헤겔은 절대정신의 존재와 이성의 무력감을 이야기했다. 인간 본질의 근본은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적 충동이라는 말을 쇼펜하우어가 했다.

어머니로 부터 심령술적, 정신의학적 접근을 받아 들인다. 그 당시 블룸하르트 목사가 매우 유명했는데 그의 저서로부터 심령술적인 퇴마의식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사촌동생은 영매 역할을 했었다. 그 곳에서 융은 인간의식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융은 컴플렉스의 개념을 단어연상기법을 통해서 찾아내기도 했다.


꿈의 해석, 무의식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통해서 융은 자신이 그전에 생각해보지 못한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특히 꿈과 무의식의 연결을 통해서 꿈 안에 억압되어 있는 것들을 단어가 아닌 꿈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단어연상은 사실 ‘언어’ 자체가 이미 사회적이라면, 꿈은 이미지를 중심으로 개인적인 무의식을 보게 만드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인격과 심리의 문제, 아버지로 생각되는 프로이트에 대해서 융은 여러가지 부담스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07년에 프로이트를 만나면서 융은 전이감정을 강하게 경험한다. 프로이트는 유대인인 자신의 신분에서 스위스인이면서 유명한 융을 아들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융 앞에서  

대상, 억압, 체계적 상징화와 같은 것은 융의 연상실험과 일치했지만, 프로이트의 성에 관한 이론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경증, 정신증을 성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주관적 편견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융, 영향을 준 인물

윌리암 제임스, 플로드누아는 융에게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감정의 다양성을 저술했다. 이 글은 이론적인 서술이 아니라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사례 분석을 했다. 윌리엄제임스는 신비주의에 대한 저술을 통해서 융의 신비주의를 발전시키게 해주었다.

플로드누아는 영매에 관한 글을 썼고 이전까지 융이 가지고 있던 신들에 관한 개념을 초월적 수준에서 제시해주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융은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이라는 논문을 ‘밀러’라는 여자의 글을 통해서 작성한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리비도 개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해석이었다.


집단무의식, 융

리비도는 성적상상이 발동되고 마음이 움직이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억압이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설명이다. 이것은 밀러의 내면에서 아버지-신으로 연결되어서 신앙심이 더 좋아졌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융은 리비도라는 억압된 무의식을 통해서 신에 대한 찬가가 일어났다고 분석했던 프로이트에게 의문을 던진다. 성적 욕망없이 신에 대한 욕망은 없는가? 프로이트와 같은 해석을 부당한 목적이라고 해석하고 순수하게 끌어 오르는 욕망을 신적 목적이라고 보았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상징은 신화와 민담과 여러 역사들에 서려 있었다. 이것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융은 신비주의와 영매 그리고 집단무의식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융, 영지주의

기존의 방식은 성경을 보고 경험을 하기도 하고 습관으로 의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먼저 자신의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해석을 하고, 새로운 의식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영지주의가 가지고 있는 집단의 동일한 경험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았고 융은 연구를 시작한다.

영지주의를 통해서 인간의 무의식에 경험의 영향과 신들의 영향을 알아보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연구를 하던 도중 연금술이 영지주의와 연결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연금술은 현대에 와서 신비주의와 화학으로 나누어지고 지금은 연금술하면 허무맹랑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융은 연금술에서 전이심리학을 발전시킨다. 연금술은 집단무의식을 통해서 집단의 의식이 하나로 집중되어 전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보았다.


융, 개성화

집단무의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가? 집단으로서의 자기는 개인으로서의 자아와 어떤 연결이 생기는가? 이것을 연결하는 작업이 개성화 작업이다. 나의 그림자를 만났을 때, 여기서 그림자는 개인의 무의식이다, 자아를 찾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또한 아니마, 아니무스를 만날 때 집단무의식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여기서 자기를 파악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와 자아가 만나는 지점에서 개성화가 일어난다. 자기를 만나는 것도, 자아를 만나는 것도 어떤 위기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자기는 초월적 무의식이다. 이것은 세상의 중심이면서 나의 중심이다. 이러한 중심은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의 우리 안에 중심이 되고, 그 중심에 내가 서 있다. 그러나 융은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오는지 무의식에서 오는지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과 무의식이 다른 독립체인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무의식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식별불가능한 것이다. 의식과는 당연히 무관하다. 이것은 모든 상징이 합쳐진 전일성의 원형이다. 이것을 만약 신학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단적인가?

건강한 의식이 초월적 의식을 관조할 때 융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과정은 신비주의적이었다.

집단무의식은 의식과 관련해서 움직인다. 만약에 무의식이 의식을 넘어서게 되면 조현병이 된다. 융이 보는 집단무의식은 인류를 성장시키면서 인류를 안정적으로 균형을 맞추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로 인간들이 만든 무의식들의 총체는 그것 자체로 좋은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신비주의 체험, 확인

신비주의는 존재한다. 그러나 신비주의의 목적이 부정성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를 판단할 수 있는 툴이 있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자. 낙관적인가? 편협하지 않은가? 실제로 삶의 열매가 바뀌었는가?집단무의식은 자아와 자기만남이라고 한다면 전일성의 체험이면서 원숙한 인격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전이심리학, 연금술

보통 집단무의식을 전제하고 인류적으로 의사와 환자를 보면 그것은 환자가 가진 어떤 무의식을 전이해서 의사에거 전해주고 의사는 그것을 해석해서 다시 환자에게 전해준다. 마찬가지로 의사에게 투사한 어떤 대상에 대한 감정을 의사는 해석에서 다시 환자에게 돌려준다. 이것을 전이심리학이라고 한다. 이것은 다시 융에게 와서는 연금술과 연결이 된다.

고백-해석-변환의 과정에서 완전히 다른 폼이 만들어진다. 융은 말년에 transformation에 대해서 연구했다. 전이라는 현상을 보는 프로이트를 넘어서서 전이 이후에 신비주의적인 어떤 변환이 일어나는 것까지 융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개인심리학은 융에 와서는 집단심리학과 무의식으로 그리고 전이를 통한 변환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집단무의식의 차원으로 환자와 의사가 동시에 참여하고 그 참여한 가운데 같은 변환이 일어나는 과정이 바로 전이심리학의 핵심이고, 이것이 융이 집단무의식을 조사한 목적이 된다.


욥, 융

욥기를 보면 욥과 친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대한, 신에 대한 인류의 무의식을 보게 된다. 인류 안에 내재된 신의 상징을 보면서 융은 하나님에 대한 역사적인 집단무의식을 분석한다.

이것은 융이 평생 ‘인격’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 연구하는 주제가 이제 성경 안에서 마무리를 해 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선과 악이 공존했고, 악마도 인정했다. 욥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그리스도는 순수한 선이 되면서 악의 존재가 하나님 안에서 사라졌다. 그렇기 때문에 적그리스도가 탄생한다. 융은 이러한 해석 이후에 적그리스도는 16세기 르네상스 이후에 인간의 의식이 오만해지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발전시키고 인간의 이성은 거대하게 성장하여 국가를 만들기도 하고 여러가지 구조적인 악을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융이 생각하는 적그리스도이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초월적 무의식을 억압시키는 의식의 작업이기 때문에 의식과 무의식의 대립이 일어난다는 것이 바로 적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융은 페르소나를 가지고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인격에서 그림자나 아니마가 간격을 발견하게 해준다고 하고, 여기에서 자아와 자기가 만나게 된다고 한다.

집단무의식과 자아의 의식이 만나서 전일을 이루는 이 과정은 한 인간이 집단과 전체와 인류와 문명과 융합되어 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은 매우 무가치한 존재인것 같지만 조그만 가능성과 희망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민네이션, 생각

어릴적 기억들에게서 우리는 어떻게 의미 부여를 하는가?

하나님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세상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자기자신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때가 온다. 그 때 자신은 분리된 것 같기도 하다가,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것을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프로이트는 영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융은 영들을 분별하고 분석하는 일들을 했다.

해겔철학의 절대정신을 넘어서 하이데거의 역사와 존재’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집단무의식은 동일하게 겪은 어떤 사건이 같은 상징으로 남아 있고 이것이 후대에 전해지면서 같은 감성과 생각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보면 융이 보기에 기독교 역시도 집단무의식의 하나이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의 경험은 영지주의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융에 대해서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수 많은 없다. 신화와 해석 그리고 역사와 정신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융은 원형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원형이 1개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융은 원형을 매우 다양하게 본다. 그리고 이러한 원형들은 각 민족이나 역사마다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감정의 다양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고 영지주의적인 연결고리에서 본다면 원형의 다양성은 이해가 갈 수 있다. 그러나 원형 자체가 집단무의식에서 왔다는 것은 애니미즘의 특징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닌가? 무의식 그리고 집단무의식을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무의식에 대한 논리적 해석은 불가하게 되고, 이것은 경험을 사례로 모아서 정리하는 분류작업을 하게 된다.

융 심리학의 특징은 인격의 융합을 이루는 방법을 찾아내고 있다. 여기서 우려되는 것은 융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관점이 초월적 무의식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인지, 알라인지, 불교의 석가모니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장덕환 , 지은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국립서울정신병원(현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트레이닝 받은 후 정신과 전문의가 되었다. 논산백제병원 정신과 과장으로 잠시 근무한 후, 1988년 수원에서 “장덕환 정신건강의학과의원”을 개원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원과 더불어 젊어서부터 늘 관심을 가져왔던 신학공부를 시작하여 강남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이어서 동 대학원에서 종교심리학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000년부터 “기독교와 정신의학”, “종교심리학, 특히 융 심리학과 기독교”에 관한 강의를 한신대학교에서 짬짬이 해왔다.

주요 논문으로는 「체.게.융의 인간이해 과정에 관한 연구」, 「이용도의 꿈과 환상체험에 대한 융 심리학적 분석」, 「하나님 형상에 관한 연구」가 있고, 저서로는 『융 심리학적 관점에서 본 이용도 목사의 꿈과 환상체험』(한국학술정보, 2007), 『인간 없이 신은 없다』(도서출판 금풍문화사, 2010)가 있다.


[차례]

머리말: 껍데기는 가라고?

제1장 융의 운명 – 원초적 대극의 발생과 만남

이성적 혹은 근대적인 아버지의 뿌리/ 감성적 혹은 신비적인 어머니의 뿌리/ 서로 다른 두 뿌리의 만남/ C. G. 융에게서 구체화된 두 뿌리의 뒤섞임


제2장 융의 핵심 과제 – 대극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철학적·심령술적 접근/ 심령술적·정신의학적 접근/ 결혼과 업적


제3장 프로이트와의 만남과 결별, 그리고 자신의 심리학을 찾아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융/ 편지 왕래/ 직접 교류/ 융은 왜 프로이트와 결별했나?/ 결별 과정/ 융 자신의 심리학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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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융이 본 영지주의

융이 영지주의를 탐구하게 된 동기/ 영지주의란?/ 융과 영지주의/ 영지주의와 연금술


제5장 분석심리학의 기본 틀

기본 개념/ 개성화 과정 혹은 자기실현/ 종교 속에서의 개성화 과정


제6장 전이심리학과 연금술

정신 치료에서 전이와 변환의 관계/ 연금술에서의 개성화 과정 혹은 전이: 「현자의 장미원」의 그림들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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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기독교 신화의 재해석 – 욥에의 응답

『아이온』/ 『욥에의 응답』/ 새로운 신화의 탄생


[부록 1] 『변환의 상징』 요약

[부록 2] 밀러의 환상들

[부록 3] 죽은 자들을 위한 일곱 가지 설교

[부록 4] 「초월적 기능」 요약

[부록 5] 프로이트의 『토템과 타부』 요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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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이 시기에 그는 평생의 탐구 과제인 인격의 비밀에 대하여 본격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즉 두 인격으로 상징되는 외적 세계와 내적 세계, 의식과 무의식, 또는 과학과 영성에 대한 인생의 과제를 비로소 진지하게 탐구했던 것이다. 융은 이 시기에 두 가지 상반된 세계를 화해시키는 방법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추구했던 방법은 첫째, 내면의 영성에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통한 철학적 분석으로 접근하는 것이었고, 둘째, 철학으로부터 정신의학으로 나아가 영성의 심리학적 이해의 기초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초핑기아(Zofingia) 학생회 활동이 전자의 방법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후자의 방법으로 나아가려는 초기의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_제2장 융의 핵심 과제 ― 대극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융이 프로이트를 공식적으로 옹호하고 나선 사건은 1906년 어느 학회에서 강박신경증에 관한 보고를 하면서 그의 이름이 고의적으로 묵살되었을 때였다. 그는 학회가 끝난 즉시 「뮌헨 의학주보」에 강박신경증을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기여를 한 프로이트의 노이로제 학설에 관한 논문을 써서 보냈다. 이 논문에 대해 독일인 교수 두 사람이 융에게, “프로이트 편에 서서 계속 그를 옹호하면 대학에서의 당신의 장래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협박편지를 보냈다. 이에 대해 융은 다음과 같이 회답을 보냈다. “만일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그의 편에 있겠습니다. 출세가 연구를 제약하고 진리를 묵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출세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융은 프로이트를 옹호하는 일을 계속했다

_제3장 프로이트와의 만남과 결별, 그리고 자신의 심리학을 찾아서


그는 자기 자신 안에 1호 인격과 2호 인격이라고 표현한 서로 상반되는 성격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고, 그것들의 분열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열은 아버지를 통한 기존 기독교에 대한 불만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의 기독교는 메마른 도덕적 실천만 있었지 인간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경외로운 영성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 곧 어린 그에게 분열된 인격에 대한 과제와 영성이 메마른 기독교의 대표자와 같은 아버지에게서 풍겨 나오는 절망감이 기독교 안에는 답이 없고 기독교 그 너머 어딘가에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는 암묵적 소망을 심어준 것은 아니었을까? 하여튼 융에게 기존 기독교 사상을 넘어선다는 것은 우선 아버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인격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맹목적이고 방향감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위한 새로운 신화를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일 수 있었다. 이런 배경의 영향으로 인하여 기독교 엘리야의 형상이 비기독교적이고 영지주의적인 필레몬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융의 무의식에 나타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_제4장 융이 본 영지주의



‘자기’의 개념이 집단무의식의 중심인 한, 개성화 과정을 공동체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자기의 개념은 그것 자체가 집단적이기 때문에 사회를 한 단위로 볼 때 각 개인의 자기들은 그 사회의 집단무의식의 중심에 모이게 된다. 융이 말하는 ‘자아와 자기의 관계’ 안에는 이러한 사회적 구조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 즉 개인은 동시에 사회의 일원이 되고, 그 사회는 또한 각 개인에게 영향을 준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한 이념이나 종교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_제5장 분석심리학의 기본 틀



전이가 어떤 사람의 무의식이 특정한 인물에게 투사되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투사와 전이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이는 환자-의사 사이의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데도 주요하게 작용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전이란 곧 무의식의 내용이 의식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게 도와주는 한 방편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인간관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이 현상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의 무의식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연금술사가 여러 비밀스러운 방법들을 시행할 때 그려두었던 심상들은 바로 그들의 무의식이 투사된 그림들이다. 비밀스러운 방법들이 그들의 무의식을 활성화시켰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신 치료 상황에서도 시작부터 환자와 의사의 무의식이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환자는 자신의 무의식을 자연스럽게 의사에게 투사하게 되고, 의사도 환자에게 그의 무의식을 투사하게 된다. 둘 사이에서 전이가 일어나는 것이다. 연금술이나 정신 치료나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어떤 대상에게 자신의 무의식을 점차적으로 투사(전이)해간다는 점이다. 다만 그 상대가 살아 있는 인간인가, 아니면 명상을 통한 심상의 표출인가만 다를 뿐이다.

_제6장 전이심리학과 연금술



욥은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인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친구들과는 달리, 정의와 도덕의 잣대를 곧추세우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맞섰다. 이런 욥의 태도는 야웨가 자신을 스스로 의식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몰아갔고, 결국엔 야웨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그러면서 야웨는 욥이 하찮은 미물이라는 것을 자각시키려는 듯 자신의 힘을 무자비하게 과시하지만, 그는 오히려 욥을 마치 그 자신과 대등한 권력을 가진 다른 신을 대하듯 도전적으로 그를 대한다. 이 시점에서 이제 욥은 야웨에게 하찮은 미물로서의 존재가 아니다. 욥은 야웨의 변증법적 내적 과정을 촉발시키는 외부적 계기로 작용한다.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자아(욥)는 자기(야웨)의 변증법적 내적 과정을 촉발시키는 외부적 계기인 것이다. 이것은 자아-자기 동반자 관계(ego/Self partnership)에 관한 깨달음이다. 이것은 무의식의 의식화, 즉 ‘신적 드라마’의 진행 과정 중 한 부분으로서 자아 초월적 과정의 시작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형상의 내적 변증 안에 동참할 때 자아가 신성한 또는 신과 같은 속성을 운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자아는 어떤 누미노제의 속성을 취하게 된다. “야웨가 욥을 마치 신처럼 여기고 대응했다”는 말이 바로 이 누미노제적 속성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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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이 평생토록 매달렸던 연구 과제는 지극히 단순했다. 그것은 둘로 나누어진 내면세계를 하나로 화해시키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융의 언어로 다시 표현하면 자아와 자기가 하나로 합일되는 방법을 찾는 것이고,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 다시 말해서 인간 구원의 문제를 심리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찾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삶의 변화는 과연 일어나는지, 일어난다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런 깨달음은 심리학적으로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찾아간 여정이었다.

본문의 전반부에서는 융의 이 여정에 함께한다. 프로이트와 융은 심층심리학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융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융 또한 프로이트에게 무시 못 할 존재였음이 틀림없다. 이 둘의 만남과 헤어짐은 심층심리학 역사에서 흥미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본문은 두 사람의 교류 과정을 따라가며 그에 따른 둘의 심리학에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 살펴본다. 영지주의와 연금술 역시 융 심리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적 영지주의와 그것에 관한 융의 관점 탐구는 그의 심리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특히 그가 연금술에서 전이 문제를 유추해낸 점은 가히 천재적이다. 과연 전이심리학과 연금술은 어떤 관계일까? 이는 6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융 심리학의 핵은 물론 개성화 과정이다. 이 책에서는 그 과정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고, 임상 예를 들어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성숙 과정을 이해하는 폭을 넓힌다.

또한 융 심리학은 기독교를 배제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이 책은 처음서부터 그의 기독교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그의 심리학을 추적하려 했다. 따라서 본서 전체에서 융 심리학으로 재해석해내는 기독교 정신을 찾아보는 것은 이 책의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준다.

융의 분석심리학은 기독교에서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신앙에서 성실하고 설득력 있는 심리학적 설명서임이 틀림없다. 기독교가 바라보는 참 인간상을 어떻게 알 수 있을지, 어떻게 믿을 수 있을지에 대한 저자의 의문에 기꺼이 확신을 제공해준 것이 바로 융 심리학이었다. 저자의 오랜 연구의 결과물인 이 책이 융 심리학과 기독교 정신의 관계에 관심 있는 많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충족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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