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사랑셀프스터디_조르주바타이유_에로티즘
인간의 정신은 가장 놀라운 명령에 노출되어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두려워한다. 인간의 에로스 충동들은 그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신성한 사람은 질겁하면서 호색가를 외면하지만 그 사람은 사실은 호색가의 열정과 자신의 열정이 일치함을 모를 뿐이다.
신성한 사람에서 호색가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은 다양하다고 해도 그러나 인간의 정신이 보이는 일관성을 찾아내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까? 그 대립된 가능성들의 배열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에 서 볼까 한다. 이어 그것들을 서로 환원시키는 대신,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는 부정의 가능성 너머에 있는 어떤 극한적 수렴 가능성을 포착해 볼 생각이다.
인간은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지배하기 전에는 최소한의 이성조차 갖출 기회가 없다. 바타유는 인간이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세상, 에로티즘과 죽음이 어떤 기계 장치에 의해 연결되는 세상을 희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은 인간을 두렵게 하는 것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것에 당당히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에 대해 잘못 규정된 야릇한 몰이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두려움없이, 장황하게 에로티즘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바타유가 이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아니다. 바타유가 하는 일은 이미 묘사된 다양한 사실들에서 일관성을 찾아서 전체를 일관성 있게 하는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내는 일이다.
일관성 있는 총체에 관한 ‘에로티즘’의 연구는 바타유의 노력을 과학적 노력과는 다른 것으로 만든다. 과학은 분리된 문제를 연구하며 전문화된 작업들을 쌓아 올린다. 반면 에로티즘은 인간에게 과학적 방법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어떤 의미를 지닌다. 에로티즘은 오직 고찰하는 인간이 고찰의 대상이 될 때만 고찰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특히 에로티즘은 노동의 역사와 구분해서 또한 종교의 역사와 구분해서 독립적으로 관찰할 수 있도 없다.
한마디로 바타유는 인간 정신의 통일성이 발원하는 시점을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시켰다.
이러한 전체적 조망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작업을 하는 동안 바타유를 붙드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청년기 시절 나를 사로잡은 어떤 이미지, 즉 신의 이미지를 총체적 시각으로 복원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바타유가 청년시기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이 버려진 세계에서 인간의 열정이 갖는 대상은 단 하나인데, 우리가 거기에 접근하는 길은 다양하다. 그 대상은 아주 다양한 양상을 가지고 있어서 그 다양한 양상들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그것들의 심오한 일관성을 찾아낼 수 있을 때만 파악이 가능할 것이다.
바타유는 ‘에로티즘’에서 기독교의 충동과 에로티즘의 충동이 상당한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한 정의가 문제가 된다면 에로티즘은 번식차원의 성행위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에로티즘도 번식의 특수한 한 형태이므로, 번식에 목적을 둔 성행위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성 동물의 공통된 행위이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성행위를 에로틱한 행위가 되게 했는데, 단순한 성행위와 임식에 대한 생각이나 번식등 자연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심리적 추구로서의 에로티즘을 구분하게 해주는 바로 그 점이다. 이 기본적인 정의로부터 처음에 제기한 표현인 ‘에로티즘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다’로 돌아가보자.
사실 에로틱한 행위는 앞서 말했듯이 생명의 번식에 대한 의식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에로틱한 행위가 일단 생명의 충실한 것만은 틀립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종적으로 그것이 추구하는 바가 죽음과 관계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 말에는 너무나 큰 역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쓴다.
사드는 이렇게 말했다. ‘불행한 일이지만 비결은 너무 자명하다. 조금이라도 악습에 뿌리를 내린 방탕아라면 살해가 관능에 대해 얼마나 큰 지배력을 행사하는지 모를리가 없다. 죽음과 친숙해지려면 방탕을 결합시키는 일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
사실 사드의 생각은 탈선적인 것일 수 있다. 사드가 참조하는 기질이 인간의 천성에 비추어 볼 때 그렇게 희한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탈선적인 것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죽음과 성적 흥분의 관계가 남는다. 살해하는 광경이나 살해에 관한 상상이 적어도 환자들에게는 성적 욕구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둘의 관계를 병의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바타유는 사드의 역설에서 하나의 진리를 인정한다. 그 진리는 악습의 지평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심지어 그 진리를 우리의 삶과 죽음을 표상하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요컨데 우리는 이 진리를 외면한 채 존재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없다. 흔히 인간은 열정적 충동과는 무관하게 태어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감히 말하건데, 인간을 그런 충동과 무관한 존재로 상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철학의 오류는 생명을 멀리할 때 비롯된다. 바타유의 고찰은 생명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한다. 번식 차원의 성행위와 관계한다는 말이다. 에로티즘은 번식과는 대비된다고 말했다. 에로티즘이 목적으로서의 번식이나 에로틱한 유희와는 무관하게 정의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번식에 대한 기볹거 의밀 파악은 에로티즘을 푼는 열쇠가 될 것이다.
‘번식은 불연속적 존재들을 위기로 쏟아 넣는다’ 번식하는 존재들은 서로 구분된다. 새로이 번식된 존재들은 그것들을 모체들과 다르며, 새로 태어난 존재들은 그것들대로 서로 다르다.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 다르다. 그 존재의 출생, 사망 그리고 사는 동안의 사건들이 다른 존재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들에 직접 관계하는 존재는 본인뿐이다. 그는 혼자 태어나며, 혼자 죽을 수 밖에 없다. 어떤 한 존재와 다른 존재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여 있으며, 거기에 단절이 있다.
바타유는 불연속적 존재인 우리들에게 죽음이란 것이 존재를 이어주는 연속성의 의미를 가짐을 증명해 보이려고 한다. 번식은 존재들을 불연속성으로 안내하며 존재들 간의 연속성을 위기로 몰아 넣는다. 번식은 죽음과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존재들의 번식과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존재의 연속 또는 죽음은 결국 동일한 것에 대한 다른 표현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존재의 연속 또는 죽음은 둘 다 매혹적이다. 그리고 에로티즘을 지배한느 것 역시 연속성 또는 죽음에 깃든 매혹이다.
인간은 무성생식이 아니라 유성생식을 한다. 유성생식은 다른 성과 접촉할 때만 번식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접촉에서 죽음과 생명이 하나의 연결고기를 낳는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줌으로써 생명체는 다음에 오는 생명체에게 자신을 준다. 그래서 이전에 생명체에게서 다음의 생명체로 번식하는 과정이 일어난다. 이것은 연속적이 아니라 불연속 적이다. 그래서 중간에 연결지점이 완전히 다른 개체로 끊어진다. 이 과정, 이 사이에서 에로티즘은 번식을 넘어서는 생명과 죽음 사이의 어떤 목적에 도달한다.
인간은 항상 부정과 정결함, 옳음과 부도덕, 좌파와 우파와 같은 극한 상황을 정하고 그 상황의 끝단에 자기가 추구하는 것과 반대하는 것들을 둔다. 바타유에 의하면 사실은 이것들은 같은 지평, 같은 선상에 있는 것들이고, 그러한 구분을 넘어서면 그것들은 사실은 하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내가 싫어하는 어떤 사람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스타일을 안다는 것인데 그럼 그 스타일이 싫게 된 이유는 그 스타일에 대한 어떤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retrospect라고 한다. 과거의 내가 어떤 경험에 의해서 다음에 오는 경험에 대한 판단이 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타유는 성적 욕망이나 에로스, 에로티즘은 사실 성스러움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던지는 것이다. 성스러움이 있어야 성스럽지 않은 것들이 있고,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판단을 넘어서 ‘성스러움’을 창조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선상에서 방향의 문제만 제기되기 때문이다.
바타유와 두려움의 극복 방식에서는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나는 두려움의 극복은 그것을 직면함으로 해결되는 ‘주이상스에 대한 직시’라는 라캉의 명령보다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따른다. 실제로 경험해 본 것도 인간이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사람에게서 나오고,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에서 두려움의 다른 차원으로서의 극복을 본다. 다시 말하면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두려움과 두렵지 않은 차원에서의 해결은 바타유식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하다. 나는 그것을 사랑으로 놓았고, 바타유는 에로티즘으로 놓았던 것이다.
에로티즘을 읽고 있으면 프랑스철학의 전통에서 존재의 욕망인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의 흐름들이 읽혀진다. 심리가 만들어지기 까지 우리 감각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수 많은 질곡들이 사실 충동의 여정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인간은 생각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감각하고 느끼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어떤 충동들은 모여서 의미를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몸에서부터 시작해서 정신으로 가는 베르그송의 도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