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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Dec 28. 2019

인물이 아니라 사건

20191215_함께.걷는.교회

‘인물이 아니라 사건’_마태복음 11장 2-11절

(사진은 우간다에서 우물사업을 통해서 깨끗한 식수를 공급받게 된 카물리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0. 들어가기


전세계의 5%도 안되는 장로교의 전통에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칼빈의 교리와 복음주의의 4가지원리가 묘하게 중첩된 지점에서 ‘기독교 강요’가 선을 긋고 구획을 정하면 역사와 전통이라는 이름의 벽들이 생기고, 어느덧 이것이 진리의 차원으로 승격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도 ‘진리의 대변자=진리의 가장 가까운 자’가 되어서 권위를 가지게 된다. 어릴적부터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강대상’ 위에는 하나님이 앉아 있는 것 같은 환상을 본다. 존재론적으로 다른차원을 규정하고 나면 ‘목사’들 위주의 교회 구조가 형성되고 ‘장로’들은 ‘당회’에서 담임목사의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성도들은 ‘평신도’로 격하되면서 ‘진리’는 배우거나 토론하거나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되어지는 것으로만 인식된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는 ‘목사’가 전하는 설교로 그 모든 것들이 균형을 잡는 것 같고, 예배의 핵심도 오직 ‘설교’에만 집중된다. ‘사건’이 아니라 ‘인물’에 집중된 교회는 자연스럽게 우상숭배의 경로를 밟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드물게 그 길을 가지 않는 교회가 간혹 있지만 말이다. 오늘은 이 핵심적인 구조적 요인에 태클을 걷는 작업을 해보려고 한다. 바로 ‘인물이 아니라 사건’이라는 메타포이다.


1. 대림절


대림절은advent 교회력이 시작되는 절기이다. 보통 예수님이 오시기 전 4주를 가리키며 강림절이나 대강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원은 adventus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의 문화적 전통을 이해한다면 이미 대림절은 ‘그리스도가 오고 계시는 중’인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를 의미한다. 오늘은 대림절에 교회력에 있는 말씀 중 3주차 말씀 본문을 가지고 함께. 걷는. 교회 식구들과 나누었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400년의 말라기 이후의 마태복음이 쓰여지기까지의 기다림, 그것은 희망의 신학이었을까? 아시면 종말을 예고하는 묵시록이었을까? 대림절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2. 기다림과 종말론


비전은 미래를 향해 있다. 역사는 과거를 향해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단어들은 이미 어떤 시간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기다림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어떤 행사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생각과 방향이 미래를 향해 있다는 것이다. 미래에는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사건이 발생할까? 이런 생각과 질문을 하는 동안 우리는 이미 미래에 가 있다. 기다림이란 바로 이러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의식과 시선은 어디론가 뻗어가는데 방향이 중요한 부분이 여기에 있다. 회상은 과거를 기대는 미래를 향해 있는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이 기다림과 종말은 항상 맞닿아 있었다. 미래에 다가올 종말인가? 아니면 과거에서 이미 완성된 종말인가? 그럼 다시 종말은 과거로부터의 회상인가? 아니면 미래에 이루이질 기대인가? 


3. 사건의 철학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바디우는 그의 저서 '사도바울'에서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사도바울은 과거로부터 회상할 때 2가지의 전통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가지고 있었다. 첫번째는 헤브라이즘으로부터 오는 선민의식과 아버지 사상이다. 하나님의 자신들의 아버지이며 자신들만 선택받았다는 특권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은 헤브라이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가장 중요한 자아인식의 근거였다. 사도바울은 자신도 역시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선민으로서 스데반을 박해하며 제자들을 추격했다. 두번째는 헬레니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의식의 철학이었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철학적 전통은 지혜가 뛰어날 수록, 머리가 좋을 수록 탁월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당시 최고의 유대교학자라는 가말리엘의 제자였던 사도바울은 자신을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칭하며 그리스로마전통에서 주는 정체성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지만, 자신을 이루는 출신과 전통이 강할 수록 깊은 자신감과 높은 자존감을 갖기 마련이다. 사도바울에게 두가지의 전통에서 오는 정체성은 누구보다 강한 신념을 만들어냈고, 사도들을 찾아내서 죽이기에 혈안이 되며 사명감을 느낄 정도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그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체성의 근간들이 모두 산산히 부서졌다. 자신을 자랑할 수 있고, 남들에게 떳떳하게 내보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자신이 건강할 때이다. 머리가 좋다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자신이 '잘 본다'라는 것이다. 인식의 재료가 아무래도 시선에서 오는 1차 정보이다보니, 잘 보는 사람은 잘 판단하고 잘 말한다.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사도바울은 두 눈이 보이지 않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뀐다. 하루 아침에. 


알랭바디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정체성이 찾아오는 예감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전에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던 아버지전통과 그리스철학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만난 '사건' 자체에 촛점을 맞춘 것이다. 그전에 있던 모든 것들이 배설물이 되어 버리고, 오직 예수를 만난 사건 자체로 사도바울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바디우는 이렇게 말하면서 책을 요약한다. 


진리를 만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진리의 투사가 된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삶을 살아간다. 바디우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 똑똑하고 가문이 좋던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와 만난 '사건'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는지를 고민하면서 '사도바울'이라는 책을 썼다. 물론, 자신의 이론적 근거 '사건 가운데 진리가 탄생한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썼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수 많은 고민과 의문 그리고 깨달음을 주는 것은 확실하다. 


4. 인물이 아니라 사건


오늘의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계속해서 물어본다. "당신이 정말 그 사람입니까?" 기존까지, 아니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되기'에 급급한 것 같다. 어떤 사람이 '되기'에 급급하다 보니 그 사람이 된 후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욕망을 맘껏 펼치고서는 30년 즈음이 지난 후부터 후회를 하는 것들을 본다. 예나지금이나 사람은 '되는'것에 매우 관심을 많이 가지고, 또 그런 차원에서 비전이 뭐냐고 물어보닌 '대통령이 되는 것, 국회의원이 되는 것, 과학자가 되는 것, 의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례요한도 여전히 당신이 바로 그 입니까?라고 물어본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하기'였다. 세례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와서 보고 듣고 너희가 알게 된 것을 알려라'라고. 예수님은 생애 동안에 끊임없는 사건으로 우리의 삶 속 표면적에 가득히 찾아오셨다. 눈을 뜨는 사건, 일어나는 사건, 살아나는 사건, 듣는 사건, 가난한 자가 복음으로 자유게 되는 사건. 그 사건 속에서 예수님은 친히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라는 말씀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하기'는 '되기'보다 오히려 더 현재적이고 실재적이다. 인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현현하는 사건은 되기가 아니라 하기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면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키는 '능력'에 있다. 그 능력은 바로 '하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시간 우리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다면 어떤 '하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하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것이다. 


다분히 행동을 요청하는 이야기이다. 인물이 아니라 사건이라서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 '나는 이런 사람인데, 너희가 알기나 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이라면 이렇게 행동해야지, 먼저 움직이자'라고. 그러니 자신이 리더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섬기는 '하기'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나고, 그것은 아주 자잘하지만 하나의 '사건'이 될 것이다. 사건이 시작되는 시점에는 언제나 '너와 나'가 있다. 만나야 사건은 시작되고, 예수님은 '너희 중에 내가 있다'라고 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듯이, 찾아가야 한다. 우리가 필요한 곳이라면 우리가 가서 만나고 눈을 맞대고, 손을 부여잡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어야 한다. 그 나눔의 사건 사이에서 예수님은 계신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인물이 아니라 사건'이라는 메타포를 기억해야 한다. 


강대상에 올라가 있는 그 사람도, 관중석처럼 길게 늘어선 의자에 앉아 있는 나에게도 모두 동일한 명령과 은혜가 있다. 문을 열고 나가서 어떻게 '하기'를 할 것인가라는. 고인물은 썩게 마련이다. 은혜도 뭉쳐 있으면 서서히 굳어져서 우상이라는 석상이 되어 버린다. 한국교회의 현실앞에서 우리는 깊은 테클을 우리의 인식속에 걸어야 한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없다. 더군다나 이 길을 함께 걸으시는 분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을 신성시하면서 '거룩'이라는 것을 '율법'에 매어 놓은 이들의 거짓말은 피해야 한다. 거룩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는 것, 그러니 함게 걷는 이 시간에 같이 '하기'를 통해서 우리는 점차 거룩을 회복해 간다. 


신을 벗고 선 모세 앞에서 타오르던 불길Comsuming Fire처럼, 하나님은 계속해서 움직이시고 걸으시고 말씀하시고 생각하시고 고민하시니, 우리도 그분의 이미지에 맞게 고민하고 생각하고 걸으면서 계속해서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거룩이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지 않을 때 비로소 거룩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일테니, 모든 좋은 것들은 그 자체로 우리가 그 좋은 것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아야만 비로소 지속할 수 있으니. 


0. 나오기_함께 걷고 있는 사건


목표나 비전, 미션을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서구유럽의 목표지향적인 삶의 체계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바로 옆에 동시간대에 같은 걸음을 걷고 있는 이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웃들에 대해서 '변화시켜야지'라는 미션을 조금만 내려 놓으면, 그들 가운데 소중한 마음이 보이고, 눈가에 흘린 눈물의 흔적이 보인다. 자신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말겠다는 사도바울의 신념과도 같은 미션을 조금만 내려놓고, 함께 걷고 있는 이 시간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이 필요한게 아닐까?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을 '인물'로 기다리는 미래가 아니라 '사건'으로 현재에서 실현되는 '하기'가 아닐까? 우리는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여전히 함께 걷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고 함께 걷는 이들이 지치지는 않았는지, 함께 걷고 있는 이들이 아푸지는 않은지를 돌아보는 내내 그리스도는 우리의 등뒤에서 우리를 밀고 있을 테니. 오늘도 함께 걷고 있는 사건을 만들자. 





참고 1. 바울에 관한 새 관점


바울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이란 영국의 성공회 출신 신학자인 E. P. 샌더스(Sanders), 제임스 던(J. Dunn), 그리고 니컬러스 토머스 라이트(톰 라이트)와 같은 학자들이 전통적인 개신교의 칭의(justification)론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는 학설이다. 그들에 따르면 새 관점(New Perspective)이란 1세기 유대주의의 관점을 가지고 칭의와 관련된 바울의 서신들을 새롭게 이해하는 시도이다. 종교 개혁가 루터울리히 츠빙글리, 칼뱅에 의해 주장된(Old Perspective) 이신칭의론(구원에서 행위가 영향을 주지않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받음)을 비판하고 칭의를 현재 그리스도를 믿는자에 대한 법정적 무죄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아니라 미래에 종말에서 최종완성된다고 한다. 즉 구원에 있어서 지속적인 행위와 종말론적 완성를 주장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개신교가 주장하는 법정적 칭의라는 핵심적인 주장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함으로써 큰 논쟁이 제기되고 있다. 새 관점은 현재 가장 뜨거운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


- 위키피디아



참고 2. 기독교 종말론


신약성서의 마태복음서 24장에서는 예수가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통해 상세하게 나타나 있으며, 조직신학의 한 부분으로 개인의 죽음과 인류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부활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때에 다시 재림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종말론의 중심이다.
구약에서 내세사상(來世思想)은 신약처럼 충분하게 계시되지 않았지만 전혀없는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 이후의 세레우코스가(家) 통치시대에 이르러 강압적인 헬레니즘화 정책으로 신전조차 그리스 사람들의 약탈 대상이 되는 등 역경에 처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페르시아와 그리스로부터 온 사상의 영향으로 부활·천사·사탄 등의 새로운 사상이 도입되면서 〈욥기〉·〈전도서〉 등에 보이는 회의사상(懷疑思想)과 페시미즘, 〈시편〉에 나오는 여러 탄식의 노래, 처세술을 가르친 〈잠언〉 등의 지혜문학(智慧文學)과 함께 종말사상(終末思想)이 등장하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불우한 처지에 놓이게 된 유태교도의 현실에 외래사상의 영향을 받아 내세사상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는 현세에 대한 신의 최후의 심판이 내리고 유태의 구세주 메시아가 나타나 하느님이 지배하는 세계가 오리라는 사상이다.
이러한 메시아관(觀)은 실제에 있어 메시아 운동으로 나타나서 반(反) 그리스 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다. 기원전 168년에 마카비가(家)의 반 그리스 전쟁이 일어나 기원전 141년에 독립을 이루고 하스몬 왕조가 성립되었으나 히르카누스(재위 BC 135 ~ BC 104)를 제외하고는 모두 약체를 면치 못하고 기원전 63년 로마에 정복당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메시아 운동은 종종 일어났으나 기원후 66년에 있었던 반란은 로마에 의하여 진압되고 이때에 예루살렘의 신전이 파괴되었으며 유태인들은 세계 각지로 분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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