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혼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Jan 15. 2020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1_세례

Being Christian 1장 세례_20200115

함께 걷는 교회에서 로완윌리엄스의 책을 읽고 있다. 함께 매주 모여서 책을 읽으면서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목사님이자 아는 형은 그것을 재미있게 풀어주거나 진지하게 경청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이런 고민들을 해 가면서 함께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시간에 우리는 우리 내면에서 거대한 흐름들을 만나게 된다. 이야기 하면서 나왔던 주제나 내용들을 조금씩 정리해보았다. 언제나 현상은 넘쳐나고 언어는 그 중에 기억에 남아 있는 것만 남게 된다. 현실은 더 풍성하다. 질문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정리해 보았다. 


알렉산드로 이바노프, 민중에게 나타난 예수, 1837~1857년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인가?


보통 기도는 노동의 결과물이다. 산기도는 나무 뿌리를 뽑아야 하고, 금요철야는 목이 쉬어야 제맛이라고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하고 바랄 때 하나님으로 부터 뽑아내야 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이상한 지점들은 예수님의 기도에서 많이 발견된다. 예수님은 너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고 하신다. 우리의 내면 깊이에서 끌어나오는 기도는 사실 우리의 욕망을 언어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영적생활을 글로 기록한 수 많은 위대한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기도란 마음의 평안을 이루는 일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해왔습니다. 기도란 결과와 관련된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일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기도는 여러분이 예수 곁에 설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_로완윌리엄스 p31


기도는 하나님이 루이 안에 행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연약한 우리를 돌보시는 일이다. 우리의 혼돈과 어지러움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나의 안정감이나 축복을 구하는 '기복적인 기회'로 삶는 것을 멀리해야 한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간느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 중에 하나이다. 이스라엘에서 기도는 이러한 우선순위가 당연했다. 1만번을 기도해도 1만번 응답받는 기도는(사실 이런게 어딨는가? 응답을 횟수로 세다니?) 


먼저 하나님께 구하여야 한다.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말이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이웃이 아니면 무엇인가? 적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기를 정의내리는 사람들이 흔히 다른 사람들에 대해 취하는 '비교'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나 정체성, 소유한 것들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나아 보이는 것들을 기준으로 덜 가진 사람들을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러한 생각이 담겨 있는 내면에는 비교에 의해서 열등감을 만들어내는 대상이나, 우월감을 만들어내는 대상으로 쉽게 다른 사람을 보게 만드는 흐름이 생긴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들에 따라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자신과 비슷하면 '이웃'으로 인정하고 비슷하지 않으면 시기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웃이거나 적이 되거나 무생물이 되는 것이다. 인지적인 배제를 자연스럽게 하도록 만들어주는 교회내의 문화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도 바꾸어 버리기 마련이다. 


세례와 관련한 또 다른 큰 진리는, 세례가 여러분을 이끌어 아버지 하나님 가까이에 세우고 혼란과 고난 가득한 인간 세상 가까이 다가가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처럼 그곳으로 초청받은 다른 모든 사람들 곁에 나란히 서게 한다는 점입니다. 세례는 여러분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이웃이 되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이웃이 되는 것 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난감한 일일 터인데, 다른 그리스도인이라는 게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닌 까닭입니다. 어쨌든 그것은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단호하게 며령하는 일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고난당하고 아파하는 사람들 곁에 서는 일이요, 또 예수를 따르도록 초청받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같은 책_p33


나아가는 힘이 없는 경우에는 반대하거나 비판하거나 배제하거나 혐오하게 된다. 나아가는 힘이 우리에게서 나온다는 계몽주의 이후 자유의지적인 인간관은 모든 것을 다 정복해버리고 말겠다는 의미에서 기도와 하나님도 정복하려고 한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을 부리는 채찍과도 같다. 그러나 기도는 원래 그런게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것을 우리가 얽히게 되면 세례받은 인간이 혼돈속에서 인강성을 회복하면서 자신이 이웃이 되어가는 과정인 것처럼, 다른 이들 안에서 끌어오르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게 된다. 모든 창조는 연결되어 있고 그 창조의 핵심에는 예수그리스도가 계시다. 고난당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사실은 나라는 것이고, 우리의 기도의 핵심인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재치기와 같다.
끌어 오르는 우리의 내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오는 기도라는 뜻에서. 


그것이 선물이 까닭은, 세례받은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도와 사랑으로 부터 공급받으며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기도와 사랑을 나누어 주기 때문입니다...이것을 가리켜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좀 어려운 용어로 상호내재co-inherence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결속되며, 우리의 삶은 서로 얽히게 됩니다. p34


이처럼 세례는 잊어버렸거나 억눌려 있던 인간 정체성을 되찾게 해줍니다.


최진욱 '서서히'_2013



그리스도는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


어릴적, 예수님을 처음 알아가던 시기에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를 말하는데,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의 역할을 하다'라는 것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래서 노래도 불렀던 기억이 있다. 예언자 혹은 선지자이면서 제사장이면서 왕이었던 그리스도가 내게 실제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벌써 20년이나 느끼면서 살고 있다. 로완윌리엄스도 그렇게 부각하면서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역할들이 자기스스로에게도,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필요하고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한다. 


세례받은 사람의 정체성 곧 새로운 인간성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의 정체성을 설명는 데 사용된 세 가지 호칭을 헤어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오랜 세월 교회는 예수를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세 가지 정체성을 구현하도록 하나님께 기름 부음받은 분으로 생각해 왔습니다_p 36


그리스도는 예언자이면서 왕이었고, 제사장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속한 곳에서 이러한 역할을 해 내는 것을 말한다. 더욱이 로완윌리암스가 이야기하는 흐름에서는 인간성이 파괴된 곳에서, 혼돈과 무질서가 만연한 곳에서, 파괴와 문제가 들끓는 곳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직무를 다함으로써 그리스도가 끝까지 이루신 '화평케하는 사역'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세례받은 사람은 자신과 예수를 동일시 하여
이 세 가지 인간됨의 방식을 따라 자기 고유의 인간됨을 밝히고 구현합니다.



예언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예언자는 미리 보는 사람이다. 미리 본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미리 본 것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도 예언자의 하나의 일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나 이사야 그 외에도 수 많은 예언자들은 흔히 쓴소리를 많이 했다. 사람들은 잘 듣지 않았고, 부정성을 제거해 버리고 싶은 사람들은 예언자들을 무시하고 좋은 이야기만 하는 거짓선지자들을 선호했다. 그러나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따라서 자신의 미래를 그려간 사람들은 결국 멸망하는 길에 다다랐다. 예언자의 역학을 철철히 이웃으로서 특권이 아니라 책임에 있다. 공동체와 국가와 이웃들에 대해서 책임을 진 상태에서 예언자는 말하는 것이다. 책임은 response와 ability의 합성어이다. 현실의 부름에, 문제 앞에서, 고통과 외침 앞에서 응답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책임은 특권과 다르다. 특권은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책임은 서로에게 반응한다. 


특권에서 책임으로 가는 길이 예언자의 역할이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 본래의 고유한 진리와 정체성 가운데로 되돌리고자 힘쓰며 말합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온전하게 하기위해, 그리고 공동체가 마땅히 따라야할 그 분께 충성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 일하며 외칩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아모스, 호세아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느냐? 하나님께서 너희를 무엇이 되라고 부르셨는지 모르느냐? 너희는 여기 온갖 불평등과 불의와 타락으로 가득한 네 사회 속에 평안히 안자 있구나. 너희가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지 정말 잊었느냐?_p36


우리는 예언자의 역할을 서로에게 해야 한다. 서로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격려하며 때론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 직언하면서 우리의 우리됨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계속 인식하면서 이야기하면서 함께 걸어가야 한다. 



제사장의 역할은 무엇일까?


대학에 다닐 때 '더 브릿지'라는 학생회캠프를 준비했었다. 찢어지고 분열된 세상에서 다리를 놓는 역할들을 하고자 노력했지만, 카리스마가 없었던지 아니면 홍보가 부족했지간에 학생회는 그 뒤로 준비에만 그치고 사라졌다. (물론 그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연결되서 만나고 있다) 그 때부터인가 더욱 '서로 연결되는 다리'라는 메타포는 내 인생의 중요한 방점을 찍고 있었다. 


구약성경에서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을 사람들에게 해석해주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무너져버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며, 손상된 관계를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바치는 가운데 다시 일으켜 세우는 사람입니다. 이런 연결이라는 면에서 예수의 제사장 역할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 예수의 제사장직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권능을 의지해 하나님과 세상의 깨진 관계를 치유하는 소명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인 우리는 다리를 놓는 일에 참여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분열되고 상처 입고 무질서한 상황들을 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잇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런 상황 속으로 끌어들여 현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합니다. 
_p39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가운데 대제사장이다. 벌어진 사이에서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다리를 놓으신다. 무질서한 내면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의 물 위로 끌어 올리셔서 나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워 놓으신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례의 삶을 공동체 안에서 살아간다. 공동체 안에서 손상된 관계를 회복하는 다리가 되기도 하고, 깨어진 관계 안에서 고민하면서도 노력을 하게 된다. 이것은 사실 그리스도가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다. 



왕의 역할은 무엇인가?


왕의 시작은 성경에서 사울왕이다. 그는 카리스마가 넘쳤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생떼를 떠서 얻어낸 왕이었다. 그러나 왕은 타락했고, 하나님읜 기름부어서 다른 왕인 다윗을 세웠다. 다윗은 역시 타락했고 또 회개했다. 현대에 와서 왕은 대통령이나 한 나라의 지도자로 대칭되었다. 그러니깐 왕은 다스리는 것보다는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바뀐 것이고 그것은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어서 우리를 다스리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주권과 권력'이라는 것만 떠오르는 것은 과거의 흔적이 현상에 투영된 것이겠다. 


예레미야서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살피는 일을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아는" 왕을 규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왕"의 소명은 하나님의 정의에 맞추어 우리의 삶과 인간 환경을 가꾸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고, 나아가 세상에 참여하며 그 안에서 맺는 우리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자유, 곧 은혜롭게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받은 삶이란, 우리에게 서로를 향해 그리고 세상을 향해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ㅇ르 제기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제공해 주는 삶입니다. 또 화해를 이루고 다리를 놓고 깨진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애쓰는 삶입니다. 또 화해를이루고 다리를 놓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삶입니다. 세례받은 삶은 정의와 자유를 추구하는 삶이요, 그 자유로 인간 사회의 삶을 하나님의 지혜와 질서와 정의가 반영된 곳으로 만들기 위해 힘을 합쳐 일하는 삶입니다_p40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시고 세상을 섬기는 왕으로 권력과 주권을 완전히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반응이라는 것은 좀 더 삶의 깊이있는 문제들에 대한 응답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섬김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되고, 더욱 온전한 우리됨으로 회복하는 길로 가는 것이겠다. 




심연의 가장자리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갱의 작품은 그 유명한 '황색의 그리스도'나 '인간은 어디서 오며,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 혹은 '예배 후의 환상'이 아니고 '심연의 가장자리'라는 아래의 작품이다. 인간이 자연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떠나서 외부의 환경 가운데 자신을 쏟아 넣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의 심연의 자연의 심연과 연결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매우 다양하고 또 자질구레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자질구레한 일이 현상이라는 현재가 지나가면 다 심연의 깊이 쌓인다. 그리고 우리는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조금씩 심연의 깊이로 들어간다. 


Marine avec vache ; Au bord du gouffre              암소가 있는 해안 ; 심연의 가장자리


이렇게 해서 우리는 처음 출발했던 곳에 다시 섭니다. 인간의 죄와 무질서라는 혼돈이 있고, 그 위로 성령의 바람이 불고,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찬란한 빛 속으로 올라서며, 하늘에서 들려오는 "이는 내 아들이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세례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는 이러한 신비 속에서 삽니다. _p43


선악과와 혼돈은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혼돈 속에서 산다. 무질서가 팽창되는 엔트로피에서 살고, 죄악과 실패가 판치는 세상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삶에 대한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달고 늘어선다. 심연의 가장자리에는 이렇게 넘쳐나는 문제들로 기진맥진하게 밤을 맞도록 고기를 못 잡은 베드로 같다. 거기에 예수님이 조용니 나의 배에 걸터 앉으시면서 깊은 곳으로 간다. 그 깊은 심연에서 나에게 세례를 주시고 나의 혼돈의 깊은 곳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 그리고 나 역시 그리스도가 일하시는 그 문제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곳은 바로 그 문제가 일어나는 곳이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방식은 바로 그리스도가 계신 그 자리에서 심연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혼돈에서 끌어 올려지고, 성령의 바람 안에서 숨쉬며, 하나님께서 그 분의 외아들에게 하신 말씀, "너는 나를 아버지라 불러도 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pY9qiCVQNI

매거진의 이전글 인물이 아니라 사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