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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18. 2020

세례와 창조

함께걷는교회_feat. 로완윌리엄스

202000112_함께걷는교회

주현절을 맞이하여 교회력으로 드리는 예배

마태복음 3장 13절~17절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0. 들어가기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교회가 세례를 좀 더 깊이 성찰하고 그리스도의 상징을 이해할 수록 '의전'은 매우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화채설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식ritual을 행하는 현장에서의 현현present는 우리의 모든 마음을 담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잃어버린,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예배의 감격이란 설교의 감격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행하신 일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맞다. 오늘은 주님께서 현현하시는 주현절을 맞이하여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1. 왜 세례인가?


구약전통에서 세례는 사실 잘 등장하지 않는다. 정결례의 특성상 죄씻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물'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은 물의 메타포를 '혼돈'이라고 생각해보자. 양자역학에서 보면 빛이 파동인가 입자가라는 논쟁이 유명하다. 이 논쟁의 핵심에 있는 것은 빛이기도 하지만 또 물이기도 하다. 물의 엉킴(h20)와 물이 고체가 되고 기화가 되어서 기체가 되는 과정들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유동적인 사물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례를 죄씻기 혹은 정결케하는 과정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대부분 기존 교회들에서 접근하는 방식이지만 오늘은 혼돈과 무질서 속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관점에서 세례를 보자. 그러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생에 오셔서 하시는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2. 창조와 세례


창조와 세례는 동일하게 3가지의 공통점을 갖는다. '물, 성령, 말씀'이 그것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궁창을 나누시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를 운행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라고 하시면서 창조를 완성하셨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안수를 받으러 오시면서 물에 푹 잠기셨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머리위에 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 진다. 창조와 세례는 같은 일이다. 우리의 혼돈의 심연으로 마치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를 운행하셨듯이 들어 오신다. 그리고 수면위로 다시 올라올 때 우리를 같이 끌어 올리시며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 새창조의 증가가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일어스신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내면에서 일어서시는 그리스도의 세례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창조의 영광이 세례에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로완 윌리엄스_영국 캔터베리 주교


3.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최근에 로완윌리엄스의 책을 함께걷는 교회 설교를 통해서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창조와 세례의 상징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에 대한 궁금점으로 로완윌리엄스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라는 책을 사서 읽고 있다. 사실 유진피터슨이나 헨리나우웬의 영성을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근래에 그분들의 글들 보다 좋은책을 만나지 못해서 아쉬웠다. (톰라이트 할아버지는 말이 너무 길어서 이해하기가 힘듦) 그런데 로완윌리엄스의 글들은 따뜻하고 인격적이고, 매우 상징과 메타포가 자주 등장하지만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매우 깊이있는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 같은 인상을 가졌다. (눈썹이 불타오르는 듯한 인상) 잠시 책의 내용을 보자.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교회가 세례를 좀 더 깊이 성찰하고 세례와 관련된 전례와 미술을 다듬기 시작하면서 다른 의미들이 더해 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받는 이야기를 보면, 예수께서 요단강 물 속에 들어가고, 다시 물 밖으로 나오자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 분께 강림하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아들이라"는 한음성이 들려 옵니다. (누가복음 3:22)

이 이야기를 헤아리던 초기 그리스도인드은 여기서 곧바로 물과 성령을 언급하는 다른 이야기와의 여결점을 찾아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처음 창조 때에 물의 혼돈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물의 혼돈 위로는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거나 아니면 큰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첫째, 혼돈이 있었으며, 이어서 바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이 있고, 다음으로 물의 혼돈에서 세상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과 음성, 여기서 여러분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왜 세례 사건을 사도 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한 이미지, 곧 새 창조와 연계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사역에서 출발합니다. 예수께서 물 밖으로 나와 성령을 받고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던 것처럼, 새로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 또한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요 딸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예수와 연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_p24~25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혼돈의 심연으로 무질서를 질서로, 죄악으로 파괴된 인간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셨듯이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 과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회복된 인간성을 가지고선 물위로 올라간다.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사역한다. 우울하고 삶의 희망을 잃어 버리고 일자리를 잃어 버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버린 곳에서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찾아간다. 함께 무질서 속으로, 혼돈 속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이웃들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함께 일어난다. 또한 함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라"라는 말씀을 듣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로완윌리엄스는 아무 인자한 할아버지의 음성으로 그리스도의 의미와 사랑을 표현한다. 


4. 세례와 성찬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되어 간다는 것은 결국 이전과 이후가 존재하는 역사의 거대한 구조가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는 개인의 작은 구조와 만날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항상 역사의 중간에 있었고 찢어진 인생과 파괴된 담, 벌어진 틈 사이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들고 여미고, 세우고, 닫아놓은 역할을 하셨다. 그것은 언제나 경계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타락와 새창조 사이에서, 무의미와 의미 사이에서 그리스도는 서 계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이로 부르심을 받는다. 가장 처음에 일어나는 일은 바로 세례이다. 


세례이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마무리 되는 지점에 선다. 그것은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라는 증표로서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찬으로 자신을 나누어 주셨듯이 깨어지고 붕괴된 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피와 살을 나눔으로서, 우리의 삶을 나눔으로서 평화를 만들고 샬롬을 만드는 일을 '기꺼이'하게 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것이고, 이것을 실현하는 방법은 바로 성찬일 것이다. (성찬파트는 로완 윌리엄스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서 '성찬'부분에서 더 깊게 다루어 보려고 한다.)



0. 나오기 


가끔 완전 식상한 메타포가 부활하는 경우가 있다. 이전에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모르고 있었던 비유들이 많이 있다. 오늘 고민해 본 세례의 메타포에서 나는 중 3때 처음받았던 세례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예장합동에서 흔히 간략하게 치르는 머리 위에 뿌리는 물의 흐름에서 나는 어떤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변화가 있고 그것을 느낀다. 사건이 있고 해석이 생긴다. 지금에 와서야 20년도 넘은 일들이 의미를 발하는 것은, 인간이 삶은 현상 이후에 항상 해석이 오기 때문이겠지. 우리는 지금도 잠시 눈을 감으면 해석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드는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만약 2000년전으로 돌아가서 그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라는 음성이 울려퍼지는 요한의 세례의 공간에 있다고 생각해 보면, 우리는 동일하게 그 부르심에 초대된 것이겠다. 


무질서와 혼돈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것들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쉽지 않은 '초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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