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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pr 24. 2020

50부터는
인생관을 바꾸어야 한다

사이토 다카시_방통대 노인교육학 과제


0. 서론


이제 막 10대를 벗어날 무렵, 무기력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엇인가 기분이 이상했다. '왜 저렇게들 힘이 없을까? 그래서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까?'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 20대가 지나갈 무렵에는 '아 사람이 맘 먹은대로 되지 않는 것도 많구나, 내일이 살짝 두려운걸?'이라고 느꼈다. 30대가 갓 끓인 라면이 오징어 짬뽕처럼 금방 퉁퉁 부어버리듯이 후르륵 지나가고 나니 '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고민으로 무기력한 상태로 가끔 일어나게 되었다. 40대가 지나가는 나이에 나는 아마도 이 책을 읽고 읽겠지? 무엇인가 육체가 소멸해가기 시작한 급류에 잠시 표류하는 것처럼 삶의 의미를 끝끝내 붙잡고 있겠지?  그럼 50대가 끝나가는 나이에는 무엇으로 살까? 아니 60대, 70대가 끝나가는 시절에는 나는 무슨 고민을 하면서 살까? 자포자기일까? 아니면 행복한 노후를 맞이하고 있을까?


인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라는 '왜'에 대한 질문보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더 고민하게 만든 책이다. 도래할 것들에 대한 기대보다는 상실한 것들로부터 자유를 얻는 방법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책에서 노령화 인구가 갈수록 늘어가는 한국사회에서 노인들에 대한 처우와 교육, 제 2, 3의 인생의 시즌을 어떻게 열어갈 수 있도록 도와드릴지를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1. 50! 드디어 폭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50대가 넘어가면서 생산력이 감소하기도 하지만 생산력 자체가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하고,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와 같은 것들은 되돌릴 수도 없는 것 같다. 스티븐코비 2세의 '신뢰의 속도'는 우리의 행동이 신뢰를 급속도로 회복시킬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도 생산성과 미래의 어떤 목적을 위한 신뢰의 속도이지, 50이 넘은 인생들에게 큰 의미를 줄 수 있을까 한다. 물론 제 2의 인생처럼 50부터 새로운 일들이 시작되기는 하지만 신뢰의 속도에서 '속도'보다는 '신뢰'의 깊이가 중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리밸런싱이 필요하다. 내가 경험하고 실험해던 일들에 새롭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을 통해서 과거의 후회를 벗어버리고 추억으로서 단단한 삶의 의지를 다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방식으로 50대를 생각해보면 할 일이 참 많이 보인다. 의미를 부여하고 후대를 위해서 지혜를 남기는 것도 하나의 인생의 과업이 될 것이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이르면서 욕망의 한계가 보이고사회적 성공이나 실패가 그렇게 큰 의미가 없어진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동의가 되지 않는다. 인생의 길이가 늘어나면서 50대에도 여전히 다양한 욕구들이 살아 있기는 한데 말이다. 일본의 상황, 구조적인 절망과 같은 것들이 저자의 생각속에서 느껴지기는 했다. 일본보다는 활기차지만 한국에서도 50을 넘은 아버지들의 막걸리를 한잔하면서 인생을 한탄하는 모습을 많이보게 되었다. 우리 시대에서볼 때 70년대즈음에 태어난 분들은 1987을 경험했고 1997 IMF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는 생의 주기와는 다소 다른 부분이 있다. 허탈감이 더 느껴질 수도 있고 폭탄이 터질 기세도 없이 지금도 여전히 해쳐나가야할 자녀들이 대학등록금과 집세 이자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70세에도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2. 이제 난 남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거든!


확실히 50세가 넘어가면 인정욕구가 커지는 것 같기는 하다. 나이가 먹을 수록, 경험이 쌓일 수록 자신의 선택에는 자신의 열정과 시간과 노력과 혼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어떤 결과물을 냈을 때는 자신이 그 동안 쌓아왔던 아이디어와 인사이트의 정수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는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다양한 출처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을 욕망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정욕구는 항상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때 대처법들을 알아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책에서는 자기스스로 인정하기를 권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도 좋지만, 자기 안에서 스스로 인정해주는 부분들이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지 않았을 때의 서운함을 가감시켜 준다는 것이다.


50세 이전까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속이고서 사회에 적응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배우자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조금 더 자신의 감정에 솔찍해지고, 자신이 하지 못했던 많은 감정의 표현들을 표출하면서 살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렇게 봤을 때 사람은 감정과 느낌, 이해와 인정과 같은 다양한 욕구와 니즈가 있는데도 나이가 들 수록 그것들이 사라지거나 없어진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런나 그와 함께 질투하는 습관은 버려야 한다. 남과 비교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다른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살아 왔는데 이제와서 질투한다고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50대가 넘어가면서 장그레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되면 자신이 안정적이라고 느끼는 지역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공간일수도 있지만 어떤 하루의 특정한 시간이나 취향을 즐기는 것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50이 넘어서 제대로된 취향하나 가지지 못한 어른들이 많이 있다. 무엇을 수집하거나 좋을 술을 먹는다는 것은 중산층 이상일 것이고 서민들은 사실 TV를 보거나 다른 것으로 대리만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슬프다. 정책적으로 문화적인 제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3. 여전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법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정받고 성과를 내는 일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르게 되면 그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의 성과보다는 자신을 지키는 정체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정체성이 정해지면 그에 따른 역할규정이 일어난다. 그런데 문제는 40대를 넘어서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해지는 지위가 약해진다는 것이다. 지금 나의 나이로서는 그런 걱정을 안해도 되지만 50대가 넘어서게 되면 자신의 정체성이 마치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인식될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는 '여전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법'이라는 부분에서 깊은 공감을 느꼈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되면 그 만큼의 대우를 요구하고 또 스스로도 그것에 맞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만의 가치와 자신만의 방향성을 가지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자존심보다는 자존감을 위한 일들을 스스로 해 나가는 것이 건강한 50대를 살아가는 기본적인 바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회가 주는, 구조가 주는 생각의 질서와 정체성의 집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부터 끌어나오는 자율과 자발로 인생을 그릴때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운 교수가 생각났다. 그는 명지대에서 여가경역학과를 경영할 때 학생들에게 '인생 이모작'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제부터 새로운 농사를 짓기 위해서 40대말부터 씨를 뿌리고 50대에 부지런히 가꾸어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여가경영'에 대한 강의를 계속해서 진행했다. 그리고 그자신이 예시가 되어서 일본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삶을, 제 2의 삶을 살고 있다. 사실 이러한 모티브는 이어령 교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이어령교수님의 제자인 박정운 교수는 80세가 넘어도 자신의 인생을 경영하는 선생님을 보면서 새로운 영감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김정운 교수와 이어령선생님



비단 20대 혹은 10대에게만 멘토가 필요한게 아니라 50대에게도 후반기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의 멘토가 필요한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인생은 모두가 아마추어인데 아무리 해마다 반복된다고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경험하게되는 인생의 굴곡점들에 대해서는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새롭고, 상실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니깐 스스로 대안을 찾기 보다 인생의 멘토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조언을 듣고 죽음을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약간 불편했던 부분은 저자의 생각이 일본의 사고 안에 갖혀 있어서 무엇인가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에 안간힘을 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소 작가보다 젊은 세대로서, 한국에서는 다른 맥락에서 50대를 바라보게 된다면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공동체적인 접근과 가정의 새로운 비전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한다. 여기서 인용하는 하이데거식의 '사멸성'의 말로는 결국은 거대한 역사의 존재에게로 자신이라는 존재자가 포함되는 과정으로 죽음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라는 고민도 하게 되었다. 오히려 한나아렌트와 같이 '생명성'을 바탕으로 죽음은 새로운시작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으로 그려도 좋지 않을까하는데 말이다.




4. 50! 폭탄이 터진대도 즐거움은 있다


지루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지루함을 견디는 것도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루함은 사실 생활과 의식의 반복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이 능력을 기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에서도 제시하는 것처럼 철학적인 사고를 깊이있게 도전하는 것으로도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 같기는 하다. 얼마전까지 철학에 대해서 늦기 전에 공부해보고자 철학아카데미라는 사설단체에 다니면서 여러가지 철학을 공부해보았다. 특히 칸트, 헤겔, 스피노자, 하이데거,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들의 생각을 만나면서 그 전에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생각들을 접하게 되었고, 같은 길을 지나가는대도, 새로운 생각에 사로잡혀서 내가 걷고 있는 것인지도 분간못할 때가 많았다. 지루함 속에서 인생의 진리를 파악하고 삶의 목적을 다시 고민해보는 철학적인 사유의 시도의 50대에게도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생을 사는 모티브는 무엇인가? 인간이 살아가면서 어떤 것 때문에 힘들고 어떤 것때문에 기쁜가? 그러한 인생의 풍파를 다 지나고 나서는 결국 무엇으로 삶의 낙을 삼을까?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안을 작가는 제시하고 있다. 루벤스오 세기의 거장들이라는 회화전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 그 당시 루벤스는 네덜란드에 거대한 화풍을 만들고 제자를 300명이나 양성하는 중이었다. 루벤스가 사용한 방식이 바로 모티브를 주제로 한 대상의 새로움이었다. 16세기라는 것을 고려하면 당연히 르네상스시대에 인간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일어났고 그것을 가지고 다앙한 회화에 도전했다. 루벤스의 회화의 방식과 같이 우리의 인생에서도 매번 도전하는 모티브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의미에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모티브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의 목적이 사라졌을 때 '봉사나 섬김'의 모티브로 인류와 이웃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도 하나의 모티브가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나 역시 50이 되기 전에 최대한 다양한 생각과 경험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양한 모티브를 간직하고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루벤스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티브로 한 그림


5. 그래도 내 아름다운 인생은 계속된다!


죽음에 대한 스케치가 한창인 것 같은 장이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실존적인데 그 이유는 50세가 지나면 자신의 친구들과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주변에서도 사별하신 분들의 스토리는 매우 슬프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나라도 그렇게 될 것 같다. 많은 기억과 추억과 어려움을 함께한 배우자가 세상을 떠난다니.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그런데 딱히 이 책에서는 그렇게 많은 대안을 주지 못한다. 그것을 겸허히 받아드이는 것 밖에는 별로 도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런데 오히려 하이데거식의 사멸성을 기반으로 한 미래의 현재화나 실존을 중심으로 한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와 같은 느낌이 아니라 레비나스의 '향유하는 인간으로서 타자로의 이행'과 같은 부분이 필요한 것 같다. 계속해서 자신 안에 갖혀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들을 흘려보내고 다른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밑받침이 되어주고 어디에서나 함께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 말이다. 원래 인간은 나 혼자만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계속해서 자기 혼자서, 의지로 이 어려운 세상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 '성과사회', '피로사회'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우리가 섬길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고, 그 당시에만 필요한 약간의 힘을 요청하는 이웃들이 있다. 이렇게 자신에게서 타자에게로 눈을 돌리는 작업들이 오히려 삶을 온전히 마감하고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50대가 되지 않을까? 너무 자신에게 매몰되지 않는다면 길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닫게 되었다.


성과 사회 속에서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0. 나오기


인생에 대한 질문은 몇 천번도 한 것 같다. 자라나면서 상처난 자존감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고, 사건과 사고들 가운데 인생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데 50대가 지나가면 나의 손에 어떤 것들이 남을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나중이 되면, 나중이 되면이라는 생각만 어렴풋이 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모든 내용을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작가의 사고에서 동시대인들의 비슷한 인류사적 고민을 들은 느낌이었다. 노인이 된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 누군가에게 잊혀진다는 것, 죽음으로 다가간다는 것에서 시작해서 인생의 의미와 즐거움, 자녀들과 축복, 남은 인생에서의 모티브 등에 대한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 준것 같다. 아무래도 계속해서 고민해봐야 하는 주제인 것 같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삶에서 새삼 50대를 준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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