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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pr 24. 2020

선량한 차별주의자

다문화교육론_방송통신대 과제


1. 3장 새는 새장을 보지 못한다.


구조적 차별은 이렇게 차별을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미 차별이 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어서 충분히 예측 가능할 때, 누군가 의도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차별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생긴다. 차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뿐만 아니라 불이익을 얻는 사람 역시 질서정연하게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불평등한 구조의 일부가 되어 간다.


우리는 시대의 아들들이다. 시대가 만들어놓은 '에피스테메'인 인식론을 쉽게 걷어낼 수 없다. 인식론적 구조는 실제로 보이는 구조를 양산해 낸다. 보는 것이 보이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이렇게 자신도 시대의 아들들이면서 마치 자신의 선택인 양 구조적인 차별을 너무나도 다양한 분야에 양산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문화, 성소수자, 난민 등등 우리 사회에서 태어난 것 자체로 신분제처럼 천시받고 배제나 혐오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떠올랐다. 구조적 차별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마냥 선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타인보다 민감한 1인으로서 민감성 역시도 구조에 가리면 다른 방식의 결과를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조가 가리고 있는 진정한 인간성의 태동을 지켜보고자 하면 일단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지 간에 이 부분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2. 4장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비는 이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철학자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약함, 불행, 부족함, 서툶을 볼 때 즐거워한다고 했다. 웃음은 그들에 대한 일종의 조롱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을 우월성이론이라고 한다. 토머스 홉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할 때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나온다고 섦여한다. 누군가 비하하는 유머가 재미잇는 이유는 그 대상보다 자신이 우월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정말 뒷통수를 한대 맞은 느낌이다. 정말로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뒤통수를 맞은 일이 많다. 우월성 이론으로 보면 나는 그런 농담을 할 때 그 사람이나 그 집단에 대해서 우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지내왔던 인생들에 빗대에서 생각해보니 고쳐야할 부분이 상당이 많았다.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농담을 던질 수 있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듯이 그래서 말 그대로 '깔보듯이'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 스스로는 분위기를 좋게 하려는 '선량한?'의도였을지라도 그것자체는 심각한 차별과 모욕감을 주는 행위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였을까? 우월감은 또한 열등감으로 이어지고 열등감은 또한 배제와 혐오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더불어서, 자신과 동일시하는 집단을 우월하게 여기고 자신과 다른 집단은 열등하게 판단하는 것에서 '차이'를 '차별'로 전환하는 지점들을 찾아냈다. 이것을 해결하면 구분이나 차별이 없이, 또한 네트워크와 공동체로 연결되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종족별 구분


3. 6장 쫓겨나는 사람들


이 와중에 '다문화아동'이란는 단어는 왜곡된 한국의 풍경을 보여준다. 다문화라는 말은 본래 다양한 문화의 상호존중과 공존을 강조하는 사상인 다문화주의에서 온 것이다 다문화주의는 각자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펴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특정 문화를 우위에 놓거나 일방적으로 선을 긋고 배척하는 행동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다문화'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어 버렸다. '진짜' 한국인이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용어로 쓰이는 것이다.


다문화아동이라고 하는 말이 차별을 하는 말로 사용된다?라는 것은 충격적이다. 언어와 상징체계 안에서 다른 것을 구별해내고 구분해내는 방식은 항상 우열을 가릴 수 밖에 없다. 우열의 기준은 그 사회마다 다르지만 어쨌든 구분짓기 시작하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편향으로는 내편이나 아니냐라는 것과 나와 비슷하냐 아니냐로 나누기 때문이다.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상징체계 안에서 기표는 이미 기의를 정해놓기도 하고 유도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이 부분은 바로 이책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러 배려하려고 구분했는데 그것이 차별의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구분하는 이유는 유형화를 가져오게 만들고 유형화는 결국 차별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부르거나 구분지을 때 나도 모르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4. 7장 "내 눈에는 안 보였으면 좋겠어"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용하는 싫다는 표현은 다르다. 사장이 어떤 직원이 싫다고 말할 때, 교사가 어떤 학생을 싫다고 말할 때, 이건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며 권력관계의 변동도 아니다. 바로 권력 그 자체이다. 무수한 차별이 싫다는 감정이 나오고, 그 감정이 누군가의 기회와 자원을 배제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주류 집단이 누군가를 싫어한다고 지목함으로써 '낯선 것'을 솎아내는 판옵틱한 감시체제가 작동을 시작하고 공공의 공간을 통치한다.


개인의 선호는 존중되어야 한다기 보다는 그럴수 있다는 인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권력을 쥐고 있고, 그에 따라서 정책을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사람에게서 정의로운 것은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단순히 취향상으로 나는 싫어라고 하는 표현을 했더라고 그것은 이미 권력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아래 사람이 자신이 싫어하면 그 사람을 내 쫓거나 배제시키거나 혼내거나 한다는 것을 이미 내포하고 있으니깐 말이다. 앞으로 공공장소에서도 그렇고 온라인에서도 그렇고 나의 권력이 은연중에 작동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5. 9장 모두를 위한 평등


인정은 단순히 사람이라는 보편성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사람이 다양하다는 것, 즉 차이에 대한 인정을 포함한다. 집단의 차이를 무시하는 중립적인 접근은 일부 집단에 대한 배제를 종속시킨다. 중립이라고 가장된 입장은 사실 주류 집단을 정상으로 상정하고 다른 집단을 일탈로 규정하며 억압하는 편향된 기준이기 때문이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말하는 차이의 정치는 이렇게 중립성으로 은폐된 배제와 억압의 기제에 도전하기 위해서 차이를 강조한다.


모두를 위한 평등은 보편성에 대한 인정보다는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낸시프레이저가 말하는 것처럼 정체성이론이 확고하게 자리잡을려면 '지위이론'으로 가야한다.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접근으로만 되지 않고 그것이 한 사회에서 이정한 포지션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법적인 테두리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다양성 속에서 보편성이 나오는 것이지 보편성 속에서 다양성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이 문단을 보면서 차의 정치, 정체성의 정치 ,지위의 정치가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선량한 차별을 공정한 차이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중립은 없다. 누구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것이 정치이다. 정치의 결과는 법치이다. 그렇다면 법적으로 인정된 선을 만들고 공론장을 만들고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6. 다문화 주의와 선량한 차별주의자


책에서 다양하게 다루고 있는 차별의 사례들 중에서 다문화의 사례도 유독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근본적으로는 '다름'이나 '차이'를 '부정의'와 '차별'로 인식하는 것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문화역시도 보여지는대로 구분한 것들이 구별이 되고 차별로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도 역시 구조적인 차별과 함께 우월성에 근거에서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인종에 대해서는 우월성을, 동남아나 아프리카 지역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열등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다문화'라는 상징질서 안에, 구조 안에 넣어 놈으로써 사람으로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함과 잠재성에 편견을 입혀 버리는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그자체로 모든 부분에서 그렇게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반대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구조적인 한계와 모순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자체로 불량한 포용주의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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