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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03. 2020

한국 기독교 패러다임1 _분리형패러다임

전환기 한국교회_김동춘(하이델베르크 ph.d)


초기 기독교의 분리과정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초창기 복음전파의 전래 단계인 이식기를 기나 점차 교회의 설립과 신자들의 증가로 기독교의 존립그를 거친 후 80년대에 이르러 한국교회의 성장기를 맞이하게 된다.

복음의 맹아들의 배태되기 시작하면서 그 열매가 드러나기까지 한국교회는 '이식기-존립기-성장기'라는 일련의 과정을 밟아왔다.

이 땅에 복음이 전래된 이후 초창기 한국교회는 유교적 조상숭배 문화와 불교신앙, 샤머니즘이라는 전통종교와 전통적인 삶의 양식과 충돌하면서 복음화의 과정을 이루어 갔던 소수종파였다.

초기 한국 개신교는 천주교처럼 조상숭배, 전통종교, 주초문제에서 공존과 유화적 방시기 아니라 충돌과 갈등, 대립의 방식으로 복음의 정체성을 확인해 왔다.

초창기 한국개신교회가 지닌 전반적인 신앙의식은 세속문화와 삶의 양식에 적응하거나 타협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과 분리하려는 이원론적 분리형이 주된 흐름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역량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일제 강점기의 교회는 민족사적 독립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해방전후사의 교회 역시 민족해방과 국가재건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한국기독교의 모든 존재양식이 도피형 기독교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어느정도 교회의 물리적 기반이 구축되기까지 적어도 1950년대까지는 현실정치의 문화 변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이를 변혁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한국사회 속에 복음의 이식기와 존립기를 지나 성장기의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한국기독교의 전체 흐름은 변혁형이거나 적응형은 아니었다.

아직 한국교회는 복음의 역동성에 근거하여 현실세계를 변혁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하여 세상문화와 세속적 삶을 긍정하고 거기에 저긍할 만큼 포용적인 기독교적 사고를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부흥운동과 천국신앙

적어도 이시기까지 교회는 세속문화와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세계를 변혁한다거나 혹은 세상문화에 동화하려는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기독교인 대부분이 희구하는 신앙의 최종목표는 예수 믿고 천당가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에게 기독교란 문화변혁이나 사회 구원이 아니라 육으로 부터 영혼의 구원, 죄 많은 이 세상에서 탈출하는 내세구원을 추구하는 지극히 이원론적이며 분리주의적 종교로서 기독교였다.

이 시기 교회의 신앙 분위기는 고난의 현실에서 위로받고 현실의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대체하기 위해 신비주의 운동이나 기도원 운동, 재림댕망사상 등이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한국 교회에서 가장 일반화된 운동은 역시 부흥회라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한국기독교가 어느정도 일정한 수준의 신학적 자양분과 교회 내적 물리력을 획득하기까지는 기독교 신앙을 토대로 하는 적극적인 사회변혁에 힘쓰기 보다 내세구원과 개인구원에 치중하는 분리주의 기독교였다.


평양대부흥 운동




김동춘 교수 ‘전환기 한국교회’                                                    


 지금의 한국기독교는 교회의 위용을 자랑하고 축하하는 시대가 아니라 실패와 치욕으로 느껴지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제의 찬란했던 교회가 아니다. 이 땅에 우렁차게 울렸던 복음의 확신과 구령의 열정, 그래서 찾아온 교회의 번영이 어느새 회고조의 이야기가 되고 있고, 복음의 존귀함과 교회의 영광스러움은 그리 확신 있게 들려지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가 자랑했던 외형적인 영광의 세기는 지나간 듯하다. 그리고 그 틈새로 기독교신앙의 침체와 혼돈의 현실이 교회에 도래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무분별한 성장과 번영과 외형적 팽창을 향해 달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우려스러운 교회현실을 부둥켜안으면서 한국교회가 지난날 고백하며 확신했던 기독교적인 내용물을 근원에서부터 재조명하는 성찰적 시기에 다다른 것이다.

이 책에서 필자는 한국기독교의 최근의 흐름을 관찰할 때, 패러다임의 전환들이 있었다고 판단하고 그 흐름을 개괄할 수 있도록 분석하고 정리하였다. 그 전환점마다 등장한 패러다임은 각각 그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도 하면서 한계를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최근 한국기독교의 패러다임을 7가지로 분류하였다. 이 패러다임들은 한국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끼치고 있다. 그 가운데 6가지 패러다임을 선정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정리하였다. 이 책에서 빠진 부분은 다음에 정리하려고 한다.


근본주의 기독교 패러다임 / 교회성장주의 기독교 패러다임 / 총체적 복음주의 패러다임/
신칼빈주의 기독교 패러다임 / 변혁주의 기독교 패러다임 / 대안주의 기독교 패러다임/
톨레랑스 기독교 패러다임


이 책이 담고 있는 이 주제들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정리해야 할 신앙적 고민들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제들은 이원론과 세속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 기독교세계관의 문제의식, 해방신학의 쟁점들, 최근 주목되는 아나뱁티스트적 대안, 다원주의 사회에서 톨레랑스의 문제들이다. 이 주제들은 한국교회의 현재를 읽어내는데 필요한 주제들이므로 우리 교회가 당면한 고민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는 글이라 생각된다. 이 책을 교회의 독서그룹이나 토론모임에서 함께 읽으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복음이 무엇이며, 세상 속의 교회의 존재방식과 역할이 무엇인지 정리하면서 그 해답과 대안을 모색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분리모델

이원론적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죄 많은 세상을 도피하거나 충돌하며 살아간다.

반문화적 도피모델 : 세상문화는 죄로 물들어 타락했으며, 인간의 노력으로 개선, 변화시킬 수 없다고 믿는다. 사회정의, 불평등, 인권, 평화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며, 죄에 빠진 이 세상에서 탈출하여 구명선에 올라타야 한다. 우리는 복음전도, 영혼구원, 교회설립에 진력하여 내세천국을 소망한다. 구조선 신앙이다.

성경적 배경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_고후 6장 14절부터 16절

저항적 분리모델 : 세상문화, 제도와 관습, 권력에 타협하거나 동화되지 않고 거절함으로써 비타협적인 저항의 신앙을 보여준다.

주기철 목사가 대표적이고, 집총거부의 형태도 나올 수 있다.

근본주의적 기독교 : 분리주의자들 중 저한 모델로는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세속적 근본주의자들로 남는다. 부와 번영, 성공과 팽창을 욕망하면서 세속주의적인 종교 권력이 된다.

한기총, 대형교회 목회자, 세속적 크리스찬이 이러한 모델을 공유하고 있다.

사회형성가능성 : 세상에 대한 비판적 사고 때문에 현실세계에 기독교를 사회적 차원에서 고민하는 것을 포기한다. 대신 개인신앙이나 교회 안에서 신앙을 집중한다.


적응모델

세속적  그리스도인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동시에 세상의 사람으로 살아간다.

두왕국적 모델 : 그리스도나라와 세상나라에서 신자이면서 시민으로 살아간다. 복음과 율법, 은혜, 말씀과 강제력으로 세상을 유지한다. 개인으로는 산상수훈을, 공인으로는 로마서 13장을 따른다.

일치, 조화모델 : 성경과 근대정신, 신앙과 이성, 창조(자연) 질서와 은총 질서, 하나님나라와 현세나라, 복음과 문화의 조호와 일치를 추구하는 유형이다. 자유주의의 문화개신교주의, 세속주의 기독교가 여기에 속한다.

종합모델(상보적모델) : 신앙과 이성, 자연과 은총, 교회와 국가는 충돌하거나 모순되지 않으며, 서로를 보충하면서 초자연으로 완성되어 간다.

로마 카톨릭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요셉이 그러한 예에 속하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마태복음 22장 21절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충성하지만, 국가 질서에 시민으로서 순종한다.

루터교, 시민종교가 바로 이러한 적응모델에 속한다.

사회형성 가능성 : 세상을 포기하지도 않고 세상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 적절한 타협주의 때문에 강력한 기독교사회를 구성할 수 없지만 일과 삶의 형태로 사회 속의 적응하는 형식은 가능하다.


3,전모

총체적 복음의 그리스도인

전도명령과 문화 명령은 교회에 위임된 두 가지 중요한 사명이다.

로잔연약적 통전적 모델 : 복음전도와 사회 참여는 교회의 두 의미이지만, 그러나 복음전도가 교회의 우선적 사명이다. 빌리그레이험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스토트적 통전모델 : 균형론의 입장에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 바지의 두 가랑이, 부부의 관계로 볼 수 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인격적인 차원이며, 구조악의 구속을 추구하고 해방의 구원은 아니다.

에큐메니컬 모델 : 구원(선교)은 개인과 사회, 역사와 현실을 포함한다. 몰트만이나 WCC가 여기에 속한다.

신칼빈주의나 기독교 세계관 및 주류 기독교가 여기에 속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정하라라는 대위명령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는 문화명령은 교회에 속한 하나의 사명이다.

균형적 관점은 애매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문화명령을 교회의 사실상의 우선적 과제 아래 두게 된다. 기성교회의 형식화된 총체주의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사회형성 가능성 : 미션스쿨, 기독교정당, 언론, 사회시설 등을 통해 가시적인 기독교사회형성이 가능하다. 그러나 역으로 전근대적 기독교세계를 구현하려는 열광주의에 사로잡힐 위험이 있다. 세상의 구속을 강조함으로 변혁주의가 아닌 현실주의에 머문다.


변혁모델

기독교세계관적 그리스도인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구현하며 살아간다.

창조-타락-구속'에서 타락>구속>창조를 강조한다.

전도명령보다 문화명령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주권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단지 개인과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만물 회복의 구원이므로, 문화의 구속, 구조의 구속, 일의 구속까지 확신한다. 일반은총과 영역주권론이 여기에 속한다.

주님이 세상을 통치한다면, 인간의 소유욕, 물질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악마성은 비판되어야 한다.

복음은 사회적 차원까지 시렿노디어야 하며 복음과 사회가 결합한다.

종교사회주의religous socialism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근거로 복음과 사회주의를 결합한다면, 사회복음social gospel은 복음을 사회화하려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 리차드 마우, 코넬리우스 플랜틴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가 여기에 속한다.

협의적 변혁모델 : 기독교세계관은 중생자의 세계관이며, 특별은총이 더 우선이다. 문화전쟁론, 높아진 문화명령과 낮아진 전도명령이 여기에 속한다.

포괄적 변혁모델 : 일반은총을 강조하면서 다원주의 사회에서 포용적인 부편적 기독교신앙을 추구한다.

기독교세계관은 협의적 세계관으로 남든지, 아니면 기독교세계속주의나 적응의 세계관으로 전락될 수 있다.  

유럽에서 종교사회주의는 정당정치로 진입하여 실제화된 바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구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제공한다.


해방모델

사회실천적 그리스도인

우리는 불의한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의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간다.

가난한 자들을 우선적 선택 :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 있다. 예수는 가난한 이웃 가운데 현존하신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교회다.

이 세계의 비참의 현실(빈곤)을 주목하포며, 그것을 박애자본주의가 아닌, 사회구조악의 전면적 해방을 통해 실현하려고 한다.

구티에레즈, 보프, 소브리노, 김근수, 안병무, 서동남이 여기에 속한다.

이상론에 그칠 수 있으며, 사회의 변화는 가난한 자들의 권력으로 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 사회과학적 도식에 따라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가능하다.

사회형성 가능성 : 부와 빈곤의 양극화가 심화된 세계현실에서 서구 기독교 사회가 갖는 부루주아적 한계를 넘어 사회의 희생자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기독교적 사회참여가 가능하다.


대안모델

교회론적 대안 사회

우리는 세상과 전적으로 구별된 대조사회로서 교회를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의 사회를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변혁할 수 없다. 문제는 교회가 이 세상의 권력, 즉 콘스탄틴적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국가교회 혹은 국가신학의 포로된 교회는 잘못되었다.

교회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국가, 기존질서로부터 교회의 해방이 우선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정박자가 아니라 낯선 순례자요,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간다.

교회가 대안사회이다. 교회가 대안사회이다. 교회는 이 세상 어떠한 질서와 전적으로 구별된 대조사회이며 대항사회이다.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길은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길이나 영적 종교기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 자신이 되는 길이다.

게르하르트 로핑크, 로날드사이더, 존하워드 요더, 스탤리 하우워어스가 여기에 속한다.

사회형성 가능성 : 루터주의 적응모델과 신칼빈주의의 변혁모델이 주류 기독교의 흐름으로 존속하면서 사실상 현실주의 노선을 걷게 되었다면 창조와 구속을 분리하고, 교회와 세상을 철저히 구분하는 대안모델적 사회형성론의 타당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게토화의 위험이나 또 다른 교회중심주의의 위험을 생각해야 한다.


관용모델

다원사회의 그리스도인

다원적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타종교, 동성애, 여성혐오와 배타시보다 포용과 관용의 태도로 살아간다.

이 사회는 다원주의적 가치와 신념과 의견으로 살아간다.

이런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신념과 가치와 의견을 덮어 씌우지 말고 그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포용하며 살아가야 한다.

종교간의 대화(이슬람), 동성애, 페미니즘이 대표적이다.

길회성, 김형석, 김용옥이 여기에 속하고, 동성애연대, 페미니즘 현상도 여기에 속한다.

진리는 하나만이 아니라 다양하다.

서술적 다원주의와 규범적 다원주의로 나누어 진다.


섬김의 그리스도인

특징은 온정주의, 구호사업주의, 개량주의가 이에 속한다.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왕적인 통치자도, 정치적 혁명가도 아니며, 약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종, 봉사자 그리스도이다.

이웃에 대한 긍휼에 근거한 교회적 디아코니아는 국가적 사회복지의 출현을 계기로 기독교적 특수성 대신 전문성, 효율성, 보편성으로 진보하였다.

사례로는 복지자본주의 국가, 국경없는 의사회, 테레사 수녀가 여기에 속한다.

사회형성 가능성 : 가장 현실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사회형성론 중 하나이다. 국가적 사회복지는 국가차원의 현실성이 높고, 사회봉사 기구는 지역적, 지구적 활동을 통해 실현가능하다.

 

토론과 나눔 토론

통전적 선교(Holistic Ministry)를 자신의 언어로 정리해 보자.

복음전도와 사회적 참여가 어느 한쪽으로 편향될 경우 어떤 위험이  있을지 나눠 보자.

오늘날 우리(교회, 선교단체, 기독 NGO)의 선교 활동의 모습은 예수님의 사역(눅 4:18-19, 사 61:1-2)을 얼마나 닮아 있는지 나눠 보자.

내가 속한 공동체(가정, 교회, 일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샬롬을 누  리고 있는지 묵상해 보자.

내가 속한 공동체(가정, 교회, 일터)는  궁극적 선교의 목표인 '송영'(颂荣 , 계 7:9~10)을 지향하고 있는지 나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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