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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02. 2020

문화정체성과 세계화 1

행정대학원 공공정책전공2020-2학기

0. 들어가기


문화정체성과 세계화의 시간은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소수자들을 다루어 볼 것이다. 특히 소수자들이 겪고 있는 대표적인 감정 중에 하나가 '혐오'인데, 구조적인 차별의 관점에서 혐오를 분석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논의해보자.


김항교수님은 사실 김만권 교수님의 친구분으로 연세대 3대 천재 중에 한명이라고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기회가 생겨서 강의를 듣게 되었다. 특히 누스바움의 혐오문제나 젠더문제로 접근하는 혐오 이슈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해결해야할 문제 범주'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도서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2019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어크로스, 2018

마크 릴라,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필록소픽, 2018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뿌리와 이파리, 2016


강의의 목적

최근의 `혐오` 현상을 `구조적 차별`이라는 사회과학적 개념으로 정의하고, 이를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함 이론 문헌 및 헌법/법률 텍스트를 통해 혐오와 구조적 차별의 양상을 추적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96066


1. 루소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뜬금 없기는 하지만 우리는 첫시간에 루소를 다룰 것이다. 루소는 '시민'이 되어야 '인간'이 된다는 유명한 테제를 던진다.

루소의 이 말은 '인권'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프랑스에서 인권이 법제화되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시민이라는 것은 citizen인데, 이때 당시에는 국민이라는 범주로 사용되었다.

'인권'은 근대의 소중한 발명품이자, 위험한 발명품이었다. 인권을 근간으로해서 우리시대의 '시민권', '혐오와 배제', '정체성과 정당성'을 살펴볼 것이다.




2. 국가와 인권, 그리고 혐오의 문제

탈식민지부터 시작해보자.

우리 역사에서 우리가 배제되고 서로를 혐오했던 시간들 말이다. 그리고 식민시대에 누군가는 배재의 대상이 되거나, 누군가는 배제를 시키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모두가 아무런 장치나 제도 없이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 배제와 혐오는 우리의 내면으로 깊숙히 파고 들었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안으로부터 바깥으로서 다양한 혐오를 체계화 하기 시작했다.




읽는데 몇년 걸리는 책, 김항교수님을 존경하게 된다.


책소개


글로벌한 시각에서 출발하는 폭넓은 사유

글로벌한 시각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사유의 성좌들 속에서 폭넓은 사유를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은, 프랑스 철학의 숨은 배후였던 1920~1930년대 독일 사상가들을 배경으로하여 우리 시대를 새로이 독해하고 있다. 벤야민은 '비평가'가 아니라 '정치 이론가'이며, 슈미트 역시 '나치즘'을 탈색한 정치이론가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온갖 것이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일상에서 정치와 경제 또는 그와 관련된 용어들이 거리낌 없이 쓰이고 있는 오늘날, 1980년대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인 것을 대표개념은 '말하는 입'과 1990년대 이후 풍족함과 비정치적인 대표개념의 '먹는 입'을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를 상실하였다. 인간의 본래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의 양면성을 모두 지닌 존재다. 그러나 폴리스의 탄생과 함께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구분지어져 왔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더 이상 이러한 구분이 없어진 시대, 저자는 분할과 결정을 불러오는 존재 자체, 말하는 입과 먹는 입으로 '분화된 인간'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불가능한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저자는 이 궁극적인 목표를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에게 존재했던 근대의 시간, 그 시간이 만들어내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검토하였다. 아렌트, 푸코, 칼 슈미트, 발터 벤야민, 들뢰즈-가타리, 자크 데리다, 조르조 아감벤, 마루야마 마사오 등 많은 사상가의 이론과 현실정치의 모습을 통해 정치가 일상에 숨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뒤편에서, '정치적인 것'이 일상의 핵심으로 진입하고 있는 진정한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목차


What's up 총서를 발행하며
감사의 말
서론

01 새로운 성좌를 찾아서
말하는 입과 먹는 입

02 새로운 성좌의 좌표들
독재와 우울, ‘최후의 인간’을 위한 결정 혹은 각성
국가, 전쟁, 노마드
댄디와 주권
탈관계의 관계, 관계의 탈정립

03 몇 가지 성좌의 배치들
정치 없는 국가, 국가 없는 역사
홀로, 다시 또 다시, 나-서기
아직 사람을 먹지 않은 아이를 구하라!
국가의 적이란 무엇인가




출판사 리뷰


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젊음의 사유는 ‘바로 여기 오늘날의 로두스 섬에서’, 글로벌하게 그리고 생명을 둘러싼 정치를 중심으로 펼쳐져야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카오스모스’라는 안개에 휩싸인 오늘날의 시대가 요청하는 젊음의 사유, 민족(주의)이 아니라 글로벌한 시각에서 출발하는 폭넓은 사유를 새로운 사유의 성좌들 속에서 제시해보려고 한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인문학적 담론을 이끌어온 소위 386세대가 아니라 1990년 세대, 즉 광주와 1987년 세대가 아니라 서태지와 IMF 세대인 1990년대 세대를 대표하는 신진 ‘사상가’ 중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는 저자의 신선한 문제의식과 과감한 도전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우리 인문학계의 새로운 풍향을 가늠하는 데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준다.

인문학계는 1900년대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인문학의 죽음’이라는 말처럼 지적 침체와 무기력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인문학’이 아니라 ‘인간’이 쉽게 쓰레기가 되며, 호모 사케르, 즉 살아 있되 죽어 있는 자가 부지기수로 양산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자본주의의 새로운 대두에 대해 ‘탈주’ 등의 대안이 제시되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본이 노동(력)을 체제 바깥으로 ‘탈주’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 지식계 일각에 공고히 자리 잡고 있는 민족주의 흐름도 자본주의의 ‘제국’화와 동요 앞에서는 비판적 예각을 잃어가고 있다.

이 책은 이처럼 복잡하고 온갖 것이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벤야민의 용어를 빌리자면) 새로운 사유의 성좌들 속에 새로이 배치해 앞으로의 사유의 항로를 탐색하려는 진중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과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칼 슈미트가 저자가 호출하는 새로운 성좌들인데, 이러한 이름만으로도 벌써 우리 지식계에서는 논란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에게 벤야민은 ‘비평가’가 아니라 ‘정치 이론가’이며, 슈미트 역시 ‘나치즘’을 탈색한 정치이론가일 뿐이다. 저자는 이들 모두를 정치철학적으로 새로 독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2000년도까지 한국 지식계의 주요 참조항이었던 마르크스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을 모두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도전임과 동시에 새로운 논쟁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입장일 것이다. 실제로 말년의 푸코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일찍 알았더라면’이라고 회고한 바 있듯이 저자의 이 책은 프랑스 철학의 숨은 배후였던 1920~1930년대 독일 사상가들을 배경으로 우리 시대를 새로이 독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동시에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몰두해 있던 우리 사상계에 새로운 좌표축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말하는 입에서 먹는 입으로

한국에서 1980년대가 이데올로기의 시대이고 1990년대가 문화의 시대였다면 오늘날처럼 일상에서 정치와 경제 또는 그와 관련된 용어들이 거리낌 없이 쓰인 적도 드물 것이다. ‘전 지구적 테러’에 맞선 테러와의 전쟁 또한 우리를 공항 검색대에서, 선진국의 도심에서 심심찮게 가로막는다. 이전의 안보 위기와 달리 경제 상황에 따른 ‘국가 위기’ 또는 그에 대응하기 위한 갖가지 조치들이 일상의 평화를 혼돈 속으로 몰고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오늘날의 사상과 철학들에서는 그와 관련한 시원한 해답을 찾기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우리가 ‘정치적’이라고 알고 있던 것들은 이제 의미를 거의 상실한 듯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은 ‘경제’에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경제’가 크나큰 화두였던 지난 대선이후 바로 ‘경제’는 장밋빛 꿈에서 악몽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경제는 달콤한 과일에서 생계와 ‘일자리’ 문제로 줄어든 지 오래이며, 이 생계 문제는 용산 철거 현장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서처럼 폭력과 함께 도심 한복판에서 아찔하게 펼쳐진다. 이제 문화나 이데올로기는 정작 종말을 고하고 모든 것이 정치화되고, 모든 사람이 ‘정치적 동물’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경제 또한 ‘일상의 풍요’를 위한 달콤한 과일에서 글로벌 경제 위기와 함께 생계 혹은 생존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제 경제는 갈수록 초라해지고 정치화는 점점 일상적으로 첨예화되는 시대가 우리가 사는 새로운 시대의 초라한 초상이지 않을까? 이처럼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의 새로운 위상은 자본과 국가 그리고 정치와 관련해 어떠한 모습을 그려나갈까?

일상의 문제에서 거대하지 않은 담론으로 ― 정치적인 것이 일상의 핵심으로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인간은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어느 쪽과도 일치할 수 없으며”,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을 분할, 혹은 결정하는 것은 원래부터 정치 고유의 활동이었다. 그 분할과 결정이라는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의 다른 이름이 폭력이고 말이다. 폴리스(도시 국가)의 성립과 함께 정치는 폴리스 바깥의 인간과 폴리스 안의 인간, 그러니까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을 끊임없이 분할하려 했다. 먹는 입은 폴리스의 탄생과 함께 폴리스 밖으로 떨어져 나갔으며, 폴리스는 이 먹는 입을 배제함으로써 폴리스 내부의 존재인 말하는 입과 함께 폴리스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는 입이 폴리스의 성립과 함께 만들어진 이상 이 분할은 불가능한 시도이다.

폴리스 자체에 이미 이 먹는 입이 탄생한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폴리스는 애초에 나누어질 수 없는 두 요소를 ‘분할’이라는 과정을 통해 나누며 자신의 존재를 존립시켜왔던 것이다. 이런 불가능한 분할의 시도, 소위 ‘법-권리와 몸-생명, 달리 말해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을 반복해서 분할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정치라는 것의 불가능하면서도 유일한 실천’이다. 그러나 이 둘은 둘로 분할할 수도 없거니와, 이 분할을 멈추기 위해 어느 한쪽으로 ‘결정’하는 일은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정치와 폭력은 쌍둥이로 태어났기에, 그리고 정치가 시도하는 분할과 결정이라는 폭력은 종종 실제의 폭력으로 드러나기에 말이다. 저자는 그 예를 독일의 나치즘과 한국의 광주에서 찾아낸다.

저자에 의하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정’이 아니며 지금까지 그래왔듯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을 분할하려는 끝없는 시도를 반복하는 일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분할과 결정을 불러오는 존재 자체, 말하는 입과 먹는 입으로 ‘분화된 인간’ 자체를 없애는 일이다. 기묘한 전도를 거쳐 모순적이게도 ‘분할로서 정의된 인간’을 없애야 한다. ‘가면과 속살을 송두리째 없애야 하고’, ‘이미 분할된 두 가지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를 없애야 한다.’

물론 이런 시도는 말 그대로 극한의 상상일 뿐이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 시도의 끝에 우리가 보게 될 것은 이미 ‘인간’이라는 주체가 불필요해진 사유의 한 단편일 뿐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저자는 인간에게 존재했던 근대의 시간, 그 시간이 만들어내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검토해나간다. 그리고 이 관찰과 검토의 과정은 말 그대로 전세계의 사유를 넘나드는 과감하고 스펙터클한 여정이다.

결코 도착할 수 없는 열차를 타고 떠나며 지나치는 차창 밖의 풍경들을 보기 위해, 종착지가 없을 이런 여정을 떠나며 작가는 차분한 관찰과 검토를 시도한다. 이 검토는 아렌트, 푸코, 칼 슈미트, 발터 벤야민, 들뢰즈-가타리를 위시하여, 자크 데리다, 조르조 아감벤, 마루야마 마사오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상가들이 반짝이고 있는 성좌를 확인해나가는 일종의 ‘탐험’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저자는 벤야민과 슈미트의 기묘한 만남, 그리고 이 두 걸출한 사상가가 공유하고 있는 1848년의 보편적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성급한 ‘역사의 종말’을 지나, 푸코, 데리다, 들뢰즈를 거쳐 조르조 아감벤의 ‘역사의 종말’을 향한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사이사이 우리의 시선을 붙들고 걸음을 멈추게 하는 유혹적인 성좌들을 지나는 이 여정이 유럽으로, 미국으로, 가까운 일본으로,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으로 돌아올 무렵, 우리는 정치가 일상에 숨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뒤편에서, ‘정치적인 것’이 일상의 핵심으로 진입하고 있는 진정한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https://brunch.co.kr/@minnation/1578


이제 다시 류종렬 선생님의 강의노트를 꺼내서 철학을 공부할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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