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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술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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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10. 2023

물속의 사막

기형도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숫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물 속의 사막_기형도




오후 세시

자질구레한 쓰레기에 붙은 감정도 쓸려간다


그림자가 사라진 빌딩의 빈 공간

바싹 메라른 등짝같은 시멘트에


식은땀처럼 조금씩 흘러내린다

이야기는 중지된다


물 속에 감정들이 흘러간다

미움, 즐거움, 연민, 수치심


장마가 유난히도 길었던 여름밤에는

시원한 등목을 한 것처럼


마음 속의 쓰레기도 말끔이

사라진 저녁을 맞이한다


일그러진 표정이 한을 풀었다는 듯이

눈동자가 한없이 맑아진다


읽을 수 없었던 마음들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아버지는 연신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보면서

한가로운 하품을 하신다


떠날려가는 지난날의 상념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것처럼.


길을 잃어버린 고양이는 비로소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길을 찾았다


정확히 토요일 2시

메마른 하늘에 벼락이 치고


어둠 속에서도 한줄기 빛이 비춘다

마치 암흑으로 만들어진 행성에 태양이 비추듯이


한가득 흘러내린 마음의 한 가운데에

번쩍 하고 작은 불빛이 붙는다


감정이 누더기처럼 붙어 있던 시간이

지나가니 아주 작은 천사들의 시가 들린다


팔자주름으로, 작은 보조개로

겨우 읽어낼 수 있었던 날개짓들이


이제는 비를 피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흘러간 물 속에 넘쳐던 쓰레기들이

꾸겨진 사진들 처럼 뭉개져 간다


흘러내린 비가 하수구에 모여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 물살은 멈춘다


아래로 쌓였던 탑들이 모두 물에 잠기고서야

태양은 다시 위로 돋아나는 나무를 보여준다


곧 생각에도 가르마가 생기고

물 속에 흩어졌던 질서들이 하나하나 잡혀간다


소주 두병

아버지가 주무신다


초여름밤의 꿈은 다시 시작된다

천사들의 날개짓은 아주 작은 소리를 낸다


길을 찾던 고양이들이 다시 길을 잃고

여기저기 움직인다


세상의 비참함에 울던 신이

울음을 멈추고 다시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속에 감정들이 덕지덕지 붙어서

다시 쓰레기처럼 불어난다


물 속의 쓰레기_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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