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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19. 2016

공화와 정의

한나아렌트 공화국의 위기_김만권교수님

2007년, 김만권선생님이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내 인생에 나타났다


정치철학을 메타인지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젊은 학자의 눈물은


그 동안 현실주의의 장으로만 인식되던

기존의 정치적 구도를 몰아내고


이상주의가 어떻게 현실의 관습을

벗겨낼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그러다가 만난 학자가 한나아렌트였으니

앞으로 정치적인 입장정리에 가장 중요한

분깃점이 될 것이었다


한나아렌트로 시작해서

고고학의 방식으로 현상학을 추적했다


그리고 후설과 하이데거에 이르러

만들어진 현상이 어떻게 인식을 조종하는지


후폭풍 강한 고민들이 시작되었고

곧 몸의 철학자 퐁티를 만나게 되었다


아렌트가 가지고 있던 시간개념에서 보면

현재가 '틈입'하는 새로운 시간대


바로 이 시간대에서

변화, 혁명, 진리가 태어난다


이런한 지혜는 모든이에게 공개되기에

이 변화를 막으려는 이들에게는


틈입하는 시간이 도래하지 못하도록

만드는게 중요해진다


그래서 홍보전문가, 문제해결사, 냉전전사들은

정보의 기만을 통해서 시간을 압살한다


공화국은 위기를 맞이한다

버네이즈의 말이 귓가에 울린다


'한사람을 속이는 건

우주를 움직이는 것처럼 어렵지만


두 사람만 있으면

어떤 것도 믿게 만들 수 있다'


아렌트에게 물어보자

어떻게 할까




들어가기


1945-67년 미국과 배트남의 관계를 알리는 연구문서인 '펜타콘 문서'가 1971년 6월 13일 뉴욕타임즈에 공개된다. 1967년 미 국방부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가 베트남 연구 테스크 포스팀을 꾸리고 이 문서를 만든것으로 드러났으나 그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맥나마라가 자신의 측근을 이용하여 국방부 내의 자료만으로 작업을 한 탓에 백악관 안보담당조차도 이 일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내부인 중의 한 사람이자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던 대니엘 엘스버그가 이 자료를 몰래 복사해 뉴욕타임즈에 넘긴 것이다. 에세이는 다섯 절로 구성되어 있고 절에 해당하는 제목은 없다. 모두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구분해서 볼 여지는 있다.



컨텐츠, 1절

거짓말과 행위의 관계에서 시작해 정상적 상황에서 거짓말은 현실 앞에 무너진다고 강조한다. 이 에세이에서 아렌트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부분은 거짓말이 성행하는 이유는 거짓말하는 이가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과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새롭게 나타난 거짓말의 두 유형으로 홍보전문가와 문제해결사를 제시한다.


컨텐츠, 2절

이 절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정보집단이 계속 정확한 사실보고를 하는 데도 왜 문제 해결사들은 기만을 저질렀나?'이다. 대통령과 국가의 이미지의 문제 때문임을 강조한다.


컨텐츠, 3절

정책결정자 집단이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이들이 이미지에 대한 집착 때문에 현실에 대해 무지했다. 혹은 현실을 의지적이고 고의적으로 무시했다고 말한다.


컨텐츠, 4절

어떤 합리적인 이유로도 설명되지 않을 때, 우리가 묻게 되는 질문은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이다. 홍보 운영자들은 자기기만을 통해 문제해결사들은 이데올로기화와 탈사실화를 통해 이런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컨텐츠, 5절

진실과 관련된 언론의 품위를 강조하며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맺는다.


제 1절, 사실적 진리와 행위

사시적 진리에 대한 고의적 부정(거짓말하는 능력)과 사실을 변화시키는 소질(행위하는 능력)은 서로 결부되어 있다. 이 둘은 동일한 근원에 의존하는데 그것은 상상력이다. 아렌트는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은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언론이 바로 진실과 사실을 하나로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다. 거짓말과 행위의 관계에서 시작해 정상적 상황에서 거짓말은 현실 앞에 무너진다고 강조한다. 이 에세이에서 아렌트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거짓말이 성행하는 이유는 거짓말하는 이가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과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나타난 거짓말의 두 유형으로 홍보전문가와 문제해결사를 제시한다. 신념은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신념과 이성이 만났을 때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은 철옹성이 된다. 사실적 진리는 사실에 대한 증언과 신뢰할 만한 증인이 필요하다. 따라서 어떠한 사실적 진술도 의심의 여지가 없을 수 없다.



정상적 상황, 현실의 힘

정상적인 상황에서 거짓말쟁이는 현실 앞에 무너진다. 거짓말쟁이가 몇몇 거짓말을 감쪽같이 해치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원칙적으로 그가 거짓말로 살아남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새로운 거짓말쟁이 1, 홍보전문가

창의력이 풍부한 매디슨 애비뉴에서 일을 배운, 악의가 없어 보이는 정부 홍보담당관이 여기에 속한다. 홍보는 일종의 광고일 뿐이다. 홍보담당관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그가 단지 의견과 선의, 즉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의 마음을 취급한다는 점이다. 이들이 공포심을 유발하지 않고서도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진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접근법이다. 최근 지성인 세대들은 난무하는 광고로 둘러싸인 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정치의 절반이 '이미지 만들기'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 '이미지'를 믿게 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이 이론이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심각한 상황이 다가올 때마다 거의 자동적으로 당근과 채찍이란느 오래된 격언에 의존한다.


문제해결사, 거짓말쟁이 2

새로운 거짓말 기술의 두번째 형태는 일상사에서 비번하게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펜타곤 문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아주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고위공무원들에게 더 잘 먹힌다. 이들은 전문적 문제해결사로 대학과 다양한 싱크탱크에서 정부로 영입되어 온 자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게임이론과 시스템 분석으로 무장하고 있다. 따라서 외교정책의 모든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2절, 대략적 내용

이 절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정보집단이 계속 정확한 사실보고를 하는 데도 왜 문제 해결사들은 기만을 저질렀나? 대통령과 국가의 이미지의 문제 때문이다. 펜타곤 문서가 보고하는 것은 패배가 국가의 안녕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가 아니라 '미합중국과 대통령의 평판에 대해' 가져다 줄 충격에 대한 두려움이다. 궁극적 목표는 권력도 이익도 아니었다. 특정한 가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목표는 이제 이미지 자체가 되어 버렸다.


이미지 조작, 가담한 이들

놀라운 것은 이런 이미지 관련 기획에 열정적으로 두움을 제공한 수십 명의 '지성인들'의 열성이다. 아마도 이는 그러한 기획이 요구하는 정식적 활동의 규모에 그들이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현실이나 상식도 문제해결사들의 정신에 개입할 수 없었다.


3절, 대략적 내용

정책 결정자 집단이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이들이 이미지에 대한 집착 때문에 현실에 대해 무지했으며, 현실을 의지적으로 고의적으로 무시했다고 아렌트는 지적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먼 곳의 국민들(베트남인들)에게 미국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심어주려 했다. 이 일을 어리석을 정도로 진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국민들과 그들이 봅은 대표들은 의견 형성 및 결정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알기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관련 사실들에 대해 모두 알 수 있는 최고 권한을 부여받은 행위자들도 거기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더 없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보고서의 99.5%가 과도한 기밀로 분류되어 있었으며, 그 대부분은 실질적 목적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미국 정책과 군사 개입이 비참한 패배를 맞게 된 것은 사실상 수렁 때문이 아니라 25년이나 지속된 역사적, 정치적, 지정학적인 모든 사실들에 대한 의지적이고 고의적인 무시 때문이다.


4절, 대략적 내용

어떤 합리적이 이유로도 설명되지 않았을 때, 우리가 묻게 되는 질문은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이다. 홍보운영자들은 자기기만을 통해서, 문제해결사들은 이데올로기화, 냉전전사들은 탈사실화를 통해 이런 단계에 이른다고 말한다.


홍보담당자, 자기기만

홍보담당자들은 항상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던 대중을 향한 보고와 늘 냉혹하고 불길한 정보계의 진실한 보고서 사이의 경쟁 속에 있었다.  대중을 향한 보고는 그것이 대중을 향한 것이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다어떤 개인이 비밀스럽게 알고 있는 것이나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거짓말쟁이가 성공적이면 성공적일 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믿게 만들고, 결국 이일은 거짓말쟁이가 자기 거짓말을 믿음으로써 끝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펜타곤 문서에서 어떤 특별한 뉴스도 없었다는 점은 그들이 청중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확신에 찬 청중으로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기만자들은 자기기만으로 시작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전쟁에 대해 전반적인 신념을 지니고 있었고, 승리를 예상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실성이 결여된 세상에 살았기에 다른 사실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청중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쉽사리 주목하지 않았다.


정부, 자기기만

정부 내부 세계에서 자기기만은 상대저으로 쉬웠다. 어떻게 하면 전쟁에 패배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이었다. 그리고 늘 있어왔던 다름 선거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이 내부 서클에서 그런 결정적인 문제들에 대한 진실이 성공적으로 은폐될 수 있었다. 비밀과 고의적 거짓이 늘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정치 영역에서 자기기만은 가장 큰 위험이다. 스스로 기만당한 기만자는 자신의 청중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와의 모든 접점을 상실한다.


문제해결사, 이데올로기

문제해결사들은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계산을 했다. 그들의 자기 확신은 수 많은 잘못된 판단 가운데 존재하는 자기기만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수학적이고 순수한 이성적 진리로 이루어진 증거에 의존했다. 이론에 대해서 이데올로기화를 시킨 것이다. 자신의 정신이 갖고 있는 경험의 능력과 그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능력을 대가로 지불하면서 자신의 뇌가 가진 계산 능력을 신뢰함으로써 자신의 정신을 상실해 버린 문제해결사들은 냉전기 이데올로기주의자의 전철을 밟은 자들이다. 반공주의라는 포괄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이들은 어떤 사실이나 정보다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론이 있었고 적합하지 않은 모든 데이터는 부정하거나 무시했다.


냉전전사들, 탈 사실화

문제해결사들은 냉전전사들을 신뢰해야만 했는데, 당시 냉전 전사들의 정신은 문제해결사들이 제공했던 추상적 게임을 아주 잘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 문제해결사들이 제시하는 가설과 그 가설을 확인시켜줄 사실은 다른 것이었지만, 냉전 전사들은가설들과 이론들을 마치 확증된 사실 인것처럼 다루었다. 탈사실화와 문제해결은 현실에 대한 무시가 정책 및 목표 자체에 내재해 있었기 때문에 환영 받았다.


5절, 언론

진실과 관련된 언론의 품위를 강조하며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끝을 맺는다. 보고서와 고나련된 논점 중에 언론을 통해 수년간 공개적 찬반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없다. 정부가 기밀로 유지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문건에 대해 대중들이 수견간 접근했다는 점은 뉴욕타임스가 이야기를 터뜨린 방식보다도 훨씬 강력하게 언론의 품위와 힘을 입증하고 있다. 거짓말은 언론의 협조가 있어야 가능하다. 언론이 자유롭게 타락하지 않는 한, 완수해야 할 엄청나게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언론이 제 4의 정부기관이라 불리는 것은 적절하다. 이미지를 통해서 만들어진 인물을 쫓아가는 것을 청중민주주의라고 한다. 아렌트의 논리는 이것이다. 권력을 위해서 이미지를 만드는데, 결국은 이미지에 빠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권력을 위해서 이데올로기를 만드는데 결국은 이데올로기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권력을 위해서 탈사실화에 빠지게 되는데 다시 탈사실화에 자신이 빠져버린다. 무엇인가 목적과 수단의 일원화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목적과 수단은 결국은 하나가 아닌가? 목적과 수단이 하나가 될 때 우리에게서 나오는 에너지는 어떤가?


민네이션, 생각

fact와 truth는 다르다. 왜냐하면 fact는 지금은 is이지만 어제는 was가 된다. 그러나 truth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is가 된다. 그래서 맞다 '진리truth는 배타적이고 진실fact는 포용적이다'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항상 하나만 존재한다. 여러가지 관점에서 바도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 그래서 배제적이다. 오직 홀로 단독으로 존재함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시킴으로써만 존재한다. 그러나 진실은 항상 다를 수 있다. 보는 관점과 시차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은 항상 포용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진리는 증명할 필요가 없다. 논박할 필요가 있다. 항상 그러한 것이다. 나는 지금 기로에 서 있는 느낌이다. 정치의 길에서 거짓과 효율성의 길로 갈 것인지 아니면 진실과 도덕의 길로 갈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항만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을 알고도 나쁜 의도로 전략을 짠다면 어떻게 될까?사람들의 행동패턴을 이해하고, 인식구조를 알고 있으면서 어떤 조직이나 자신의 이익에 합치되는 방법으로 전략을 짠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을 자기기만으로 빠지게 하고, 자신의 잘못된 신념이 진짜 진리인것처럼 믿게 만드는 방식으로 사회를 만들면 어떻게 될까? 에드워즈 버네이즈와 프로이트가 생각난다. 이들도 자기기만에 쌓여 있던 것일까?정치가 이미지화될 때 자기기만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그냥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이 자신이 인정을 받을 때 느끼는 감정을 유지하기 우해서 사람들은 그러한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강화시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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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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