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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28. 2016

로고스와 고고학

이성의 역사_정인곤 선생님

모든 개념은 연대기적 역사를 가진다

따라서 어느시점에서 보는가에 따라서


의미는 완전히 다른 방향성

다른 범주를 가진다


그래서 메타인지를 하려는 사람들

멘탈리즈나 프로토랭귀지 같은


전체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기원론이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된다


현재가 있기까지 과거의 역사가

촘촘히 쌓여 있는 개념들에서


우리는 삶을 지탱하는 기둥을 만들고

인생을 살아가는 기반을 발견한다


이성은 어디서부터 시작했는가

서양철학사에서 보자




20150710_철학아카데미

김인곤(정암학당)_이성의 역사

호메로스에서 플라톤까지 이성 개념


들어가기


이성의 계보와 반이성의 계보가 있다. 칸트에 따르면 사물은 우리에게 감각으로 다가오지 이미 주어져 있지는 않다. 감각을 통해서 직관이 생기고, 직관을 통해서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직관을 통해서 만들어진 개념을 이성의 영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이성의 계보는 몇 천년을 넘어선다. 반대로 반이성의 계보는 이성의 계보와 같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발전한다. 대상에 대한 앎으로써의 직관을 무시하고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진 개념으로 현상을 분석하거나 포기하고, 행동하는 반이성의 계보들이 있다. 이러한 반이성의 계보는 살인과 전쟁과 억압과 폭력을 불러 온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어떻게 이성과 반이성은 서로 싸우면서 발전해 왔을까? 오늘은 그것을 배우는 첫시간으로 호메로스로부터 플라톤까지 알아본다.


이성, 로고스


우리말 이성은 고전 그리스어 로고스의 번역이다. 로고스는 '세다', '계산하다', '말하다'라는뜻의 레고lego동사의 명사형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말하고 헤아리고 계산하는 능력을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라고 보았다.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했을 때, 이성적이라는 말도 그런 뜻이다. 그리스인들이 동물 내지 짐승을 알로가aloga라고 했다는 데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로고스를 인식론적 존재론의 측면에서 볼 것이다. 로고스가 '이성' 또는 이성의 능력이라는 뜻으로 쓰인 4세기 문헌에서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으나 5세기 문헌에서도 그렇게 사용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 이성이란 논리적 추론과 추리에 바탕을 둔 사유작용을 말한다. 그리스 자연철학이 신화적 사유에서 벗어난 합리적인 사유, 로고스적 사유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자연철학자들의 사유는 이미 이성적 사유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헌상으로는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로고스의 기능은 앎을 형성하는 지적인 능력이라는 점에서 누스 개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플라톤에 이르러 통합된다.


호메로스, 누스


직관을 뜻한다. 진리 내지 실재는 직접 접촉하고 대면하는 것이다. 직접 대면하여 알아차리고 깨달음의 뜻이 포함된다. 일리아스'에서 헬레네가 노파의 모습으로 나타난 아프로디테를 알아차리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선태지들을 비교해서 판단하는 숙고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추론, 추리의 의미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로고스에 의한 전달의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적인 앎, 신적인 앎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앎은 두가지로 구분되어 존재한다.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과 신만이 알고 있는 영역이다. 모든 것에 임재할 수 있는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은 모든 곳에 가볼 수 없기 때문에, 전해 듣고 의견ㅇ르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제우스의 누스는 항상 인간의 누스보다 더 강력하다_일리아스 인간적 성격ethos은 앎을 갖고 있지 않지만, 신적인 성격을 그것을 가지고 있다_헤라클레이토스


헤라클레이토스, 로고스


로고스는 만물의 원리가 되고, 말이되며 이론과 설명이 된다. 전체를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로고스를 말한다. 모든 것을 조종하는 예지라고 할 수 있고, 모든 것에 공통된 것이다.


로고스, 누스


로고스(진리) - 사유(생각) - 언어(말)로 표현된다. 로고스는 공통적인 것이고 곧, 사유하는 것을 뜻한다. 로고스는 사려있는 말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로고스(진리), 감각


로고스는 올바른 감각의 조건이 된다. 감각은 곧 앎이나 이해가 아니다. 현상은 진리의 표지이지만 그것이 곧 진리는 아니다.


파르메니데스, 누스


직관의 의미가 지성의 일차적 기능이지만, 논리적 추론의 의미가 의식적으로 편입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는 것들을 지성nous로 확고하게 바라볼 수 있다. 주목하지 못하는 눈과 잡소리 가득한 귀와 혀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강제하지 못하게 하라. '다만 나로 부터 말해진, 많은 싸움을 담은 테스트를 논변logos로 판가름하여라'_파르메니데스


노에인, 레게인


노에인의 대상은 레게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이의 길은 사유를 위한 길이고 그것은 바로 설득의 길이 된다. 말해지고 사유되기 위한 것은 있어야 한다. 진리에 관한 확실할 만한 논변과 사유는 노에인이 레게인 될 때에만 일어난다. 지성적 사유와 감각적인 구별은 진리의 길과 의견의 길이 된다. 의견의 길은 귀멀고 눈먼 가사자들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 누스


우주 발생 과정을 시작하게 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지성을 말한다. 사물의 변화는 섞임과 분리에서 일어난다. 섞임과 분리를 일으키는 것이 지성이다. 지성은 인식하고, 지배하고,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며, 운동을 일으키는 주체다. 사물들을 움직이는 지성의 힘은 사물들에 대한 지성의 지배력을 의미한다. 지성은 사물들이 코스모스를 형성하도록 움직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사물을 지배하는 것이다. 지성은 모든 것 속에 언제 어디에나 있다. 지성은 시간 공간적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다. 지성은 동일하다. 내제적인 한계를 갖지 않는다. 지성은 사물들과 섞여 있지 않다. 지성은 이질적인 섞임에서 자유롭다.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사물들에 스며들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운동의 원인을 물리적 사물로 부터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은 혼이나 신, 로고스와 동일시 되었다. 엠페도클레스의 사랑과 불화의 작용은 부분적으로는 정상적이지만 물질화되어 섞인 것들의 일부가 된다.


플라톤, 누스


감각과 지성을 구별하였다. 감각에 의한 앎doxa는 상상, 짐작, 믿음, 확신을 뜻한다. 지성에 의한 앎noesis은 추론적 인식, 지성적 인식을 뜻한다. 감각의 대상은 가시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이다. 어떤 형상, 그림자, 실물들은 생성에 관련된 것이다. 지성의 대상은 지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수학적인 것들과 이데아들이며 이것은 존재ousia에 관한 것이 된다.


추론적 인식, dianoia


Hypothesis가정에서 원리arche로 나아가지 않고, 결론으로 나아가는 방식의 탐구를 추론이라고 한다. 수학적인 것들은 지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이것들에 대해서 지성을 갖지는 못한다. 추론적 사고는 의견doxa와 지성 사이에 놓인다_국가


지성적 인식, noesis


추론적 측면에서 이성logos 자체가 변증술의 능력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성은 가정들을 원리로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가정으로 취급하며 모든 것의 원리, 즉 무가정적인 것에로까지 나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사용한다. 직관적 측면에서 지성적 인식은 이데아를 직접 대면하는 것을 말한다. 향연에서 오름길의 마지막 단계는 아름다움 자체를 보는 것이다. 일곱번째 편지'의 저자는 비록 명시적으로 관조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




민네이션,생각


'노에인 대상은 레게인할 수 있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바로 이렇게 직관이라고 불리는 노에인'이라는 인식이 판단과 분석, 추리라고 하는 레게인'할 수 있는 것이 곧 이성이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에만 우리는 표현되어진 모든 것을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표현할 수 있더라도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신'이라는 개념이 우리 안에 생긴다면 그것은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는 맞고, 파르메니데스에게서는 틀렸다. 파르메니데스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reading backward'하듯이 칸트가 구분한 개념과 직관으로 부터 그리스 철학에서의 지성의 역사를 다시 보는 것 같다. 칸트는 그 만큼 대단한 사람이랄까? 추론은 창조를 위해서 개념들의 연결성이 되고, 직관은 개념자체를 고민하게 하는 감각을 받아들인 1차적 결과이다.비판적 사고는 직관의 영역이고, 창조적 사고는 추론의 영역이다. 근현대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고 할 수있다. 과학철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이미 가지고 있는 계몽의 능력(로고스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운동'이라는 의미에서 정신은 모든것들을 움직이는 원리였으나, 파르메니데스에 와서는 움직이는 원리가 사물 자체에 있지 않고 사물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물은 그 자체로 인식대상이 되는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계속 변화하는 것이 사물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운동의 원인 자체가 사물 자체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보는 관점이 내부에 있는가? 외부에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일자'라고 보았다. 정신과 물체가 하나라고 보았다. 그렇게 보면 하나의 사물들은 구조가되고 그 구조가 배열을 이룬다. 앎'을 누스라고 하고 로고스는 지성체계 전체라고 한다면, 호메로스에서는 이 두가지가 분리되어서 인간은 누스만 있고 신은 이 두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이토스에서 이 두가지가 많이 가까워지고, 파르메니데스에서는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렇게 파르메니데스에서 출판한 하나의 개념에서 로고스를 확장시켜서 누스를 포함시켰다. 로고스의 확장은 곧 이데아가 되고, 누스는 곧 현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되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정신과 자연(사물)이 하나가 되긴 하나 정신이 더 큰 개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포함의 관계에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이제 이런 사고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그리스철학은 신을 믿지 않았고, 그래서 인격적인 관계보다는 이성적인 관계를 생각했다. 생각으로 연결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실제로 살아 있고 만질 수 있으며 감각으로도 알 수 있고, 실제로 말을 할 수 있다. 그 하나님은 로고스를 넘어선 말자체가 자신이 되시는, 말 자체가 물체가 되는 능력이 있으시다. 그래서 창세기는 말 자체가 물체가 된 것이다. 인간 역시도 그렇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물과 다르다. 호메로스에서 출발하는 오늘의 도식에서도 역시 관계가 사라져 있다. 인간과 신의 관계가 사라져있다. 기독교는 그렇게 시작하지 않는다.(다만 관계가 없이 기독교를 정의내리는 것을 이원론이나, 이신론이나,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사물과 개념과 관계하는 것이여서 생명이 없는 것이다) 이미지에서 출발하지 않은 개념은 없다. 모든 개념은 추상화의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보면서 자랐는가?(유물론에서 변증법으로 넘어가는 장면이다)에 따라서 다른 개념을 가지게 되는가? 그렇다?개념을 다룬다는 것은 결국 추상의 결과를 다루는 것이고, 동질성들의 집합을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개념을 현실의 이미지까지 가지고 와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 1_누스


아낙사고라스는 세계는 누스가 지배하고 있어, 인간은 누스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플로티노스는 만물은 1자로부터 유출한 누스의 기능에 의한다고 했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로고스와 거의 동의로 이용된다.


누스 (그리스어: νους, nous)는 이성, 지성, 정신, 영혼 등을 의미하는 희랍어.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에서는, 이 말로부터 파생한 '누메논' (noumenon, 생각할 수 있던 것)이라는 말이 '물자체'와 동의로 이용된다.




참고2_파르메니데스


파르메니데스(Παρμενίδης, 기원전 510년 경 - 기원전 450년 경)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엘레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남이탈리아의 엘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진리의 바탕은 바로 이성인데, 이성에 의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자연에 대하여>라는 시를 지었으나 일부분만이 남아 있다



크세노파네스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스승을 크세노파네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가난하였지만 훌륭한 아메이니아스(Ameinias)와 사귀어 그의 지론을 신봉하였고 조용한 생활을 보냈다. 판아테나이아 대제(大祭)에 엘레아의 제논과 더불어 아테네에 나타났을 때에는 이미 고령이었고, 젊은 소크라테스와 만났을 것이라 추정된다.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중에서 짐작하건데 모든 점에서 고귀하고 무언지 모를 심오한 것이 있었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하였다.


그가 남긴 〈자연에 대하여〉라는 서사시는 〈진리의 길〉과 〈억견(臆見)의 길〉로 나누어져 있으니 전자는 탐구의 길, 후자는 탐구되지 않는 길이다. 앞의 경우 그것은 있다, 그것은 있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란 바로 존재자(存在者)요, 그것에로의 길이 진리에 따르는 설득의 길인 것이다. 뒤의 경우, 그것은 있지 않다, 있지 않는 것은 필연, 없는 것은 알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존재(非存在)이기 때문이요, 그것에로의 길이 억견의 길이다. 사유(思惟)란 존재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사유하는 것과 있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있는 것만을 있다고 하고 또한 생각하는 일이다. 존재자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완전무결이며 부동(不動)의 것이며,완전한 구체(球體)라고도 하였다.


영향

존재와 무(無), 일자(一者)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로 플라톤에게 핵심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존재론은 사실상 플라톤의 존재론에 거의 그대로 흡수되어, 이후 2000여년 동안 서양 철학의 핵심인 존재론과 인식론의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논리에는 고대 희랍어의 언어적 오류를 바탕으로 한 것들이 핵심적인 논리에 삽입되어 있어, 이후 많은 논쟁을 낳았다.




참고 3_헤라클레이토스


헤라클레이토스(Ήράκλειτος, 기원전 6세기 초 - ?)는 고대 그리스의 이른바 전소크라테스 철학자이다.


빠른 사실: 이름, 출생 ...

헤라클레이토스의 출생 연대는 매우 불확실하다. 기원후 3세기에 쓰여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 전기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기원전 504년 경에 이른바 아크메(Akme, 사람이 가장 많이 활동하는 나이, 40대)에 접어 들었다고 하며, 에페소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밖에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애에 관해 오늘날 전해지는 일화들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글을 자주 씀으로써 이미 고대에 '어두운 철학자'(Skoteinos)로 이름이 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심 사상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로 유명하다. 그 어떤 것도 안정되거나 머물러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생성, 변화"를 중요시한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을 구성하는 변하지 않는 그 무엇(원질)이 '불'이라고 주장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

경험세계에 대한 형식적 통일에 대해 우려

감각을 완전히 무시는 안했지만 그것을 신중히 써야한다.

평형은 대립적인 요소가 서로 투쟁하여 균형을 유지

그는 "이 세계는 신이 만든 것도 아니며 어떠한 인간이 만든 것 또한 아니다. 언제나 살아 있는 불로서 정해진 만큼 연소되고 정해진 만큼 꺼지면서 언제나 있었고 또 있으며 언제까지나 있을 것이다"라면서 세계의 원질을 불에 비유하였다. 또한 "만물은 움직이고 있어서 무릇 모든 것이 머물러 있지 않는다. 사람도 두번 다시 같은 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만물이 유전(流轉)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선(善)도 악(惡)도 하나인 것이다. 위로 향하는 길이나 아래로 가는 길도 다 같이 하나인 것이다. 우리 가운데에 있는 생(生)과 사(死), 각성(覺醒)과 수면(睡眠), 젊음과 늙음의 양상도 모두 같은 것이다. 이것이 전화하여 저것이 되고 저것이 전화하여 이것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생성의 원리로서 "대립" 또는 "다툼"을 제시하였다. 그는 "여기에 말해 둔 것은 항상 그대로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모르고 지나쳐 버린다. 비로소 그것이 들려와도 들리지 않던 전과 다름이 없다. 만물의 생성이 여기에 말해 둔 대로 행해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그런 범례(範例)를 모르는 듯하다. 그러나 말에도 행동에도 그런 범례는 마땅히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로고스(logos)의 개념을 제시하여 감관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헤겔 이후 재조명 받았고 흔히 '존재에서 생성으로' 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철학의 전회에 따라 영향권이 확장되고 있다. 니체, 베르그송, 들뢰즈 등 현대의 거장들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현저하다. 또한 운동/생성에 대한 고찰이 유사한, 노장철학과 중국철학과의 연관성으로 동양철학에서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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