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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Oct 22. 2024

갈릴레이가 교회와 싸운 이유

물리학의 역사와 철학_대공비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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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천동설은 중세까지도 유행했다. 1600년까지도 유효했다는 것은 놀라운 부분이다. 이때가지 2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람들은 지구가 움직이는게 아니라 태양이 움직인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암흑기인 중세시대를 지나서 이제는 계몽주의와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방식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 시작을 천체를 관찰하던 코페르니쿠스가 시작했고, 뒤 이어서 갈릴레이가 역사의 딴따라 역학을 맡았다. 그 전까지 하늘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였고, 지구는 뒤틀린 나그네들의 섬이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하늘도 마찬가지로 뒤틀린 것이었다. 그러니깐 중세의 천국의 개념에서 '하늘'이 그 하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을 깨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까? 오늘은 갈릴레이가 어떻게 이러한 시련들을 겪어내면서 자신의 주장을 펴왔는지 살펴보자. 요즘에는 과학철학 수업을 듣고 있는데 이러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주요 내용

지적 자유 vs. 제도적 권위

갈릴레이의 성격과 그에게 반대했던 사람들의 성격

예술가와 과학자들을 지원했던 후원시스템의 사회적 구조



1. 배경


1611년부터 1612년 사이의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에 대한 옹호자들은 갈릴레이의 가르침의 성공에 놀라서 공격을 공표하고 갈릴레이의 결론이 성경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과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인 공격으로 내용에 대한 공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개별로 대응하였으나, 이후 충분한 교육을 받은 비평가들에게는 방어적 수준 이상으로 날카롭게 대응하였기 때문에 이후 충돌은 더욱 악화되었다. 다음은 갈릴레이와 교회의 권위의 충돌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갈릴레이와 교회의 권위의 충돌의 줄거리

1. 1610년 3월 : '별의 사자' 출간(Sidereus Nuncius)하여 대중적인 호소력과 충격을 주었다. 이 책에서 망원경을 통해 달의 표면의 질감(거칠고 계곡이 있으며 산과 평지가 있음)을 찾았고, 코페르니쿠스의 체제에서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2. 1613년 12월 : 베네딕트회 수사 카스텔리(Beneddeto Casteli, 1578-1648)에게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드러난 편지를 

3. 1614년 12월 :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사였던 카치니(Thomas Caccini, 1578-1643) 신부는 코페르니쿠스의 체제가 성경의 가르침에 반대되지 않는다는 갈릴레이의 관점에 대해 공개적으로 공격

4. 1615년 2월 : 갈릴레이가 카스텔리에게 쓴 편지의 복사본이 갈릴레이의 지지자들의 관점을 비난하는 문서와 함께 로마의 종교재판소에 송부.  같은 해에「대공비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 to the Grand Duchess)를 완성

5. 1615년 12월 : 코페르니쿠스의 체제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방어하기 위해 로마로 이동

6. 1616년 2월 : 예수회 수사 벨라르민(Robert Cardinal Bellarmine, 1542-1621)과 청중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코페르니쿠스 이론 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금지 당함.

7. 1616년 3월 : 교황청은 수정을 할 때까지 코페르니쿠스의「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volutionibus)의 출판을 금지

8. 1623년 10월 :  혜성의 기원에 대한 갈릴레이의 관점에 비판적이었던 예수회 수사 천문학자에 대응하는 「분석자』(Il Saggiatore)를 출판. 갈릴레이의 혜성에 대 한 가정이 나중에 옳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 저술은 갈릴레이 과학철학의 가 장 중요한 아이디어들을 담고 있음.

9. 1632년 2월 :『두 세계의 체계에 관한 대화』 (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t World Systems)가 출판. 여기에서 갈릴레이는 톨레미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모델을 설명 (코페르니쿠스 이론 옹호)

10. 1632년 8월 : 교황청은 『대화』(Dialogue)의 판매 중단을 명령

11. 1632년 10월 : 갈릴레이는 재판에 서기 위해 로마로 소환

12. 1633년 6월 : 갈릴레이는 유죄를 선고받아 이단 포기 성명서를 읽고 그의 집에 무기한 감금되는 판결을 받음. 


달의 표면이 이렇게 많은 굴곡을 가지고 있었따


대공비에게 보내는 편지

「대공비에게 보내는 편지」는 1613년 12월 토스카나 왕실(the Tuscan Court)이 겨울을 보내던 피사에서 카시모 2세(Cosimo I) 대공이 주관하였던 만 찬 때 일어난 논쟁으로 야기되었다. 

당시 참석한 피사대학의 수학 교수로 새로이 임명된 카스텔리(Benedeto Casteli)는 갈릴레이의 목성의 위성과 톨레미 이론에 반대하는 코페르스쿠스의 우주론을 지지하는 견해를 설명하였지만 이를 반드해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에게 비판을 받았다. 

대공의 미망인인 크리스티나(Christina of Loraine, 1565-1636) 또한 참석하고 있었으며,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기분이 상했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카스텔리는 갈릴레이에게 이 충돌에 대한 편지를 썼다. 같은 해 12월 말, 아마도 대공비의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갈릴레이는 과학적 탐구 대 종교적 믿음에 관한 긴 편지를 카스텔리에게 보냈다.

"저는 사람들이 자연과 관련된 참된 결론을 지지하도록 그들에게 강요하는 방식으 로 성서의 한 구절을 적용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결론의 모순은 우리의 감각적 증거를 통해 또는 필연적인 논증을 통해 아마 도 나중에 드러날 것입니다. 누가 인간의 이해에 경제를 짓겠습니까? 누가 세상에서 알수 있는 모든 것이 이미 다 알려졌다고 우리를 납득시킬 수있겠습니까?"

1615년 「대공비에게 보내는 편지」의 최종판을 완성하고 1614년 카치니 신부는 갈릴레이를 이단으로 비판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갈릴레이는 반대자들과 싸움을 시작하였다. 

1616년 코페르니쿠수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이 임시로 중단되고 성경에 모순되고 가톨릭을 위합협하는 지구운동은 금지되었다. 

중심적 쟁점은 성경적 의미를 결정하는 준거를 정의하는 '권위'를 누가 가졌는가에 대한 문제였으며, 넓게는 과학적 탐구의 자유와 같은 지적 자유 대 권위의 싸움이었어다. 


1600년대를 꽉 잡고 있던 메디치가의 코시모 2세



2. 기본쟁점


기본쟁정은 실재론과 도구론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조건에서 실재론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도구론은 완전한 천상계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적인 틀을 가지고 간결하게 복잡한 현상을 설명하는 가설을 가지고 있는 기존의 학자들에 대해서 코페르니쿠스를 옹호사면서 오히려 실재론적인 관찰을 진행한 갈릴레이의 방식은 성서에 대한 모독과 함께 복잡한 지상의 움직임과 원칙을 하늘에 접목하려고 했던 이유로 대공비의 미망인 뿐 아니라 그 당시 형식주의 혹은 도구론자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기본쟁점은 지구와 하늘의 통합된 이론이냐 아니면 이원론적인 이론인가였다. 



벨라르민이 카르멜파 성직자 포스카리니에게 보내는 편지

성경과의 모순이라는 비난에 맞서 코페르니쿠스의 체제를 옹호하는 책을 썼던 성직자인 포스카리니에게 벨라르민은 1615년 4월 편지를 쓴다.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은 항상 정지해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이심원과 주전원보다 모든 현상들을 더 . 잘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은 위험성을 내포하지 않으며, 수학자들을 만족시킨다. 

배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해안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지구가 돌 때 우리에게 태양이 주변을 도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면, 해안으로부터 떨어져 멀리 움직이는 누군가는 움직이는 것은 해안이 아니라 배라는 것을 명확히 안다.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며 달과 별의 움직임을 판단할 때 속지 않는 것처럼 태양이 움직임을 판단할 때에도 속지 않는 것은 분명히 경험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형식주의적인 접근과 실재론적인 접근이 있다. 대상을 표상하는 이론 속의 개념들이 물리적 실재 속에 참으로 존재하는가 또는 개념의 유일한 기능은 우리에게 간결한 묘사를 주고 계산을 하는 수단을 제공해주는 수학적 구설물에 불과한가? 천문학에 대한 올바른 목표에 대한 플라톤적 개념의 . 한표현에 대해서 살펴보면 우리는 천문학이 적당한 기하학적 구조를 찾으면 그것으로 실재하든 안하든 작업이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톨레미에서 코페르니쿠스까지 이러한 플라톤적 전통 안에서 작업했다는 것을 알 . 수 있다. 


톨레미의, 알마게스트

하늘의 움직임에 대한 가능한 더 간결한 가정들을 시도해보고 또 맞춰보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성공하지 못하면 그 어떤 가정도 가능할 것이다. 일단 그러한 가정들이 결과적으로 모든 현상들을 만족시킨다면, 그와 같은 복잡함이 천체들의 움직임 속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왜이상하게 보여야하는가?

톨레미는 천문학은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일련의 가정들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잡할수는 있지만 최소한의 복잡성만을 취해야 한다. 

일련의 법칙들은 하늘을 지배하고, 다른 일련의 법칙들은 지구를 지배한다. 후자를 통해 전자를 이해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실 1401년에 태어난 니콜라스 쿠사는 지구와 하늘에서 동일한 물리적 법칙이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성의 엄격한 원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는 실재론의 관점에 바탕을 두며, 실재론의 학파적 뿌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심플리키우스, 쿠사, 코페르니쿠스, 브라헤, 케플러, 갈릴레이까지 이어진다. 이들은 모델이나 가정들이 관찰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철학적 원리들과 조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모형이 실재와 부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티코 브라헤는 이러한 관점에서 절충적으로 달과 태양은 여전히 지구를 중심으로 돌지만 나머지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실재론적인 관점과 대조적으로 유럽의 많은 기독교 천문학자들이 사용된 가설들은 간결해야하고 드러나는 현상을 잘 설명해야한다고 믿었으며, 가설의 실재성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실재론적 관점에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표하였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았으며 종교개혁가 루터역시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공격한다. 이후 천문학은 철학과 신학의 관점을 따라야 했다. 클라비우스는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매우 가능성있는 것으로 보았지만 성서와 모순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고 벨라르민은 이러한 관점에서 갈릴레이의 관점을 비판한다. 완전한 천상계를 허무는 실재론적인 갈릴레이의 주장에 대해서 도구론적으로 접근하는 벨라르민과 같은 사람들의 투쟁의 장이 마련된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지도


3. 대공비에서 보내는 편지


성경을 번역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갈릴레이는 성서가 신앙과 도덕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일상적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과 성경이 과학적 논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다. 관찰과 실험의 과학과 종교 사이의 관계를 위한 중요한 선례가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이 담긴 대공비에게 보내는 1615년의 편지는 1636년에 드러났고 결국 카톨릭 국가들에게 금지를 당했다. 그러면 어떤 내용들이 있길래 금지를 당했을까? 주요한 내용을 살펴보자. 


편지의 핵심내용

1. 아카데미 철학자(그 시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지칭)는 진실보다 의견에 가치를 둔다. 갈릴레이의 작업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톨레미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의 박해자들은 갈릴레이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반대하는 주요 핵심은 과학이 명백히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성경에 대립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내용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방법에 대한 반대를 통해서 내용을 보지도 않고 반대하는 것이다.)

2. 과학은 종교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태양은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고 지구는 제자리에 멈추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그들을 위한 성경의 언어이다. 여기에는 해석의 문제가 존재한다.

3. 신은 인간에게 경험과 이성을 주었고, 성경의 의미를 결정할 때에는 권위를 맹목적 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경험과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분석자」 이후의 저술(1623)에서 갈릴레이는 사실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 단순한 믿음보다 이성과 관찰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사례를 든다. 

4. 성경의 목적은 과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갈릴레이는 다시 한 번 진리의 일체성을 강조했다.

5. 그는 독단(도그마)이 지적 탐구를 침묵하게 만들 위험성에 대해 우려했다.

6. 마지막으로 그는 스콜라학자들이 과학의 도움으로 성경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 했다.


오늘날 수 많은 성경학자들이 따르는 것과 같이 갈릴레이의 기본입장은 글자 그대로 표현을 받아들이는 것과 쓰인 언어의 역사적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는 것의 적당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갈릴레이는 이러한 방식으로 여호수아서 10장 10절부터 15절까지의 내용을 논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증명한다. 여호수아는 성경에서 기브온의 도시를 구하기 위해서 아모리인들을 물리칠 때까지 태양을 멈추라고 명령한다. 성경에서는 실재로 태양이 멈추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톨레미의 모델을 따르면 태양이 멈추는 순간 하루의 길이가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길이가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다시 태양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태양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 가속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반대로 여호수아의 명령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더라도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이 더 실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태양이 자연의 주된 대리인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의 심장이자 정신으로서 그자체의 회전에 의해 빛을 보내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물체들에게 운동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태양의 회전이 멈추게 되면 다른 행성들의 움직임도 멈추게 될 것이다. 갈릴레이는 이와 같은 논증을 통해서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발키고 자신의 입장을 반박하게 되면 해석이 엉망이 되는 그림을 제안했다. 그러나 벨라르민과의 면담 후에는 이러한 주장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1632년 종교재판소에 끌려간 이유는 지동설의 입장을 고수한 것만 아니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의 개인적인 관계와도 연결되어 있다. 



우르바누스 8세


4. 갈릴레이와 우르바누스 8세


갈릴레이를 숭배하고 후원했던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1623년 8월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되었다. 여러해동안 갈릴레이와 관계를 맺으면서 친근한 관계를 유지했고 갈릴레이의 작업을 좋아했다. 교황은 갈릴레이가 주장하는 해양의 조석을 통해 지구의 운동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대한 증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교황은 갈릴레이가 톨레미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가설적'으로만 경쟁하는 것만 허락했다. 그러나 우르바누스는 과학적 탐구를 통해서 지식을 진보시키는 것보다는 성서의 권위를 본존해야 한다는 것에는 여념이 없었다. 이후에 자존점이 강한 우르바누스가 갈릴레이의 반대편에 의해서 자신을 조롱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갈등이 생길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갈등을 탐구의 자유 대 제도적 권위, 실재론 대 도구주의(성서의 글자 그대로 해석)와 같은 지적인 인물과 종교적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17세기 대학들은 일반적으로 확립된 세계관을 위협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배타적이었으며, 갈릴레이와 같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위한 후원자를 찾아야 했다. 후원에 의해서 유명해지고 세력이 강해지기도 하지만 연구가 실패하는 경우에는 생계가 어려워지기까지했다. 갈릴레이와 예수회(벨르라민, 클라비우스, 그라시 등)는 모두 후원자에 종속되었고 서로 갈등을 일으키면 그 파장은 승패에 따라서 후원자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미쉘 푸코가 주장한 지식이 권력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부분을 상기해보면 과학자와 후원자 간의 관계는 푸코의 주장을 증명한다.)




5. 종교 대 자연철학


갈릴레이의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적 탐구에 관한한 제도적 권위와 개인의 자유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갈릴레이의 경우에는 제도적 교회와 과학의 외형을 띄었다. 특정 시대와 장소에 따른 역학적 구조가 예술가와 과학자의 후원시스템과 그에 따른 인간적인 반응들을 가져왔다. 갈릴레이가 살았던 이탈리아는 아직 종교적 권위와 과학 사이의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갈릴레이와 동시에 살았던 영국의 홉스는 신학과 철학이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학이 신의 창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신에 대한 이난의 인식을 향샹시키는 반면에 조직화된 종교는 실제로 공민의 불협화음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홉스의 철학은 갈릴레이의 관점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두 사람은 실제로 만났다. 


갈릴레이의 에피소드가 종종 종교가 혹은 실제로 종교적 권위가 과학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인 효과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지만, 중세의 신학이 과학의 탄생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나의 유일한 논점은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였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나의 설명은 근대 과학이론의 발전에 선행하여 일어났던 과학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이 중세 신학으로부터 무의식적인 파생물이라는 것이다"와 같이 이야기했다. 과학이 신학과 관련해서 우주를 설명하는 원칙을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적용하고 어디까지 적용하며 어떤 모형이 실재적가의 고민을 하게 신학이 오히려 도왔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갈릴레이의 일화에서 우리는 제도적인 차원에서 현상을 유지하려고 하는 그룹들이 사용하는 전략과 이를 불러일으킨 '새로운 아이디어가 담김 방법론'으로서 '관찰과 과학의 실재론'의 탄생을 볼 수 있다. 



0. 나오기


중세의 후원시스템은 다양한 분야에서 작용하였다. 철학자들에게도, 과학자들에게도 그들을 후원하는 그룹이 있었고 그 그룹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펼치기 위해서는 후원그룹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갈릴레이와 톨레미 그리고 우르바누스와 대공비 등등 중세를 지나오는 시기에 수 많은 이들이 얽히고 설킨 진실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새로운 방식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것 자체는 가슴뛰는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밥그릇을 뺏는 결과가 나온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불 보듯 뻔한 싸움에서 전쟁을 시작할 것인가? 자신이 화형을 당하거나 감금된다고 하더라도? 이런 고민들이 든다. 이렇게 과학의 역사는 마치 기독교에서 순교의 역사가 진행된 것처럼 화형의 역사와 감금의 역사로 하나하나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스럽게 지구를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지만 1600년까지만해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였고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은 이단으로 정죄받아서 화형을 당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Fl4YrEz2IY


https://www.youtube.com/watch?v=PlVc6BJjCJw&t=128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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